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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강한 손이 유월절 재앙으로 나타나다 (출 11:1 - 출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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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강한 손이 유월절 재앙으로 나타나다 (출 11:1 - 출 12:42)
 

2011년도 교회표어를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정하였습니다. 이제 4월 중순이 다 되어 가는데 올해 첫 주부터 계속 이 표어를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려고 힘쓰시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매일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기회와 사람들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하는데, 부활하신 주님도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면 당연히 그 나라의 왕에 대하여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을 전하려면 왕의 권세를 말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현재 우리들도 대통령을 뽑으려면 그가 경제적인 권세를 가진 자인지, 민주투사인지 알고 투표하여 우리의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사도행전의 말씀도 실제로는 죽음을 이긴 권세를 가진 왕의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고 할 때 그 부활에 담겨진 의미는 죽음을 이긴 권세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경륜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교회에 임한 나라는 구약의 나라를 완성한 것으로 성경은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나라의 왕의 권세가 어떻게 다른가를 말하면 신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를 잘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연속 강론하고 있는 출애굽기는 여호와의 강한 손의 구원을 말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곧 권세인데 애굽을 쳐서 바로 왕을 항복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출애굽기는 여호와의 강한 손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냥 파워가 있다고 반복하며 강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의 나타남을 일정한 방식으로 나타냅니다. 어떤 방식인가요?

먼저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킨 일을 말하고, 그 다음으로 10재앙을 통하여 애굽을 심판하는 강한 손의 나타남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10재앙 중에 9가지 재앙의 나타남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10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인 유월절 재앙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유월절 재앙으로 말미암아 비로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재앙은 앞에 나왔던 9가지 재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10재앙을 9+1로 보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토대 하에서 모세가 유월절 재앙을 어떻게 독특하게 기록을 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주보의 설교개요란을 보시면 제가 간단하게 오늘 본문에 대하여 구조를 나누고 제목을 붙여 기록을 해놓았으니 여러분이 참조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보통 성경을 잘 읽는다고 하는 신자들도 성경을 뭉뚱거리듯이 읽습니다. 성경동화로 쓰여진 책들을 보면 말 그대로 동화처럼 성경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무슨 신기한 이야기의 집합체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이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관심이 없고 단순히 사건만 중심으로 전하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성경동화를 보면 성경의 바른 뜻을 알기 어렵게 된 책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10재앙도 단순히 재앙의 종류나 무시무시함 정도 나타내려 하지 정작 본문의 뜻은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건 천지창조의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날짜별로 어떤 창조가 일어났는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저자가 나타낸 문법적인 방식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더더욱 본문이 기록된 방식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그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11장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모세가 바로 왕에게 유월절 재앙으로 최후통첩을 하는 내용이 있고, 12:1-20절까지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제정하여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이 있으며, 이 명령을 따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유월절 예식을 행할 것을 전하니까 12:21-28절에 이스라엘이 그 명령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12:29-42절에 유월절 재앙이 내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430년 만에 출애굽을 이룹니다. 

이 유월절 재앙에 대하여 유월절 예식을 정하는 모습은 우리의 현대사 가운데도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노무현대통령이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김대중 대통령때와는 다르게 걸어서 휴전선을 넘어 북한을 다녀왔더랬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공해상을 통과하여 다녀온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휴전선이 그어져 있을 뿐 걸어서 건너가게 되면 이 나라는 한 영토로 연결된 것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분명히 아침부터 노무현대통령은 청와대로부터 전용차를 타고 판문점까지 왔고 그 휴전선 경계선에서 일부러 내렸습니다. 그냥 차를 타고 휙 지나가도 될 터인데 굳이 거기서 내려서 사진촬영을 하고 역사적 메시지를 남기고 영부인과 둘이서 천천히 도보로 휴전선을 넘어갔습니다. 

