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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참 소망이신 하나님 (사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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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참 소망이신 하나님 (사 50:4-9)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시인 박노해 씨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에세이집에 실린 “다시”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읽으면서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재자들 때문에 오랜 옥살이를 한 그가 출옥한 후에도 여전히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희망이 된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과거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습니다. 실제로 많은 친구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올 수 없어서 점심 식사 시간에 수돗물로 배를 채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잘 먹어서 문제가 아닙니까? 그리고는 살과의 전쟁을 치르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는지 모릅니다. 먹는 것만 풍성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풍성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좀 편안해졌습니까?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니까 이제 좀 행복해졌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별로 행복한 것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 국민의 8%인 약 320만 명이 우울증에 계속해서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또 가끔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국민도 50%가 넘는다고 합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우울한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살에 관한 통계를 보면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루에 35 명이 자살하는데 이 숫자는 인구 10만 명당 24.3 명으로 OECD 국가 중 단연 1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자살은 카이스트 학생들이나 교수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모두들 멀쩡한 것 같지만 그 속은 상처투성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결코 아니 되겠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 노래 가운데 ‘나’라고 불리는 노래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엄청난 수치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그가 왜 그토록 심한 수치와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그토록 심한 고난과 수치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왜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곤고한 자들을 도와주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곤고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그도 또한 고난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난의 현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곤고한 자들이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갈 수 없어서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는 포로들이 바로 곤고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종으로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게 하셨습니다. 그는 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뜻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겪은 고난은 놀랍게도 희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난 받는 종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 가운데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를 그 종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이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진짜 주인공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기꺼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삶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고 오는 역사 속의 모든 곤고한 자들을 위해서 친히 고난 받는 종이 되셨습니다. 다만 고난 받는 종이 되셨을 뿐 아니라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곤고한 자들을 섬기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고 오는 역사 속의 모든 곤고한 자들이 새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도 산 소망을 간직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온전히 복종하게 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편에 서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담대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8장 33절, 34절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난 받는 종을 괴롭히는 그 어떤 원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실 것입니다. 모든 희망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픔과 슬픔 같은 것은 삶의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땅에서 사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 과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와 온갖 어려움이 있는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주님도 역시 십자가의 쓴 잔을 피하고 싶으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은 초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었고 그 교회를 오늘까지 자라게 한 희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인 박노해 씨는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에게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하나님에게서 희망을 찾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바라볼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곤고한 자들의 상황을 소망의 미래로 바꿔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곤고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통해서 참 소망의 메시지를 널리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항상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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