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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닭이 울고 있습니다 (막 14:6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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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울고 있습니다 (막 14:66-72)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삶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평안이 여기에 있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기에 운행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비록 실개천 같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인생 역전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시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십시오.  오늘 우리가 사모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삶의 중심 축을 옮겨놓는 그런 경험을 사모하십시오.  내 삶의 중심 축의 방향을 바꾸어놓는 그런 체험들을 사모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내 마음을 휘감고 있는 미스터리가 벗겨지면서 "내가 이제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이제는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이런 강하고 뚜렷하게 들려오는 영혼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한들 얼마나 누리겠습니까?  내 남은 생애를 이렇게 덧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보겠노라는 자기 결심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생포 당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에, 하나님의 능력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에,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에 정복당해 보십시오.

"주여, 미천한 몸 주의 것이오니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럴 때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그럴 때 영혼 깊은 곳에서 기쁨이 밀려옵니다.  그럴 때 내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사람들이 돈 돈, 하지만 사람이 정말 돈으로만 삽니까?  세상에는 돈보다 귀한 것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돈, 평화가 없는 땅 덩어리, 평화가 없는 가정, 평화가 없는 큰 집, 평안히 없는 새 집,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파멸시키는 재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재물로 말미암아 어리석어 지지 마십시오.  재물 앞에 눈이 가리워지면 안됩니다.

지금 이 땅에는 현대판 탕자의 비극들이 휩쓸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불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있어서 불안하고, 없는 사람은 없어서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있다면 돈으로 말미암아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한 돈으로 말미암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간증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쓰는 모든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이 됩니다.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먹을 것과 쓸 것을 공급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정말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남에게 사기 치고, 남을 속이고, 남을 망가지게 해서 부정하게 재산을 모은 못된 부모도 자기 자식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하물며 자비하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공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저 단순히 믿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경험으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재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든 재물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고 평화를 얻으십시오.  내 재물의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날마다 인정하고 고백해야 됩니다.  삶의 우선 순위를 재물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라.  이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을 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고 재물을 붙들고 가는 사람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 믿음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살고 있는 한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도하며 매달리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나의 간증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찬송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연약한 우리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더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사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붙잡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영감에 감동되십시오.  내 영혼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감에 감동되는 사람은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은 결코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가슴에는 사랑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늘로부터 주시는 평화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한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한 이제부터 내 발이 가는 곳에, 내 손이 닿는 곳에, 내 몸이 가는 곳에 평화의 물결이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믿음으로 살아서 여러분의 집안에 평화의 물결을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내 자녀들 속에 평화의 물결을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내 몸 속에 평화의 물결을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닭이 울고 있었습니다.  벌써 두 번째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두 번째의 닭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없이 가슴을 치고, 또 치면서 통곡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선생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못나고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일을 생각하고 심히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 베드로라는 사람,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당연히 그렇게 통곡하고 회개하였어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래도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자신의 입으로 호언장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그래도 명색이 수제자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그렇게도 사랑해 주시던 선생님을 배반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만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장 견디기 힘들고 아픈 고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때에 가장 마음이 아프고 견디기가 어렵습니까?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했습니다.  내가 은혜를 베풀었던 그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아픔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만은 나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될 그 사람, 그런 사람이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배신한다고 하면, 사실 그것만큼 쓰리고 아픈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인생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알듯이 이번 주간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이 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폈습니다.  종려나무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에서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주여, 여기서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은 그렇게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여느 왕들의 입성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납니다.  모든 왕들은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입성합니다.  또 군마를 타고 수많은 호위병들과 칼을 찬 병사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길가에 나온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는 함성을 들으시며 입성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입성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입성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의 입성과는 달리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너무나도 초라한 입성이었습니다.  장수들은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고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입성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어린양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성은 더 큰 고난을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시지 않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면 그분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33년이라는 예수님의 삶 전체가 다 고난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번 주간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죽으신 기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주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서 내 신앙이 한 단계 더 성숙되어지는 그런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하신 여러 고난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고 아픈 고난이었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어떤 고난이 예수님을 가장 힘들게 하셨을까요?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인 고난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 예수님이 혼자 지시기에는 힘겨운 그런 큰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옆에서 보다 못한 로마병정이 구경꾼 가운데 서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는 육체적인 고통도 참으로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에 묶어 놓고 양손에 다가 큰 대못을 때려 박았습니다.  그리고 양발에도 그렇게 큰 못을 쳤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겠습니까?

로마병정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성경은 온 몸에 있는 피와 물까지도 다 쏟아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또한 얼마나 크고 아픈 것이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로마 병정들이 가시로 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머리에서 핏방울이 송송 맺혀 흘렀습니다.