왜 이렇게 한 것입니까? 비단 이런 일 뿐만 아니라 무언가 역사적 첫 발걸음이 되는 일에는 어느 나라 누구이든 이런 기념할 만한 일을 남기게 됩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설노동자들이 이미 길을 다 만들어 놓았는데 그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은 반드시 대통령이 와서 개통 테이프를 끊는 식을 하고 난 다음입니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기 때문에 그런 식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알게 되면 왜 오늘 출애굽기 유월절 재앙을 유월절과 무교절 예식을 제정하고 그 다음에 재앙이 내리는 것으로 기록했는지 이해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함을 통해서 출애굽의 새 경륜이 시작되며 이스라엘 나라가 새로운 시작을 유월절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한 가지 더 본문에 대하여 알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출애굽기와 마가복음이 서로 병행한다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 본문의 유월절 내용과 마가복음의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이 내용에 있어서는 병행한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앞 부분까지는 어느 정도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과 같이 맞출 수가 있는데 여기 12장과 13장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는 여러 가지 내용을 혼합하여 섞여있는데, 마가복음은 각각의 주제들을 분명히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제자를 부르심을 통해서 서로 다른 주제들을 확실하게 분리시켜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출애굽기에는 강한 손과 먹는 생명, 새 시대, 군대와 같은 개념이 어우러져 있는 반면에 마가는 정확하게 분리해서 자기 의도를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출애굽기에 대한 재해석을 아주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출애굽기 12-13장을 마가복음이 재해석하고 있는 관점을 따라서 주제를 연관시키며 강론해 나갈 예정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출애굽기 11장부터 차례대로 보기로 하겠습니다. 1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한 가지 재앙을 더한다고 하는 표현을 따라서 제가 9+1이라는 수식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11:1-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한 가지 재앙을 더하여 애굽 땅에 내리면 이스라엘 자손을 쫓아낼 것인데 그 때 전리품을 받아서 나오게 될 것이며 애굽 사람의 눈에 모세가 아주 위대하게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을 듣고서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유월절 재앙으로 최후통첩을 하는데 이 재앙이 내리면 어떤 일이 생기며 결국 바로 왕과 신하들이 모세에게 와서 항복하며 절을 하고 모세를 따르는 온 백성이 나가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유월절 재앙은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가축의 처음 난 것도 죽임을 당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애굽 온 땅에는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도 7재앙부터 말해 왔던 애굽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재앙이라고 했던 연장선상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11:7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이것도 역시 4재앙부터 말해왔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애굽 땅에 내렸던 재앙이 하나도 내리지 않도록 구별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애굽 온 땅에는 큰 부르짖음이 있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개 한 마리의 혀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잘 짖어대는 개도 아무 말 없이 고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털 끝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재앙이 내리면 결국 바로 왕과 신하들이 모세에게 내려와 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항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왕이 모세를 따르는 백성을 나가라고 명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을 최후통첩으로 바로 왕에게 가서 모세가 말합니다. 그것도 바로에게서 나올 때 심히 노함으로 나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과히 최후통첩이라 할 만합니다. 첫 번째 쟁앙과 두 번째 재앙때 바로 왕 앞에 공손하였던 모세와 크게 대조가 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알려도 바로 왕은 듣지 않을 것임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십니다. 그런 후에 유월절 예식을 제정하도록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 내용은 바로 12장에 기록됩니다.

12장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유월절에 대하여 너무 쉽게 들어왔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곧장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시켜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은 집에는 재앙이 넘어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공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과연 12장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우선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신학교 강의를 하면서 신학생에게도 물었습니다. 문설주와 인방이 무어냐고? 여러분은 아십니까? 문설주와 인방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문설주는 문을 달아매는 기둥입니다. 우리 교회 강단 뒷 편에 무대처럼 장식한 곳을 보면 양쪽에 기둥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인방은 문설주를 연결하여 설주 위에 가로로 설치한 기둥입니다. 우리 교회 양쪽 기둥을 연결한 기둥은 가로로 누워 있습니다. 그러니까 좌우 문설주와 인방이라 하면 문을 둘러싼 모든 기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곳에 피를 바르고 이스라엘 백성은 문 안에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던 것입니다.

