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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에는 책임이 따른다 (창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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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는 책임이 따른다 (창 50:15-21) 
 
 
❚꿈이 이루어지면?

요즘 들어 뉴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낱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비리’(非理)라는 낱말입니다. 특히 나라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분들이 비리를 많이 저질러 매일 아침 신문지상을 장식합니다. 실제로 제가 최근 한 달 사이 신문에 나온 머릿기사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이런 말이 참 많이 나오더군요. ‘공직자 비리, 세무비리, 국방비리, 공금횡령, 뇌물수수 등등...’ “아무개 국회의원이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상하이 영사관의 영사들이 스캔들에 연루되어 중징계를 받았다,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4성 장군이 수억의 공금을 횡령해서 조사를 받고 있다”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지도급 인사들의 비리는 안 그래도 물가도 오르고 가뜩이나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에게 커다란 좌절을 가져다줍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냐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도자들도 저렇게 사는데 하물며 우리랴” 하는 도덕불감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공직자와 사회 지도층의 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은 늘 있어 왔습니다만 이런 일들이 점점 늘어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명 의식’의 결여입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에 대한 사명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부심도 없고 책임의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것입니다. 

별 네 개 단 분이 1~2억, 물론 큰돈입니다만 그 돈에 군인으로 평생 살아온 자부심을 팔아넘기고, 몇 천 만원의 돈에 소위 지도자로서의 긍지도 다 잊는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답답함을 이야기했더니 한 목사님 왈,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투자한 것을 다 뽑으려고 그러는 모양이다”라고 말해서 한 바탕 웃은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웃은 뒤에 생각해 보니 참 씁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사람들이 모두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 자리에 올라야지, 반드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하는 꿈을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리에 오른 다음입니다. “내가 저 자리에 오르기만 해봐라. 그동안 투자한 것 다 뽑아야지”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비웃은 사람들, 깔본 사람들 다 혼내줘야지.” 한다는 것입니다. 내 꿈이 이루어지면 그 꿈을 이룬 후 하고자 하는 일들이 고작 이런 것들이란 말입니다. 자기 욕심 채우고 남들에게 내세우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그러니 비리가 생기고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꾼 것은 꿈이 아닙니다. 야망이며 야욕일 뿐입니다. 꿈이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고작 자기 욕심이나 채우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결코 ‘꿈’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꿈은 이루어진 후가 중요합니다. 그 꿈을 이룬 후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얻은 권력이나 자리를 가지고, 내가 얻은 재물이나 능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꿈 이후에 따라 그 꿈이 정말 꿈인지 아니면 한낱 개인의 야망에 불과한지가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꿈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이 책임을 깨닫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것처럼 요셉의 꿈은 개인이 꾼 야망이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 숱한 고난과 좌절을 다 딛고 애굽이라는 대제국의 총리가 된 것도 자신의 계획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이라는 사람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요셉의 꿈에 대한 마지막 시간으로 요셉이 꿈을 이룬 후 실천해 간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꿈이 이루어 진 후

요셉은 드디어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올라 꿈을 이룹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소년이 드디어 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 애굽의 총리, 내 위에 왕 한 사람밖에 없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어찌 보면 눈물겨운 자수성가 스토리요 성공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을 요셉 개인의 성공담으로 보지 않습니다. 바로 사명담, 사명 이야기로 보여줍니다.

요셉이 감옥 안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도 잊혀갈 무렵, 바로가 꿈을 두 번 꿉니다. “아름답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나일 강가에 올라와 풀을 뜯는데 그 뒤에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그 살진 암소를 잡아먹었다”는 꿈과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가늘고 마른 이삭 일곱이 나와 무성한 이삭을 삼켰다”는 꿈입니다. 워낙 괴이한 꿈이라 고민하던 바로에게 그 누구도 꿈을 해석해주지 못하자 곁에 있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신이 요셉을 잊은 죄를 범했다고 말하며 요셉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나게 하신 것이지요.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절대 안 잊으십니다. 사람은 배신해도 하나님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좌절하지 마십시오.

술 맡은 관원장의 말을 들은 바로는 즉시 감옥 안에 있던 요셉을 데려오게 하고 요셉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해석하게 하셔서 그  꿈이 애굽 땅에 7년의 풍년이 든 후에 이어서 7년의 극심한 가뭄이 든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줍니다. 꿈을 해몽해 줄 뿐만 아니라 7년의 가뭄에 대비해 7년 동안 풍년이 들 때 각 성읍에 곡물 저장소를 준비해 곡식들을 잘 저장해두면 흉년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지혜로운 처방도 내놓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로는 크게 감동하며 요셉을 곧바로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오르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30세의 나이에 대제국 애굽의 막강한 실권자가 된 것입니다.

