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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질고와 슬픔을 당함으로 (사 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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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고와 슬픔을 당함으로 (사 53:4-6)

1939년 2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경북 의성 경찰서에서 극심한 옥고를 치르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산정현 교회에서 행한 설교의 내용입니다. “나는 저들의 손에 체포되어 오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강단에 다시 서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 감사할 따름이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감옥에 갇혀 늘 기도하던 제목이 있었는데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봅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역시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했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하와 이후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폐결핵 환자로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운 것은 정말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더더욱 그리스도인의 최대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열 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겠습니까! 주님! 이 목숨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머리엔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은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이처럼 죽으셨는데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러나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을 누린다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러니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죽는 죽음은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지요.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고 싶습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우리’ 라는 말이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곧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해야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예수께서 질고와 슬픔을 당하였기에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저의 질고와 슬픔으로, 
 
첫째로 사함을 입었도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 인디언들을 마을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옥수수밭을 만들어 놓고, 한복판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사방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한 두 시간만 지나면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불길이 거세기 때문에 뚫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노인이 외쳤습니다. “마을에서 백 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 인디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또 불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에 순종해서 불을 질렀습니다.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인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 그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라!” 노인은 한 번 불에 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죄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죄 값을 지불해 주셨고, 우리를 죄에서 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께서 찔리고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본래 죄가 우리 위에 왕 노릇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죽음과 지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이미 사형 선고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입고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의 질고와 고난을 통해 죄사함 입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평화를 누리도다 

포철의 신화를 만든 박태준(朴泰俊) 회장은 포항제철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재물과 권력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무당과 점쟁이를 좋아했답니다. 어디 갈 때마다 점쟁이한테 묻고 갑니다. 가다 앞에 큰 담이 가로막혀 있을 경우, 점쟁이 말을 듣고 사다리를 놓고 그 담을 건너서 갈 정도였답니다. 어떤 때는 헬리콥터를 타고 담을 넘는다는 정도로 점쟁이를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니 권력에서 버림받고 누명을 쓰고 망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살다보니 분노가 생기고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복수심에 불탑니다.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나 싶어 병이 걸렸습니다. 그 때 교회를 다니던 딸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그러지 말고 교회에 같이 가보세요.” 처음에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 딸의 권유로 교회에 끌려 나왔습니다. 

첫 날 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 말씀이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복수심을 가지고 사니 스스로 죽어가지 싶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다 용서하고 잊어버렸습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인생이 되었습니다. 죄 용서함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잠을 잘 자고 건강도 회복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고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있으십니까? 미래의 삶이 불안하십니까? 우리를 위해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를 주십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질고와 슬픔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여기의 평화는 외적인 안녕과 조화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너무나 비싸고 귀하기에 거저 주십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는 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시기, 질투, 싸움, 전쟁이 아닌 평화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으로 인한 평화가 마음과 가정, 삶과 교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음을 받았도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회를 담임하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uan Carlos Ortiz)목사는 심한 편두통 때문에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곤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도 찾아가 보고 좋은 약도 먹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문을 읽던 중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받았도다”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이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의 피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던 그는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놀라운 평안에 젖게 되었습니다. 3주일 후, 편두통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나음을 받은 후안 카를로스 목사는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편두통으로 고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마음, 정신, 몸, 영적인 아픔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료 받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나음을 받아야 합니다. 아프고 나음을 입는 반복적인 과정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싸매 주시고 고쳐 주십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심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나음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세기적 음악가 헨델((G. F. Handel)이 메시야(Messiah)를 작곡할 때, 본문 이사야서 53장 부분을 작곡하다가 붓을 멈추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식사시간을 알려오는 하인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소” 이렇게 작곡된 헨델의 메시야는 전 세계의 영혼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살려주시기 위해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달려 돌아가셨음을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온몸을 찢으시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찢기시고 흘리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나는 너를 위해 찢기고 피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 하느냐’ 는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과 평화와 나음을 체험하며 날마다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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