누가 뭐래도 육체적인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셨던 육체적인 고난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커다란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만 있으시면,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존심을 짓밟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을 받으셨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마가복음 14장 65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모욕을 당하신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지존하신 하나님의 아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모욕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신 기록이 또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6절에 보면 군인들이 또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욕을 당하시면서 아마도 기가 막히셨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성경에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9절에 보면 지나가는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모욕하면서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지나가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모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모욕과 희롱을 당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는가를 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제가 만약에 그와 같은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면 도저히 참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그놈들을 혼구멍 내주던지, 코를 납작하게 해주던지 그렇게 하고야 말았을 것 같습니다.  인류 구원이고 뭐고 그건 그 다음의 일이고, 당장 내 자존심을 저렇게 무참하게 짓밟는 그런 무례한 사람들을 그냥 놔두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그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 수모와 그 창피를 고스란히 다 당하셨습니다.  견디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참고 이기려고 하니 예수님이 당한 고통이 또한 어떠했겠습니까?  참으로 가슴이 찢겨나가는 듯한 그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참기 어려운 고통과 아픔이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런 것들보다도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당하는 배신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 누구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은 사실 세상의 그 어떤 아픔보다도 진한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잠깐입니다.  잠깐만 참으면 됩니다.  지나갑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오명도 견딜 수 없는 아픔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저 마음을 독하게 먹고 꿀꺽 참으면 지나가고 맙니다.  그 순간을 잘 넘기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배신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큰 고통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아픔으로 우리 가슴에 멍들어 가는 것이 배신입니다.  내가 누구에게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것은 내 존재의 뿌리까지 흔들고 맙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한 두 사람에게서만 배신을 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쓰라린 배신을 당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당시의 백성들에게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3절을 보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절에 보면 그들은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라바를 내놓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가난한 백성들이었습니다.  민중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늘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먹을 것도 주셨습니다.  마치 목자를 잃은 양들이 방황하는 것과 같은 이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미워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늘 자기들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예수를 죽이라.  예수를 죽이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소리를 지를 수가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제자들입니다.  그 중에 가룟 유다라는 사람은 아주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 가룟 유다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금전을 출납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열두 제자들 가운데 가장 신임을 받았던 제자가 가룟 유다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이 가룟 유다가 돈에 눈이 멀어서 스승인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미 각오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배신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게 대단한 아픔으로 생각하시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가룟 유다 말고 정말로 믿고, 사랑하고, 아꼈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했던 이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배신은 예수님에게 굉장한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배신은 예수님의 가슴에 큰 못을 쾅쾅 박는 것과도 같은 그런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가슴을 찢는 것과도 같은 그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보다 더 쓰리고 아팠던 것이 베드로의 배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에게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를 얼마나 믿고 의지했을까?  그런데 그 베드로가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드로는 그렇게 하면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베드로 본인 자신도 그렇게 장담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지금 등을 돌린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에게 붙잡히고 심문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을 때, 베드로 한 사람만이라도 당당하게 예수님 편이 되고, 예수님 곁에서 버티어 주었다면 아마 예수님께서는 훨씬 힘이 되셨을 것입니다.  든든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배신은 예수님에게는 땅이 꺼지는 듯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내용을 보십시다.  본문 69절∼71절까지 함께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보십시오.  사랑하는 스승을 부인했습니다.  배신했습니다.  그때 닭이 두 번째 울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닭 울음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자기의 비겁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가슴을 치며 심히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 장면은 베드로가 거듭나는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닭이 울어서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모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십니까?
혹시 나도 베드로처럼 때때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나도 내 처지에 따라 예수님을 부인한 적은 없었었습니까?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배신한 적은 없었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만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 그만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인가요?

생각해보면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베드로만 그런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가 그런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며 사는 것일까요?  얼마만큼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일까요?  혹여 하나님을 배신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습니까?  예수님에게 등을 돌렸던 적은 없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 옛날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닭이 울었을 때 그는 돌아섰습니다.  그 옛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을 때 울었던 그 닭이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닭 울음소리를 듣는 우리들이 이제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서 가슴을 치고 심히 울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 가슴을 치며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부끄러움을 회개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닭 우는 소리는 계속 들려오는데, 성전 뜰에서 고난받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이렇게 너무도 뻔뻔하게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닭 우는 소리에 가슴을 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는 오늘의 베드로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 모두가 베드로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닭 우는 소리는 들려오는데, 벌써 두 번째 닭이 울고 있는데,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도 그만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닭이 울고 있습니다.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연민의 눈으로 이 시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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