자,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셉이 총리 자리에 오른 다음이라고 했지요? 요셉이 그 막강한 권력에 오른 후 어떻게 합니까? 누구처럼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치부합니까? 아니지요. 뇌물을 받고 권력을 남용합니까? 아닙니다. 마침 가뭄이 들어 제 발로 자기 앞에 형들이 찾아옵니다.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 그 권력을 이용해 형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하던가요? 아닙니다. 창세기 45:4~8을 함께 찾아 읽지요.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 걱정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팔아서 애굽에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부모와 가족과 형님들과 형님들의 후손이 가뭄에 굶어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닥칠 때 나를 통해 그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고 일부러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요셉은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상황을 해석한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알았던 것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이런 과정이지요.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갈 때도, 또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을 때도,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를 배반하고 까맣게 잊었을 때도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구체적으로 그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내가 이런 고난과 역경을 겪는 데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하나님의 섭리를 믿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로의 꿈을 해몽해 드디어 애굽의 총리로 발탁되었을 때 그 확신이 옳았음을 깨달았겠지요. “이거 봐라,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나를 향한 계획이 있어 이 자리에까지 오르게 하신 것이다.”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아직 나를 이 자리에 오르게 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인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가 흉년이 들어 형들이 자신에게 곡식을 사러 와서 자기 앞에 엎드렸을 때 요셉은 비로소 선명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형들이 자기 앞에 엎드렸을 때 요셉이 무슨 생각이 났겠습니까? 분명 자기가 어렸을 때 꾸었던 꿈,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 곡식단에게 절하고 해와 달과 별이 자신에게 절하던 꿈이 생각났겠지요. 바로 그 순간 요셉은 얼마든지 뿌듯해하면서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꿈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이 내게 꾸게 하신 꿈이 바로 이것이로군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세우신 계획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며 더 겸손해 집니다. 또 그 순간 요셉의 마음속에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순간, 형들이 자기 앞에 엎드린 순간 “아! 바로 이때를 위해, 형제들과 그 후손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애굽에 먼저 보내셨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요셉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요셉의 사명, 우리의 사명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후 일어난 사건입니다. 야곱의 장례를 성대히 치룬 후 형들은 또다시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동안 요셉이가 아버지를 봐서 참고 있었지만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우리에게 언제 복수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요셉의 진심을 몰라도 이렇게 모릅니까? 그래서 아마 50:17에서 요셉이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들은 아예 요셉 앞에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하며 납작 엎드립니다. 목숨만 살려달라는 것이지요. 

이 형들의 모습은 고귀한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형들이 만약 입장이 바뀌어 자기가 요셉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른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요셉을 죽이려 들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자신의 꿈, 아니 야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 앞에 비굴하게 엎드리기도 하고 갖은 수단방법을 다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꿈꾸던 어떤 자리에 올랐을 때, 어떤 부나 권력을 차지했을 때 반드시 그 권력과 힘을 남용합니다. 자기 야망을 채우고 욕심을 채우는 데 씁니다. 그리고는 내가 언제 그렇게 비굴했냐는 듯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따를 모범은 형들이 아니라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향해 또다시 이런 말을 합니다. 창세기 50:19~21을 함께 읽습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바로 이 말 속에 요셉의 신앙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악한 계획을 선한 계획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계획을, 그 하나님의 꿈을 알기에 요셉은 오늘 내가 오른 이 총리 자리를 통해 선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사명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오른 자리, 내가 차지한 권세와 권력, 내가 얻은 부와 능력, 이 모든 것은 내 능력과 노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꿈이 무엇일까? 나를 이 자리에 올려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가? 나에게 이것을 가지게 하셔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이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처럼 꿈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을 다른 말로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평생 꿈꾸며 따라야 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은 무엇일까요? 요셉은 그 약속처럼 22절부터 보면 백 십 세를 살며 아버지와 가족과 형들을 부양하고 형제들의 자손들까지 다 책임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능력을 통해 우리가 부양하고 생명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내 가족만 책임지면 될까요? 아닙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 책임의 영역이 좀 더 넓습니다. 창세기 45장 7절 말씀을 다시 보면 요셉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하나님이 그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신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과연 누구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셉의 위대한 신앙을 통해 깨닫습니다. 나 개인을 통해 하나님이 꿈꾸시는 계획이 무엇일까? 내 가정과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이루고자 하실까? 나아가 새 성전을 지어 입당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큰 꿈을 꾸는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품고 계실까?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사명은 무엇일까? 여러분이 바로 이 ‘꿈꾸는 사명자’가 되십시오. 우리 교회가 바로 요셉처럼 ‘꿈꾸는 사명자 교회’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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