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한 영혼에 대한 사랑 (눅 15:3-7)

첨부 1


한 영혼에 대한 사랑 (눅 15:3-7)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물건을 잃어버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입니다. 평소 가치를 느끼지 못하던 물건일지라도 잃어버리고 나면 아쉽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만약 의식적으로 그것이 소중한 물건이라고 한다면 잃어버렸을 때 그 아픔은 더했을 것입니다. 

제게도 11년 전에 평양대부흥 운동 책을 쓰다가 원고지로 약 150매 가량 되는 원고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백방으로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지 못하다가 한 6개월이 지난다음 그 원고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학자가 애써서 쓴 그 원고를 잃어버렸을 때의 아픔과 또 찾았을 때의 기쁨은 형언할 길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비유가 등장합니다.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은 자식에 대한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 가지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렸다가 찾은 기쁨을 목자의 입장에서, 가정주부의 입장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았을 때, 가정주부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그리고 아버지가 잃어버린 사랑하는 아들을 찾았을 때 그 기쁨과 감격을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배경도 다양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들에서, 잃은 드라크마는 가정에서,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은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는 오늘 여러분들과 잃은 양의 비유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우리가 수없는 설교를 들었고 또 우리가 수없이 성경을 읽었던, 그리고 널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오늘 주인에게 백 마리의 양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찾은 후에는 어깨에 메고 집에 들어와 친구들과 그리고 이웃을 초청해서 함께 즐거워했다고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왜 주님이 양의 비유를 들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양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후 주님은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고 부탁을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는 소나 사자나 다른 짐승에 비유하지 않고 양에 비유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양은 자기를 보호해 줄 기능이 없습니다. 
소는 뿔이 있고 사자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있지만 양은 자기를 보호해주는 어떤 기능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목자가 양을 보호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양에 비유한 또 한 가지는 자기 집을 양은 스스로 찾아오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나 심지어 어떤 날 곤충들, 벌들도 자기 집을 찾아오는데 양들은 목자의 도움 없이는 자기 집을 찾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주님이 친히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주셔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얼마나 애타게 찾으시는가 하는 주님의 깊으신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얼마나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건 그 자체가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 마리의 양중에서 어떤 양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때에 그 양을 찾아 나설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필립킬러라고 하는 사람이 「나는 한 때 목동이었습니다.」라고 하는 책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목자가 얼마나 양들을 하나하나 알고 있었는가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유능한 목자는 막대기로 양털의 털 모양만 봐도 털의 피부와 털의 상태가 어떤지 신체의 이상이 어떤지를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이 주인에게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좋은 목자 세심한 주인은 수시로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 마리 중에 어떤 양을 잃어버렸는지를 금방 파악하고 그 양을 찾아 나설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는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많이 출몰하기 때문에 마을 단위로 공동우리를 만들어서 양들을 밤 동안 보초를 서서 짐승들을 보호해줍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에 이제 가서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부르면 자기 양들이 따라오게 되고 그 양들에 앞서서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어떤 양이 이탈했는지를 이 목자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유학시절에 제 지도교수님으로부터 큰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분과 네 번째 과목을 듣고 있을 때 저는 무슨 페이퍼를 써야 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그분에게 다가가서 “우드 그리치 박사님, 제가 어떤 페이퍼를 이 클래스에서 썼으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조언을 좀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랬을 때 그분이 “네가 나하고 들은 과목 OO과목에는 OO페이퍼를 쓰고, OO과목에는 OO페이퍼를 쓰고, OO과목에는 OO페이퍼를 썼는데 이번에는 웨슬리에 대해서 쓰면 어떻겠느냐고 제게 제안을 했습니다. 

