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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겟세마네의 예수 (1) (사 53:4-6,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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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의 예수 (1) (사 53:4-6, 눅 22:39-46)


언젠가 비행기가 착륙하는 과정에서 바퀴가 빠지지 않아 위기를 겪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착륙을 해야 되는데 바퀴가 나오지 않아 기장과 부기장은 고심하다가 마침내 동체로 착륙하는 계획을 했습니다. 승객들에게 이 비행기가 착륙해야 하는데 바퀴가 빠지지 않아 동체로 착륙할 처지에 놓여 있으며, 비행기가 동체로 착륙하다가  비행기가 두 동강 날 수 있으니 안전띠를 매고 조심해 달라는 안내 방송을 했습니다. 모두 평안하게 여행을 하다가 비행기가 기체가 고장이 났다고 하니까 모두 놀랐습니다. 

어느 침착한 분이 그 상황에서 냉철하게 승객들이 취하는 태도를 기록을 했습니다. 안내방송이 나간 후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God help me"를 외쳤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일본사람들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대부분 안절부절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떨며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위기의 시간이 올 수가 있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위기가 오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면 어떤 모습을 취하게 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때 주님이라면 어떤 모습을 하셨을까. 앞서 나서서 “염려 하지말라”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아니면 기도하셨을까. 나는 그때 어떤 모습일까 한 번쯤은 고민해보며 사전에 준비를 하셨으면 합니다. 살다보면 그렇게 위급한 사항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어떤 행동 취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평소에 영적체계나 신앙중심이 건강하게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그때 신앙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고, 의연하게 그 순간을 대처할 것입니다. 종말 때나 임종 때 나타나듯이 영적체계가 구축이 되지 않으면 사뭇 흔들릴 것입니다. 기초 없는 나무처럼 넘어지거나 뽑히거나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모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모델은 나의 삶 전반에 걸쳐서 기준이 되어 주고 삶의 목표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위인전을 읽고 동화를 많이 읽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인전이나 동화 속에는 기준이 있고 모델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긴 인생 속에서 참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모델이나 멘토가 필요합니다. 오늘 그 멘토를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심각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생의 모델 됨을 우리 인생의 기준이 됨을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떠한 것인가를 유감없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그런 모습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멘토적인 모습 발견하게 됩니다. 

1. 출생 모습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자리는 저 아래 자리에서 빈천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렸을 때 빈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참 기구한 자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여행 중에 방도 없어서 우사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택시 안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듣게 됩니다. 병원 가다가 출산하는 경우였을 것을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병원에 도착하여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간호사들이 뛰어 나오고 야단법석을 피었습니다. 이 부인이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 간호사들은 산모에게 “미안해 하지 마세요, 2년 전에는 병원 마당에서 아이를 낳은 산모도 있어요” 그러자 산모가  “그게 바로 나예요” 하더랍니다. 예수님은 가난해서 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여행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분주함 속에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생의 모습을 통해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장차 이 예수님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왔으며, 사명을 완수 할 것인가를 그 모습을 통해서 어떤 분인가를 세상에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입니다. 

2. 자람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줍니다. 예수님은 아주 조용하게 자랐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 모습은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태어나리라고 요란하게 계시하신 것에 비하면 너무 조용하게 태어나셨고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의 유 초등 청소년 시절 기록이 전무합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조용히 자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장기 30년 동안은 고뇌와 고민이 많은 시기를 보냈을 것입니다. 

태어나 보니 백성들이 로마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미래의 꿈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얼마나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앞에는 장차 큰 사명과 앞에 십자가가 주어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젊은 시절을 보낸 아버지 세대들도 그런 상황 이였을 것입니다.  나라는 빼앗기고 자유는 억압되고 태어나 보니 난세였습니다. 나이는 젊고 미래는 아득하고 얼마나 고민을 했었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다 그런 고난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난세에 태어나는 것만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난세에 태어나면 장점이 있는데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넓은 세계관을 가질 수 있고 민족을 품는 꿈과 고민을 가질 수 있습니다. 평상시 사람들은 자기 입신에만 몰두하며 생각하는데 그런 상황이 되어보니 생각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생각하게 되고 민족을 생각하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서 독립운동이라는 큰 뜻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의 폭을 넓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해방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세에 큰 사람들이 탄생하게 되고 큰 뜻을 품는 위인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자랐지만 그러나 생각은 깊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생각하고 구속의 문제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먼저 그의 나라와 뜻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 속에 이미 큰 뜻이 들어있고 틀과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3. 3년 공생애 

