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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눈을 뜨고 알아야 할 네 가지 (엡 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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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을 뜨고 알아야 할 네 가지 (엡 1:15-23)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마음의 눈을 뜨고 알아야할 네 가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꼭 알아야할 네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교회 교인들을 위해 네 가지를 알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하나님에 대하여보다는 하나님을

바울이 감옥에서 가장 먼저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즉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 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을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안나든 것은 지식적으로 단순히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경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가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이명박 대통령을 안다고 말할 때 그분이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현대에서 일하였으며, 소망교회 장로이고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고, 전화해 본적도 없고 친교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상호 교통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앎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기도는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대통령에 관하여 아는 것과 대통령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어려울 때 전화할 수 있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앎이 깊어지면 마음에 품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천지를 지으시고, 어디에도 계신다.” 정도의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경험적인 앎을 위한 기도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들의 큰 죄는 아버지 말을 잘 듣지 않는 것보다 아예 아버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물질이 풍요롭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점점 지식의 폭넓어집니다. 문명, 과학, 의학이 발달합니다. 그러나 점점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고 이제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화의 주인공으로 취급합니다. 

하나님을 철학의 제 일 원인자로 취급합니다. 하나님을 종교적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자신의 출세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심리적 치료를 위한 도구도 생각하여 안심입명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제자 훈련을 시키는데 의사들 그룹이었습니다. 그 중에 모 정형외과 사무장이 같이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시는 의사 집사님이 교회 노처녀 반주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고 돌아서도록 잘 훈련시켜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기도도 잘 하였습니다. 들은 것이 있어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아내의 발을 씻겨주고 감상문을 써 오라고 했습니다. 감상문을 써와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관에 가서 그 자매의 발을 씻겨 주고 감상문을 써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1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잠1: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것을 통탄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노력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데는 별로 투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흄이나, 칸트, 해밀턴, 콩트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맞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개가 영리하다고 하여 훈련시킨다고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고 알 수 있을까요? 멍멍이가 부부의 사랑을 가르친다고 짝꿍한테 가서 "여보 사랑해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고린도 전서 1장 21절에서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 해 주시지 않으면 결코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계시 의존 사색 신앙이라고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 주사"입니다. 즉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영, 계시의 영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눈 육안이 있습니다. 육안이 열려야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 심안이 있습니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아이큐가 20이면 밤하늘의 별을 보며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안 열려야 영적인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불 속으로, 사자굴 속으로,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담대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고백합니다.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단 11:32)”


2.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수단으로 소망-목적으로 소망

바울은 감옥에서 편지하면서 두 번째 알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오늘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왜 불렀습니까? 우연히 불렀습니까? 분명한 목적이 있어 불렀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였습니다. 세상이 만들어지지 전에 여러분과 저를 택하였습니다. 왜 택하였습니까? 우리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벧전5:10; 살전2:12; 빌3:14) 목적으로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케 하기 위해 우리를 불렀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우리를 사탄의 종노릇하는 생활을 청산하고 복음 안에서 자유를 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갈 5:13)”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기 위하여 불렀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불렀습니다. 우리를 죽음, 죄, 율법의 속박, 욕심의 고통으로부터 참자유의 삶을 누리도록 우리를 불렀습니다. 주를 위해 고난 받으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야 영적인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나를 부른 소망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수단으로 부르심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을 이룬 소망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교회에 나온 소망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에 나간 소망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업을 하게 된 소망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하게 된 소망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이 땅의 기업-영원한 기업

세 번째 마음의 눈을 뜨고 알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기업이란 무엇입니까? 영어 NIV성경에는 inheritance로 번역했습니다. 상속입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라고 번역했습니다. 

기업은 하나님께 받은 유산입니다. 분깃입니다. 구약에는 ‘기업’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각 지파별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말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차지할 기업입니다. 이 기업에 대하여 베드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4)”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나라 천국을 말합니다. 그 나라는 해와 달, 성전, 밤, 죄, 병, 눈물, 한숨, 죽음이 없는 나라입니다. 생명나무, 황금길, 진주 문, 보석 정금, 생명수가 흐르는 나라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의 기업에 대하여 생각하며 그것을 알게 되기를. 기업의 영광뿐 만 아니라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도 언젠가 그 날이 다가옵니다. 그 나라에 가는 날이 있습니다. 그 나라에 가면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을 받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의로운 면류관을 받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영광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5:4)”

우리의 영광에 대하여 어떻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1)”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5)”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 나라를 바라보며 기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여러 번 죽을뻔하였습니다. 세번 태장을 맞았습니다. 한번 돌로 맞았습니다(행14:19). 세번 파선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 벗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줄 알고 성 밖에 끌어내었습니다. 점하는 귀신 들린 자 고쳐 주었다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보면서 환란, 궁핍, 곤난, 매 맞음, 갇힘, 요란한 것,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다 극복하였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맡겨준 이 땅의 기업 사명을 이루어 갔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1-13)” 이 고백이 영원한 기업을 바로보고 사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면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하나님의 능력

마지막 마음의 눈을 뜨고 알아야할 기도는 무엇입니까?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짧은 한 절에 ‘힘’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힘’은 ‘이스쿠스’입니다. ‘강력’은 ‘크라투스’입니다. ‘능력’은 ‘두나미스’입니다. 19절과 20절의 ‘역사한다’는 단어도 ‘에네르게오’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영어의 ‘에너지’입니다. 힘과 관련된 모든 헬라어가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임한 능력은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20절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인류를 얽어매는 가장 강력한 힘은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힘은 이 죽음의 권세를 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죽음을 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의 자기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오른편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21절과 22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정사, 권세, 능력, 주관하는 자, 이 모두는 어떤 초월적인 세력들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인간을 두렵게 만드는 세력들입니다. 이런 모든 존재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뛰어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다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21절 말씀대로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주권은 미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시간 뿐 아니라 공간의 모든 것이 주님의 권위 앞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능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힘, 강력, 역사, 능력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습이 초라하고 로마의 권력 밑에서 쓰러지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약한 것 같지만 바로 예수님의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충만’(플레로오)이만 말은 ‘가득 채우다’(fill)라는 뜻입니다. 낡은 옷을 꿰멜 때 해어진 구멍이나 찢어진 곳에 대고 꿰매는 새 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막6:43,8:20) ‘완성하다’(fulfil,마5:17 막1:15), 완전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께서 꿰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완전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득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역대상 29장 11-12절에는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신뢰하며, 이 하나님을 공급자로 삼는 자는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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