저는 그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분이 내가 무슨 과목을 들었는지도 알고 무슨 페이퍼를 썼는지도 알았다는 사실에 저는 일종의 충격어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 편으로 교만한 마음이 은근히 들기도 했습니다. 
‘이 분이 내가 그렇게 탁월하니까 나만 기억하나보다’ 

그런데요, 저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생의 페이퍼와 클래스를 듣는 것까지 다 기억하더라고요. 좋은 교수가 누군가 하는 것을 저는 피부로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좋은 목자, 한 마리의 양이 누가 이탈했는지를 알고 그리고 그 양을 즉시 찾아 나선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이 그 양에 대한, 깊은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그것은 여기에 보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세상의 원리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그 중에 상당수의 양들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릴 때 소를 뜯겼던 사람의 경험은 잘 알 것입니다. 

두 마리의 소를 들에서 뜯길 경우에 한 마리의 소를 잃어버렸을 경우에 한 마리는 나무에 붙들어 매고 아니면 말뚝을 깊이 박고 그 한 마리의 소를 찾아 다시 말뚝이 박힌 한 마리의 소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는 게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다는 것은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한 영혼,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에 그 목자는 그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그리고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의 깊은 험난한 계곡을 그는 헤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방법과 찾은 후의 모습에서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멀리서 양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지형적으로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지역은 꼭대기에 올라가보거나 내려 보거나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한 마리의 양을 찾기 힘든 것입니다. 그것은 또 심리적으로 그 양을 찾았을 때에 어깨에 메고 갔다고 하는 것도 세상의 원리로는 맞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얼마나 찾는다고 하는 표현을 찾도록 찾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은 후에는 어깨에 메고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설 때 그 양을 찾았을 때 ‘너 때문에’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이 목자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달려오는 것입니다. 

제가 교무처장으로 섬길 때 우리 교수님들과 함께 모시고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노 교수님 한 분이 시내산을 꼭 오르고 싶다고 하셔서 간신히 부추겨서 오르셨는데 그 시내산에 오르신 다음에는 쓰러지셨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제가 젊은 축에 들어가는 교수였기 때문에 몇 사람이 부축을 하고 그 교수님을 아래로 내려오는데 그 험난한 시내산에 그 계곡을 오르는 것은 너무 너무 힘들더라고요.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부추기고 내려오는 것도 힘든데 찾았을 때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온다고 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한 영혼을 사랑하는지,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시는지, 그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얼마나 대가를 지불하셨는지 비유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성육신 하시고 죄인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한가정의 장남으로 가정을 꾸려가야 했고 공생애동안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시와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빠진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목자처럼 그는 고통의 십자가를 친히 지시고 구속의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유한이 무한이 되시고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 