분명 출애굽기는 피를 발랐다고 말하지 피로 씻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 개인의 원죄와 자범죄와 미래의 죄를 피로 씻겼다고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유월절은 피를 바르고 문 안에서 무엇을 먹었으며 또 어떻게 먹었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2:2절을 보십시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유월절이 해의 첫 달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 나라로 말한다면 정월달을 말하는 셈이지요. 즉 새해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출애굽기 처음 강론하면서 창세기의 성취를 나타내면서 출애굽의 새 경륜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으로 완성되면 이제 새롭게 고등학교 새해가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새 시대를 말하고 나서 이스라엘 자손이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어린 양을 한 집에서 먹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양 한 마리에 맞추어 식구수를 조절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새 시대가 열리는 생명의 공동체는 어린 양 공동체입니다. 어린 양 한 마리에 맞춘 새 가족 공동체로 먹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양을 잡을 것이며 그 피를 어떻게 한 후에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습니다.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아야 합니다. 즉 흠 없는 일년 된 수컷으로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후에 그 날 밤에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아침까지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밤을 연상해서 그려 본다면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문 안에는 어린 양을 먹는 생명의 잔치가 열리고, 그 문 밖에는 처음 난 것들이 모두 죽는 죽음의 밤이 되는 것입니다. 피를 바른 문 하나 차이로 밖에는 죽음이요, 안에는 새 생명을 누립니다. 

이런 유월절 밤의 상황을 여기 우리가 예배하는 이 곳을 따라 생각해 봅시다. 강대상 뒤에 있는 무대의 양 기둥을 문설주라고 하고 그것을 연결하는 수평기둥을 인방이라 하면 제 뒷면은 문이 되는 셈입니다. 그럼 제 강대상 뒷면을 지난 곳을 밖이라 하고 우리들은 그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이 예배당 안에 모여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 한 가족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됩니다. 

그럼 피를 발랐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물론 이 피를 바른 것을 보고 재앙을 내리는 천사들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passover라고 합니다. pass는 지나간다는 뜻이고, over는 넘어간다는 뜻이지요. 이 피를 바른 집에 안에는 생명이 나타났고 밖에는 죽음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관계는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도 나타났습니다. 대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언약궤 위 속죄소에 피를 뿌렸습니다. 바로 이 곳에 피를 뿌림으로 대제사장은 여호와의 보좌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뵙는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와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지성소 밖에서 금식하고 있었으니 죽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도 실제로는 하늘 성소에 피를 바름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주님은 하늘 성소에 보좌 우편에까지 나아가셨습니다. 거기에 죽음을 이기신 영광의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하늘 문에 피를 바름으로 결국 죽음을 이긴 생명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과 저의 생명은 어디에 나타나겠습니까? 하늘 성소에 나아가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의 생명도 하늘 성소에 나타납니다. 이 생명의 나타남이 오늘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이 곳에 모인 우리들에게서 성찬상에 앉아 세상 죄를 지고가신 어린 양의 부활의 몸에 참여하여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근데 이 생명을 감정적으로만 누리려고 해요. 자기 마음에 오는 감동으로만 느끼려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떡을 떼어 먹고 있다는 것인데 그걸 인식하지 못합니다. 먹음이 곧 생명인데 그건 형식이나 기념 따위로 아주 낮게 처리하고 고상한 감상에 빠지는 것이 생명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누리는 생명도 한 가족이 한 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실 때 잘 나타납니다. 이게 눈에 보이고 본질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바쁜 일상 생활 속에서 가족이 바라는 것은 하루에 한 끼라도 한 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형식입니까? 단순히 기념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실체적인 생명을 누리고 있는 현장입니다. 