예수님의 3년의 삶이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줍니다. 마침내 예수님 성장하여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역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몇 가지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1) 세례 받음 

하나님의 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의식이며 또한 영적 정체성으로 확립하는 순간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 받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고 이제 나는 주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각오를 다짐하는 시간이며, 나의 소속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귀속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식이 세례입니다. 

김익두라는 분은 세례 받는 날 과거에 있었던 모든 삶을 정리하고 김익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부고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장례식 날 김익두는 두루마기 입고 세례를 받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보다시피 나는 오늘 물에 빠져 죽고 다시 태어나는 날이며 옛날의 김익두인 나는 다 포기하고 이제부터 나의 삶 전체는 하나님 앞에 소속되어 나는 주의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의 정체성을 분명이하는 선포식이 곧 세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례부터 받으셨습니다. 

2) 40일 금식기도 

사람의 본능 가운데 가장 무서운 본능이 먹는 문제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금식 기도원을 갔다고 합니다. 아이가 이틀을 금식하더니 하는 말이 “아빠 나 이 다음에 커서 밥 될래”하더랍니다. 어린아이도 먹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습니다. 이틀만 굶으면 그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오늘의 금식개념이 아니고 그것은 단식입니다. 물 냄새도 맡지 않는 철저한 단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사역할 공생애 3년의 시간을 위하여 세례를 받고 금식하신 것입니다. 세례로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 확인하셨고 40일 금식 기도로 자아를 철저하게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셨고 3년 공생애의 사명을 철두철미하게 완수 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오늘 우리들은 너무 느슨합니다. 느슨해지면 길을 잃게 되고 무슨 일을 시작하게 되면 도중에 넘어지게 되고 때로는 시험 들어 넘어지고 낙심하게 되서 흐지부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준비하신 후 사역을 시작하면서 외치신 것이 섬김의 사역입니다. “나는 섬김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노라.” “내 몸을 제물로 주려고 왔노라.” 

그때부터 예수님은 인류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인류의 아픔을 위해서 고민하셨으며 인류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회복과 섬김을 실천하셨습니다. 소외된 자 병든 자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지금 인류는 중병에 걸려있습니다. 죽이고  낙심하고  실패하고 자살하게 되고  탄식하고 증오하고 전쟁으로 인하여 굶주림으로 고난을 겪게 되며 홍수에 산사태에 지진에 교통사고로 마약으로.. 온갖 중병에 걸린 인류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매일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시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 세상인데 마지막 세상의 모습은 “내가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속이 새까맣게 탔을 것입니다. 감람산에서 미래가 없는 세상을 내려다보시고 하염없이 탄식하며 눈물을 흐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 주간에 2번 목회자 회의를 합니다. 일주일간에 있었던 내용들을 보고를 받습니다. 보고를 들어보면  각종 사고, 사건, 아픈 가정, 수술한 가정 고난 받는 가정 등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입원 한 가정이 상태가 악화되어 위기에 처한 소식을 접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도울 방법은 없고 상황은 악화되어 갑니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목회하다보면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갑니다. 교회에서 구역장이나 기관장만 해 보면 어떤 마음인 줄 알 것입니다. 어느 은퇴하신 목사님이 산길을 가다가 고목나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무의 속이 새까맣게 썩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도 목회했니”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들을 보면서 속이 타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냥 있을 수 없고 생각만하면 내 마음이 쓰디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쓴물을 마셔야 그들을 치유하려는 마음, 안타까운 마음, 중보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심정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온갖 쓴물 다 마시고 다 타들어간 시꺼먼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마음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헬라어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란 말로 애간장이 녹아 흐르는 정도의 심정으로 이웃의 처지와 마음을 끌어안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심정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심정으로 십자가를 지심을 통하여 세상이 회복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계 모든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긍휼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그 심정을 가지고 죽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세상 치유가 가능하다고 생각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질게 죽으신 것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내 준 죽음이며 산산이 찢겨진 죽음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치유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는 700년 전에 본문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중병을 치유하고 섬기려고 애를 쓰신 것입니다. 