루이스 벌콥이라는 신학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주님은 낮아지실 대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잃은 양을 찾은 이후에 기쁨과 감격의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이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양을 어깨에 메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있는 들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목자의 집으로 곧바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은 후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게 돌아가는 게 상식인데 한 마리의 양을 찾은 다음에는 그 기쁨에 목자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보통 힘든 게 아니라고 하는데 잔치를 배설했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 목자는 더 이상 기력이 없을 정도로 탈진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에 풀을 많이 뜯겼습니다. 어느 날 제가 풀을 뜯기고 있는데 송아지를 낳는 것입니다. 송아지가 낳자마자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서더라고요. 그런데 그 송아지가 흙도 묻고 그래서 너무 불쌍해 가지고 제가 송아지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10대에. 아마도 그 때 그 송아지의 무게는 제 몸무게와 비슷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최선을 다했는데 그래도 거리가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목자가 어깨에 메고 왔다고 하는 것을 상상해볼 때 제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로기 상태인데 잔치를 배설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순서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큼 잔치를 배설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잔치를 배설했다는 것은 벗과 이웃을 불렀다고 하는 동네잔치를 얘기하는데 양 한 마리보다도 잔치를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용이 소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의 찾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소 한 마리를 잡았다면 세상의 원리로는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잃어버린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여기에서 비유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한 마리에 대한 목자의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심정을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양에 비유하시고 자신을 목자에 비유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영혼, 이 영혼을 찾았을 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나으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안다’라고 하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기 ‘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들은 대로 히브리 개념에 있어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여자가 남자를 안다’라고 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와 아픔과 고통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교회의 아픔과 고통과 모든 문제를 다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오시고 우리가 안타깝게 간구하신 것처럼 우리 주님은 더 안타깝게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고 기도하시고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 그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눈물 뿌려 피 흘려 기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가져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라고 별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별은 다윗의 별입니다. 다윗은 목동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양 한 마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야수 앞에 밤을 새워가며 지켰던 한 마리의 양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가 이스라엘 왕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보호를 받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의 어떤 백성들보다도 우뚝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윗의 별처럼 세계에 우뚝 선 민족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자가 되신 그 주님이 교회를 지키심으로 그 이전보다도 더 큰 영광,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나갈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양들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10M의 앞을 심지어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양들이지만 양들에게는 청각이 뛰어납니다. 어떤 동물보다도 청각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주인의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만 잘 따르면 양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소부지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수많은 이단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는 가장 사랑스러운 친구처럼, 가장 사랑스러운 남편과 아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시대만큼 이단이 득실거리는 시대가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영적으로 우리가 깨어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목자의 음성을 들음으로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우리의 주님께서 예비해주신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이토록 사랑하면서 찾는 것은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깊은 관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은 보통 정상적인 양은 우리에서 이탈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에서 이탈하는 양들은 저항하는 양, 혹은 병약하거나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양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병든 양,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듯한 존재 같은 그 양을 위해서 우리 주님 목자가 되신 그 분은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님께 저항하고 우리는 병들었던 우리의 양과 같은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한 영혼 병든 양 주님으로부터 끝없이 방황하는 우리의 양일지라도 그 양을 찾아 나선 우리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찾아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래전 제 신학생 한 사람과 함께 지암리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지암리 이제 무사히 방문을 마치고 그리고 그 가까이에 바닷가 방파제를 걸은 적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인 제자와 같이 갔던 게 제게는 색다른 경험이었기 때문에 맹인견을 주목하고 시각장애인 그 오늘을 주목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맹인견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를 제가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방파제를 걷는데 이 방파제를 시각장애인을 가운데 두고 다른 사람들이 둘러싸서 이제 맹인견을 데리고 방파제를 죽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색다른, 낯설지만 도전적인 모습을 제가 보았습니다. 
방파제가 보통 편평하고 끝에 바다에 가파르지 않습니까? 그 가파른 데까지 시각장애자가 가니까 가파른데 바로 앞에서 맹인견이 딱 막더라고요. 너무 신기해서 다시 해보라고 했습니다. 똑같이 해봤는데 역시 그 앞에 가파른 곳에서 맹인견이 주인을 막고 보호하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맹인견도 주인을 이렇게 보호하고 충성을 다하는데 우리의 영원하신 목자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지키시고 보호하실까?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어쩌면 여러분들이 어려운 가운데에 있는 이 순간처럼 보이지만 우리 주님은 맹인견보다도 더 완벽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그 분은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양을 찾아나가는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따라서 주님을 본받아 정말 한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 교회에서 우리 역시 주님의 이 깊으신 사랑을 받은 우리는 잃어버린 주변의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서 우리는 그들도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를 교회로 인도하고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1962년 전도 집회를 마친 빌리그레암은 잠을 청하고 새벽 일찍 일어나서 그 마음에 진한 감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마를린 먼로를 만나야 된다는 부담감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리그레암은 비서를 통해서 마를린 먼로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고 비서들이 먼로의 매니저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매니저로부터 온 것은 아무리 빨라도 2주일을 기다려야 된다는 전갈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2주일 후에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그 2주가 채 지나기 전 세계를 놀랍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인기절정의 먼로가 자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이 목자의 심정을 통해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를 주님은 여전히 바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더 깊이 사랑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따라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나가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