교회가 누리는 생명은 유월절 최후만찬에서 기인합니다. 주님이 떡을 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요, 주님이 잔을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그 생명을 우리가 주일에 이 성찬상에서 예배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 유월절 만찬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함께 먹고 마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배반할 무리들과 먹고 마시며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 주님과 먹고 마심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와 먹고 마심으로 완성이 된 이 생명의 교제를 지금 교회가 이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함께 한 가족으로 먹고 마심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생명의 나타남이요 그 생명을 맛보며 누리는 것인데도 우리는 그저 조그만 떡 한 조각 정도로 생각하고, 아주 조그만 포도주 한 잔 정도로만 생각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이 주일의 생명을 천하게 여깁니다. 자기 구원은 예수 영접할 때 한 순간에 다 이루어졌고 이제 주일의 성찬상에 앉는 것은 기념 정도에 그칩니다. 이렇게 먹고 마심을 홀대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얻었다 하는 생명은 바로 이 성찬상에서 부활의 생명을 먹고 마심으로 나타내고 누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한 생명의 교제가 있으며, 이보다 더한 구원의 축제가 있다면 거기 가서 누리십시오. 

출애굽의 구원 목표가 광야에 나가 절기를 지킴에 있었습니다. 출애굽을 바로 왕에게 요청할 때 모세가 한 말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목표는 예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배가 주일에 출석부에 도장찍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죽어서 천당만 가면 되니까요. 

유월절과 무교절은 붙어 있습니다. 무교절은 첫 날에 성회요 끝 날에도 성회입니다. 올림픽 개막식 날과 폐막식 날을 생각하면 이 날이 얼마나 큰 잔치가 열리는 날인지 아실 겁니다. 무교병을 먹는다 하는 말은 유교병을 먹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왜 새로운 떡입니까? 유교병은 바로 왕에게 속하여 먹었던 떡이요, 무교병은 여호와께 속하여 먹게 되었으니 새 생명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기 시작한 것이 무교절에는 7일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공휴일이 길면 그만큼 절기가 크다는 말이요 잔치도 크게 벌입니다. 그러니까 설날 명절은 다른 공휴일 보다 더 길지요. 

이렇게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유월절의 출애굽을 이루게 되면 그와 막바로 연결되어 무교절이 따라 나옵니다. 즉 강한 권세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면 그 백성에게 풍성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큰 생명의 축제가 열린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여호와의 강한 손에 대해서만 강론하고 다음 주에 이 생명에 관한 것을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출애굽기의 강한 손을 말하면서 태평양전쟁을 비유로 들어 여러분의 이해를 돕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미드웨이해전, 과달카날섬의 전투, 오끼나와 전투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마지막 재앙과 연결지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을 말하는 것이 그 권세를 말하는 마지막이 되겠습니다. 

일본은 끝까지 본토를 사수하려고 했으나 원자폭탄의 투하로 말미암아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에는 우라늄 235가 나가사키에는 플로토늄239가 투하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이 원자폭탄으로 인한 피해를 생각해 보면 그 위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의 피해와 방사능의 영향을 말하는 수치들을 비교해 보면 더 실감나게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히로시마에는 34만 3천면의 거주민을 그 당시 갖고 있었는데 그 중 7만명이 죽고 부상자가 13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가옥도 6만 2천호가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는 사망자가 2만명, 부상자가 5만명이었습니다. 가옥은 2만 호가 파괴되었습니다. 

이 원자폭탄의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통하여 미국은 그 권세를 드러내었고 일본 천황은 결국 항복문서에 사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일본은 자기들이 지배했던 모든 식민지들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은 여호와의 강한 손이 애굽을 강타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재앙이었습니다. 그 피해는 어떠했습니까? 12:29절입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여기 말하는 표현방식을 보십시오. 애굽의 바로 왕의 장자와 감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라고 말합니다. 가장 귀한 신분으로부터 가장 천한 신분에까지 남김없이 치셨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가축에 이르기까지 처음 난 것은 다 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애굽의 모든 집에서 큰 부르짖음이 일어났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애굽 전역에서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2:33절에 애굽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모두 사망의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바로 왕은 급히 밤에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자손을 나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미처 발교되지 못한 반죽을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급히 나왔습니다. 물로 나올 때는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했습니다. 전리품을 취한 것입니다. 

