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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로 가까이 (요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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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가까이 (요 19:23-30)


얼마 전에 세계적인 건축가인 홍콩사람 아론 탄이란 사람이 서울의 야경은 회색 도시라는 혹평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서울 야경은 온통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명한 건축 설계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도 있습니다. 워커힐 W호텔인데 이 호텔은 동양에 단 두 곳 밖인 6성급 호텔인데 이 사람이 설계를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일파만파가 되어 네티즌들이 벌떼처럼 교회를 비판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진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과 교회는 따분하고 답답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성도들에게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고전1:18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 죄 사하는 능력이요, 구원의 세계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손에 들고 흔들며 축하한 것에서 유래하여 종려주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사탄을 대적하는 상징이며, 번영과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에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성경봉독과 기도에 힘쓰는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 앞에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지금 본문에 보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 바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 이렇게 다섯 명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시면서 서서히 죽어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작은 목소리로도 서로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 다섯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그 신비스러운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었고,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쓴 잔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 잔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의 담즙은 아마 혓바닥에 대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6시간 이상 매달린 채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한 마디 비명도 없이 계시다가 마지막에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를 그는 남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두려워하는 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이렇게 당당한 선포를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예닐곱 시간 동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비명 한마디 안 지르셨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꽉 붙들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처럼 죽음에 죽음을 거듭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돌아 버리지 않고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장시간 동안 몸이 부스러져 내리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까무러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닙니까? 

필리핀에 있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자기 손에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발에는 박지 않고 양손에만 박았는데 그는 못을 다 박기도 전에 그만 까무러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정신이 흐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안으로 흡수하면서 홀로 그 모든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고통을 그렇게 감내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강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통 할 때 비명을 지를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은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칠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철 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 평생에 정말 잊을 수가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해마다 교회 청년들이 단기 선교를 갑니다만, 한번은 강영순 선교사님이 있는 몽골 울란바토르에 우리 청년들이 선교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강선교사님은 다리를 저는 소아마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몽골 청소년 탁구 대표팀을 지도하는 코치로 계셨습니다. 우리 일행이 일정을 마치고 떠나기 전날에 너무 아쉬웠든지 양한마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저와 우리 청년들이 그때 양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몽고인이 양을 잡기 위해 양을 끌고 오는 동안, 그 모습을 본 개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듯 요란하게 짖어대는데, 막상 끌려오는 양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양을 마당 한 가운데 거꾸로 눕힐 때에도 양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다른 가축의 경우처럼 정수리를 찍거나 혹은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거꾸로 눕힌 양의 배 가죽만을 칼로 조금 갈랐습니다. 그러자 속에 있던 밥통의 윗부분이 잘라진 틈으로 불거져 오르면서 피가 흐르지 못하도록 자동마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몽고인은 양의 배 가죽과 밥통 사이로 손을 넣어 양의 숨통을 눌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무지막지한 사람의 손이 그처럼 양의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통을 틀어쥐는데도 양이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숨이 너머 가는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치켜든 네 다리를 파르르 떨 뿐이었습니다. 
  
양이 죽자 손을 빼낸 몽고인은 양의 털가죽을 다 벗겨낸 다음 양의 배를 완전히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주걱으로 남김없이 다 퍼내었습니다. 그렇게 잡은 양고기와 내장, 피를 돌멩이와 함께 큰 통에 넣고 몇 시간을 삶은 뒤, 마침내 조리가 끝난 양고기를 시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우리 청년들은 처음에는 양고기를 어느 누구하나 입에다 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 둘씩 그 양고기를 먹기 시작을 했습니다만, 그날 그 시식은 양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53장 7절의 의미를 되씹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사 53:7)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동물들 가운데 왜 구약의 사람들이 유독 양을 속죄의 제물로 즐겨 사용하였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성경이 하필이면 주님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하여 잠잠히, 그리고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넣어 숨통을 눌러도 반항 한번 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므로 양이 인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시므로, 잠잠히 포기하시므로 인류의 구원자,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23절을 보시면 간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23절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달린 자의 운명입니다. 세상에 이 십자가의 형틀만큼 무서운 고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만큼 잔혹한 죽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의 시세로는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이 십자가의 죽음이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인간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엄청난 희생이며,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대제사장이나 빌라도, 그리고 군중들을 보십시오. 그 당시 대제사장이나 빌라도가 약간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최소한의 공정함을 고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그와 같이 혹독하고 소름끼치는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생명은 공정성과 합법성에 있습니다. 더욱이 한 사람의 생명을 끊어 놓는 사형을 선도하는 재판이라고 한다면 다른 어떤 재판보다 공정하고 합법적이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낸 예수님의 죄목은 ‘행악자’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악자란 말 그대로 악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두 번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고질적으로 악을 행하는 흉악범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만큼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세상은 그를 싫어 버렸지만, 그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은 오히려 세상 앞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원히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구약에 예언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명분을 다 완전하고 충분하게 주님이 갖추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의 길을 우리 주님이 닦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십자가 가까이 가서 조금이라도 함께 있어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신앙 선배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십자가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사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붙잡고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당당하게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해 살아갑니다. 
  
국제복음선교회가 있습니다. 그 WEC 본부의 지하실에 내려가면 수십 개가 넘는 가방들이 바닥과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아있는 가방들 - 바로 그 가방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한,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자기 헌신의 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들이 있었던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기에 합당한 참된 십자가의 증인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이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삶이란 하나의 가방으로 남게 됩니다. 지금껏 여러분들께서 꾸려온 가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희생과 헌신의 표적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과 이기심의 결정체입니까? 제가 이이티 공항에서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 그 당혹감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양복과 세면도구, 그리고 오랫동안 먹었던 혈압 약, 간 약, 그리고 제가 꼭 지녔던 필수품들이 다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칠 지내보니까 그 중요한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가 있더라구요? 오히려 가방 속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들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그것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지를 알면서도 선뜻 내려놓지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으신 그 십자가 사랑 앞에 나를 맡기지 못해서입니다. 롬8:31-32절에 보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우리 주님께서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의 빛으로 나를, 내 주위를, 이 세상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어느 사건치고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은총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과 제가 그 하나님은 그 놀라우신 은혜 앞에 살아간다면, 이 고난 주간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여기 모인 여인들처럼 세상의 환경에 매이지 않고, 자신들이 당할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가까이 십자가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우리는 오늘 저녁부터 온 교회가 모여 “고난의 종”이란 주제를 가지고 함께 골고다 언덕에 올라와 십자가 앞에 모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이 있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서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그 영광을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입에서 그리스도의 찬송을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시며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일어나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는 자만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함으로 우리의 영혼에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메아리가 가득 울려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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