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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모방할 수 없는 고난 (빌 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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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할 수 없는 고난 (빌 2:5-14)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저 바다에 던지우라고 말씀 한 마디만 하셔도 이루어지는 분이십니다.

더구나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도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이 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셔야 하셨을 가요?

예수님의 고난은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난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1. 성육신 고난 

우선 성육신의 고난은 이 세상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5-14)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고난은 최고의 고난입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시는 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의 고난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상깊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광야입니다. 온 대지에 눈이 쌓였습니다. 새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날라가도 날라가도 끝없는 광야였습니다. 새들은 먹이를 찾다가 결국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던 동물 애호가가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새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였습니다.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 새들을 따라갔습니다. 모두 잡아서 차에 실고 가서 먹이가 있는 곳에 내려놓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들은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는 줄 알고 도망치다가 눈속에 쓰러집니다. 또 쫓아가면 또 도망갑니다. 그 사람은 새들에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도망가지마!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너희들을 잡아 먹이려는 것이 아니야. 먹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놓으려고 하는 거야.>

아무리 외쳐도 새들은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쳐서 눈위에 서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저 새들을 살리는 길이 하나 있다. 오직 하나의 길이다. 내가 새가 되어 새들에게 새의 언어로 새에게 말하면 새는 새의 언어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살 길을 알려 주시려고 여러 가지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언어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 하나가 있다. 내가 사람이 되어 사람의 언어로 사람에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예수님 고난의 시작입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2. 삶의 고난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 고난의 삶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 땅을 떠나실 때까지 온통 고난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 1;28)

마리아는 놀랐습니다.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천사가 다시 말했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눅 1;30)

그 다음부터 대화를 보십시다.

천사;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 :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원어를 찾아 보았습니다. 계집종은 <룰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애바구니라는 말도 들어 있습니다.

<나는 애바구니오니 내게 애기를 담았다가 꺼내 가시옵소서!>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를 빌려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탄하셨습니다. 길거리에서 나셨습니다. 길거리에서 사셨습니다. 길거리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내 요셉의 무덤을 빌려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으로 사셨습니다.

3. 멸시 천대의 고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사시는 것 자체도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멸시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이라>(요 14;12)

수많은 이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서기관,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들의 지도층 사람들은 예수를 멸시천대하였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따라다녔습니다.

한 시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습니다.

얼마 전에 성막 쎄미나를 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대사님을 모시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 오자 말자 초청된 것입니다.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환영하면서 내가 물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첫 날 밤을 지내시고 느끼신 것은 무엇입니까?>

대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저 나라 이스라엘 대사로 다니다가 한국에 왔습니다. 첫 날 밤 내 생애 처음으로 푹 잤습니다. 안심하고 잤습니다.>

아랍권에 가는 나라마다 생명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해칠 사람이 없어서 처음으로 푹 자고 일어 났습니다. 한국은 참 좋은 나라이고 안심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이지 모르게 멸시천대를 받으시면서 사셨습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며 사셨습니다.

노 무현 대통령이 자살하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최고 높은 곳에서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던 자리에서 물러 앉았습니다. 그 때 대통령으로 앉아 있을 때는 감히 말도 못 붙이던 말단 검사들이 그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다루었습니다. 자존심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멸시받는 다고 못 이기고 자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통령이 아닙니다. 왕이 아닙니다. 왕중에 왕이 아닙니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우주 통치자이십니다.
그 분이 멸시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 고난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4. 십자가 고난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 고난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십자가의 처형은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BC 356-323)은 이것을 애급과 카르타고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십자가 처형방법을 가지고 갔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죄수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면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아주 잔인한 방법입니다. 가장 비인간적이고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처형방법입니다. 로마인들은 죄수를 이렇게 처형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황제때에 십자가 처형을 없애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노예, 외국인, 반란 음모자 그리고 극악무도한 죄수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전체 무게는 대략 135 키로그램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횡목만 죄수로 하여금 나르게 하였습니다. 횡목만 하여도 34-57 kg 정도였습니다.

십자가 처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 틀을 만들어 땅에 뉘어 놓습니다. 그리고 죄수를 십자가위에 눕힙니다. 양 팔을 십자가 횡목에 뻗게 한 다음 양 손에 못을 박습니다. 철못의 길이는 대략 13-18 cm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손에 못을 박는 것이 아니라 팔목에 박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세웁니다.