또 미래의 길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상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배가 부른 다음에는 배부른 그 위에 더 큰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고민은 바로 영적고민입니다.  이 고민을 풀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영적 걱정은 죽음에 대한 걱정입니다. 말기 암환자는 통증이 심합니다. 극도의 통증과 아픔을 느껴서 항암치료를 받고  방사선 치료도 받습니다. 

자각 증세가 느껴져서 아프지만 그 위의 더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방사능치료 항암치료만 받으면 100% 낫는다 하면 그것은 암이 아닙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치료과정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잠도 자지 않고 자꾸만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영적 고뇌가 사람으로 하여금 외롭게 만듭니다. 자살자들은 몸을 던져 스스로 자살을 합니다. 자살 할 힘이 있으면 차라리 살지 왜 죽는가 하지만, 자살자들은 죽을힘은 있어도 살 힘은 없으니 그러니까 죽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살아있어야 할 힘이 0.1%도 없기 때문에 몸을 던져 죽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우면서도 그 두려움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런 아픔과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선포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부활함으로서 죽음 따위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치료방법이시고 회복의 방법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 받아 죽으시고 모범으로 부활하셨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3년 동안 사시고 우리들의 모델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온 정신과 마음은 인류와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복을 주고 위로를 주고 치료를 줄까 만을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모릅니다. 주님을 가장 서글프게 만드는 것이 모름과 몰이해 무지입니다. 왜 세상에 오셔서 찔리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치료하시려고 우리의 아픔과, 약점, 무지를 회복시키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걱정 말라고 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격려하시고  보여주시려고 온 것입니다.   

4. 질시 받음의 삶 

예수님의 3년 삶은 질시 받은 삶이였습니다. 질시 받은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3년 동안 성실히 사셨고, 섬기셨고, 치유하셨고, 위로하셨고, 인류가 겪는 아픔과 고뇌를 스스로 체휼하셨습니다. 그 삶이 백성들의 공감을 샀고 호응을 얻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주님으로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그 꼴을 못 보고 질투가 생기게 되어 증오와 반대가 심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선하게 살면 살수록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난이 쏟아지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속성입니다.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때로 실망하게 되고 시험 들게 되는 것입니다. 선의 삶은 질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오셔서 치유하시고 중보하시고 회복하시고 함께하셨지만 결국 

뒤에서 질시를 받으셔서 죽게 되셨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타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화 있을 진저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자기도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바리새인들이여”하고 질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인류의 희망의 등불이었는데 그 점이 질시 받아 결국 십자가에서 죽게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내일을 생각하셨습니다. 주님은 절박한 시간 마지막날 저녁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에 예수께서 어떤 행동을 취하셨는지 그 모습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 어떤 모습을 취하시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세 가지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는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그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복음13장1절). 예수님은 내일 십자가를 져야 할 마지막 절박한 시간에 사랑을 나눴고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상식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 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때 더러운 부분을 씻겨준 것 뿐 만아니라 제자들의 발은 앞으로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할 발입니다. 이제 내가 죽으면 제자들은 이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누비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발입니다. 예수님은 소중한 발을 그 전날 밤에 씻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하나는 깊은 밤에 겟세마네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밤새워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가장 절박한 시간에 주님은 다른 거 다 놔두고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운데 인상적인 핵심이 복음서에서 절정을 이루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겟세마네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는데 그 기도가 심각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땀방울을 흘렸는데 피방울과 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피 방울과 같이 땀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세상에 와서 기도하는데 땀방울이 흘렸는데 피방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십자가위에서 죽어가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끝까지 섬김의 삶을 사시고 공생애 3년을 마치게 됩니다. 가장 위기의 시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은 사랑하는 일이였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말하고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발을 소중히 여겨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침내 승리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 기도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모든 기도의 결론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지만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의 멘토입니다. 우리들의 기준이 되시고, 나의 주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사순절은 그런 주님을 묵상하며 내 마음속에 새기는 기간이 사순절기간입니다. 여러분 가슴속에 뜨겁게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지는 축복의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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