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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눅 19: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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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눅 19:28-44)

   
오늘은 2011년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인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바로 전 주일로서 “고난주일”로 지킵니다. 

교회력에서는 오늘을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의 결정적 사건인 십자가와 부활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특히 이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에는 “호산나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쳤기 때문에 호산나 주일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몇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는데 왜 이 마지막 방문에만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일까요? 왜 이 날을 따로 구별하여 교회력에서 특별한 주일로 지키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몇 차례 예루살렘 방문과 이번 방문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정체를 숨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이 놀라운 계획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당신이 누구신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놀라운 계획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과거와 다른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시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이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 21장, 막 11장, 그리고 요 12장 4복음서에 모두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종합해서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 예루살렘 근처 마을인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요 11장을 보면 얼마 전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표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소문이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유대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단 제자들과 함께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피하셨습니다.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때가 됐음을 아시고, 유월절 직전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보내신 후 이 베다니 마을의 문둥이 시몬 집에서 저녁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 때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감사해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예수님과 죽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그러니까 우리 달력으로 주일 아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길을 나서셨습니다. 감람산 쪽으로 향하시다가 벳바게에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셔서 나귀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때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걸쳐놓았고, 또 자기의 겉옷을 길에 마치 카페트를 깔듯 펼쳐놓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셨습니다. 

이 때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사로 사건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던 터에 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치 왕처럼 환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고,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폈고,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면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줄까요?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왕의 입성

오늘 본문 38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무리들이 이렇게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라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한 마디로 저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의 입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천사가 이렇게 예언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구체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왕으로 다스리실 때 세 가지 왕적 직무를 수행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의 왕국(regnum naturae)에 대한 주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에 대한 주권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에서 친히 머리가 되셔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영원한 목적을 온전히 이루도록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에 대한 주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모두 달성되었을 때 건설될 새 하늘과 새 땅, 즉 종말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이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이런 예수님의 왕적 사역이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선포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받게 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내 마음 속에 모셔야 하고, 내 삶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지금 이 시간 다시금 나의 왕으로 고백하고, 진정 나의 왕으로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그분의 주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죽고는 다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다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산악인 박영석 대장은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산악 그랜드 슬램이란 히말라야 8000미터 급 정상 14개, 지구 7대륙의 최고봉들, 그리고 3극점을 모두 정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길을 열어줘야 올라갑니다.” 이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산에 오를 때 하늘이 길을 열어 주셔야만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저 산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정상에 가서도 올랐다가 바로 내려와야 합니다.” 산 정상은 올랐다고 해서 계속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곳을 잠시 올랐다고 해서 결코 그곳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생은 결코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시 성공했다고 잠시 무엇인가를 소유했다고 그것을 영원토록 누리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2. 겸손한 입성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눈에 띠는 것은 35-36절입니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제자들이 나귀 새끼 위에 겉옷을 펼쳐 놓고 또 겉옷을 길에 편 채 그 나귀 새끼를 타고 그 길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왕의 입성이라고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아이들 병정놀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대 로마에는 "포르타 트리움팔리스"(Porta Triumpalis)라는 승리의 문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출정하여 승리를 거두고 로마로 개선할 때 통과하는 문입니다. 

황제가 개선할 때 이 문에서부터 성대한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모든 로마 시민이 다 나와서 연도에 늘어서고 광장을 가득 메웁니다. 하늘이 흔들릴 정도의 팡파레가 울려 펴집니다. 향이 온 성을 진동합니다. 이 때 황제가 백마가 끄는 4두 마차를 타고 등장합니다. 대군이 그 뒤를 따릅니다. 성에 만세를 환호하는 함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것이 보통 왕의 입성에서 떠오르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뒤 따르는 군사도 없습니다.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세상나라의 왕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를 통치하는 방법과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는 높은 위치에서 군림하고, 힘으로 통제하며 다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낮아져서 섬기며, 사랑으로 보듬으며 다스립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법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귀 타고 입성하신 겸손한 왕을 묵상하면서 받게 될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도 주님을 따라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석공이 비석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석공은 무릎을 꿇고 땀을 흘리며 비석을 깎고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석에 정성스럽게 글을 새겼습니다. 

한 정치인이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석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돌같이 단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듬고 거기에 글을 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 석공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도 저처럼 무릎 꿇고 일한다면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겸손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귀새끼를 타려고 해야 합니다. 어서 백마에서 내려야 하겠습니다. 4두 마차에 대한 꿈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려고 해야 하겠습니다.

3. 죽으러 가는 입성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있습니다. 같은 사건에 임하면서 전혀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연도에 늘어서서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정작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예수님께서 마치 다윗과 같은 왕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저들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신비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던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능력으로 자기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대했습니다. 로마를 몰아내고, 부패한 정치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바로 저 십자가에 죽으실 생각 뿐이셨습니다. 흉악한 죄인이 되어 저 십자가에 높이 달려 참혹하게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생각 뿐이셨습니다. 그래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저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조만간에 다윗보다 뛰어난 왕으로 등극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만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죽으러 가는 입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러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받게 될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밀알의 메시지입니다. 

요 12:24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뒤에 한 알의 밀처럼 죽으실 생각을 늘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지난 목요일 “교회 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 박종순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본인의 목회 철학으로 유명한 서예가에게 청하여 받은 글을 소개하셨습니다. 그 글 내용이 이것입니다. “아생교회사 아사교회생”(我生敎會死 我死敎會生) “내가 살면 교회가 죽고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늘 목회하면서 교회를 살리기 위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가 목사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이 살려고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오늘의 가정의 문제가 부부가 살려고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가 해결 되려면 목사와 교회지도자들이 죽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가족들이 죽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죽고자 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되고자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그래야 교회가 살고, 그래야 나라가 삽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했어도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공한 것 같고 출세한 것 같아도 죽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했어도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 메시지를 가슴에 깊이 새기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왕으로 다시금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처럼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처럼 한 알의 밀이 되고자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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