숨을 쉴 때마다 극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벌레들이 땅에서 피냄새를 맡고 기어 올라와 눈이나 귀, 코등 구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새들이 몰려와 살점을 뜯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처형하는 이들은 보통 칼이나 창으로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주로 1.5-1.8m 되는 창으로 가슴 심장을 찌르게 되어 있습니다. 출혈은 과다하여지고 혈압은 급격히 떨어져 쇼크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수의 가족들은 처형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빨리 죽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보통 밑에 있는 다리를 잘랐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옆에서 같이 십자가에 못박혔던 두 강도는 오랫동안 십자가에서 죽지 않자 다리를 잘라서 억지로 죽였습니다.

가장 극심한 고난이 장시간 괴롭힙니다. 생각만 하여도 처절한 죽음입니다.

1990년 미국 미시간주의 키볼키안(Jack Kevorkian)은 병리학 의사입니다. 그는 당당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선택할 권리(right to die)가 있다.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의사가 자살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병자 자살기구를 발명하였습니다. 이런 의사들의 자살조력은 미국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곧 죽을 환자인데 통증으로 너무 고통스러워 할 때에는 편안하게 자살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워싱톤주에서 시작된 이 법은 미국 여러 주로 확산되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일부러 죽이는 경우도 당시에는 허다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을 안고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짊어진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가요?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어떤 목사님이 다방에 손님을 만나려고 가서 앉아 기다리는 데 다방 여자가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목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교회 다니시나요?>
<아니요.>
<그런데 왜 십자가를 목에 걸었나요?>
<예뻐서요>
<십자가는 목에 거는 것이 아니라 등에 지는 것이예요.>
<가끔 십자가가 등쪽으로 갈 때도 있어요.>
가끔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성도의 생활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쫓아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값으로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바로 내 죄,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본질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시골 농부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부인은 늘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에 같이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그 닭장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는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글쎄 이게 웬일인가? 그 암탉이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저 머리에 난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탉이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도 이 닭은 족제비가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느라고 십자가 고통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는 데 대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대신 찔리셨습니다. 허물이 무엇입니까?
모르고 지은 죄를 허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고 지은 죄까지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찔리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허물은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고 지은 허물까지 다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죄를 지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예수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큰 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죄가 허물입니다.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좀 끔찍한 예를 들겠습니다.

잔인한 것같아 미안한 마음으로 말씀드려 봅니다. 어떤 사람이 도끼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도끼로 나무를 패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서 날라갔습니다. 지나가던 사람 머리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라 허물입니다.

같이 도끼로 사람을 죽였어도 일부러 죽인 것은 죄이고, 실수로 죽인 것은 허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도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기도할 때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지난 주간도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시고......>
알게 지은 죄는 죄이고, 모르게 지은 죄는 허물입니다. 하나님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병을 짊어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만 짊어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병을 짊어 지셨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7)

예수님은 우리의 병도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에 우리 대신 맞으셨습니다.
덴마크의 윌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안과 의사였습니다. 눈 병을 고치는 데에는 그를 따라 올 사람이 세계적으로 없을 정도로 안과계의 최고 전문의사였습니다. 윌리 의사는 캐서린 부드(구세군 창시자인 W.부드의 아내. 사회사업가. 전도자)의 전기를 읽고 감격하여 복음전도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도 포기하고, 명예도 버렸습니다. 선교사로 십자가를 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뒤늦게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습니다. 졸업 후 선교부로 가서 선교사로 파송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요?>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든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마침내 그의 소원대로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으로 파송되었습니다. 그 곳은 눈병환자가 매우 많은 곳이었습니다. 인구의 5분의 1이 눈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큰 안과 병원을 설립하고 전도를 목적으로 토인들의 눈병을 치료하여 주면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30년 간을 봉사하고 노령으로 은퇴하였습니다. 네델란드의 여왕은 그에게 그 나라 최고 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처럼 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간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윌리도 대신 병을 짊어 지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닮은 삶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채찍 때문에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음을 믿고 나가면 수많은 고침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 성육신 고난
2. 삶의 고난
3. 멸시 천대의 고난
4. 십자가 고난
에수님의 고난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당하신 고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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