이런 유월절 재앙의 여호와의 강한 손의 나타남과 같은 방식으로 마가복음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건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나가게 한 사건에서 하나님 아들의 큰 권세를 나타내셨고 알게 하셨습니다. 

이 권세는 처음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시작되었고, 계속되는 권세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였으며 갈릴리 지방의 모든 병자와 귀신을 쫓아냄으로 나타났으며 문둥병자를 낫게 함을 통해 보이셨습니다. 이런 모든 권세의 나타남의 절정이 바로 중풍병자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사건은 앞의 질병을 고치신 일과 비교적 매우 다르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온 갈릴리에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고 했을 때는 도매급으로 사람들을 많이 고치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는 하나님 아들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것 속에 나타납니다. 막 2:7절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런 말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권세는 하나님 한 분 만이 가질 수 있는 권세임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보내어 애굽을 심판하신 여호와의 강한 손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 막 2:12절을 보십시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이처럼 본문은 전무후무한 권세의 나타남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권세의 나타남입니다.

그리고 이 중풍병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낫게 하셨지만 이 일은 집 안에서 죄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어 집 밖으로 걸어나간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애굽에서 나온 일과 비교가 된다는 말입니다.

권세를 대조시키는 것을 마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 내리신 여호와의 강한 손과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를 서로 대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2:9절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더 큰 권세입니까? 죄 사함의 권세입니까? 일어나 걸어나가도록 한 권세입니까? 

이 말은 홍해를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의 질병이 너희에게 미치지 못하리라. 왜요? 홍해를 건너왔으니까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병은 고침을 받아도, 또 미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해도 결국 죽음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사망의 권세로부터 죄 사함의 권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처럼 유월절에 나온 것과 같이 죽음의 왕국으로부터 우리가 나온다면 어느 것이 더 큰 권세입니까? 죽음이 더 이상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한다면 어느 분의 권세가 더 큰 것입니까? 여호와입니까? 아들입니까? 

이렇게 비교함을 통해서 옛 백성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강한 손의 구원과 새 백성 교회에게 나타내신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로 말미암은 구원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주님의 부활의 몸에 연합하여 떡과 잔에 참여하여 먹고 마심은 어떤 권세로 함께 하시는 것인가를 나타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병을 고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제가 우러러 보았던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흥회나 집회에서 질병이 나았다고 간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불치병에 걸려 한 번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비해 제가 신앙적으로 열등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데 저는 뭐가 부족한지 그런 체험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가졌던 생각이었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진 분들이 거의 다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도중에 강도짓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저렇게 확실하고 기쁘게 믿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왜요? 병 고치는 것이 제일 신기했으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중풍병을 고침을 받아도 그는 결국 죽습니다. 어떤 불치병이라 해도 결국 죽음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럼 실질적인 가장 큰 권세는 무엇입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신 권능!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어떤 병을 나음보다 내 생명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죄를 사하신 권세가 우리에게 나타나 있음이 더 큰 권세 아래 있는 것입니다. 병을 나았다고 자랑하는 그들보다 내가 더 큰 권세를 자랑할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교회에게 함께 하시는 권세는 이제 죽음을 이기신 아들 안에서 교회에게 주시는 죄 사함의 권세입니다. 전무후무한 권세이며, 하나님 만이 가지신 권세입니다. 이 권세로 말미암아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지셨습니다. 이 일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셨습니다. 이 승리로 말미암아 사단은 자기 권세의 자리를 잃고 쫓겨났습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결박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악의 권세가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만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의 권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는 새 하늘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에 임하신 새 시대의 새 생명의 능력과 권세를 여러분이 오늘 이 떡상에 참여하여 여러분의 손으로 떼고 마실 때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을 구체적이고도 실체적으로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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