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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께서 찔리시고 상하신 이유 (사 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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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찔리시고 상하신 이유 (사 53:1-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기독교회는 오늘부터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신 사건을 기억하며,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고난주간의 의미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십자가는 미국 시카고 교회에 세운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 해 전 시카고 교회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차들도 멈췄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관심거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 높은 십자가 위에서 십자가를 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는 아무도 십자가를 관심 있게 쳐다보지 않았는데, 그 높은 십자가에 사람이 올라가니 쳐다보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하여 무관심함을 말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주님이 못 박힌 십자가를 다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공로를 믿고 의지할 때,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십자가의 신앙이 여러분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은 이유는 2절이 밝히고 있는 대로 외적 조건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연한 순과 같으셨습니다. 바람에 꺾이고 발에 짓밟히면 으깨지는 연한 순과도 같이 나약하고 애처로운 존재이셨습니다. 탄생하실 때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연한 순 같은 예수님은 마른 땅을 뚫고 솟아 오른 싹이었고 줄기와도 같았습니다. 바위는 땅을 뚫고 자라지 못하지만, 연한 순은 땅을 뚫고 자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자신이 저지른 어떤 죄 때문에 받는 보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욥이 시험을 받을 때, 그의 세 친구들이 욥의 고난의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공격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즉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현세적 인과응보의 사상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것은 예수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모욕하였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고통을 당하실 때 조롱을 하였던 것입니다. 가장 숭고한 사랑의 죽음이 가장 비열한 죽음으로 오해되었습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 정부에 항거하다가 체포당하여 사형을 당한 정치범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구원의 중요한 관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질고와 슬픔과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잘못과 죄 때문에 매를 맞고 멸시를 당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본문 4-6절에 보면 ‘우리’라는 말이 무려 아홉 차례나 나옵니다. 

이것은 주님이 겪으신 고난에 대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을 잘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 시간 “우리 때문입니다”와 “나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왜곡하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당하신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주님 자신의 죄나 과오로 돌려 버리는 것은 구원받지 못할 중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올바른 것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우리의 생도 바르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 이유와,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매우 명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실을 네 가지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구약 학자 우릭(Urwick)은 이 구절에 대하여 “히브리 시에서 본 절만큼 그리스도의 고난의 심각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표현해 준 구절은 없을 것이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본 절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이유는, 한 마디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허물’이란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죄악의 근원을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가 찔림은’이란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가시에 찔리신 것과, 양손과 양발이 못이 박혀 찔리신 일, 그리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신 것을 가리킵니다. 유대지방의 납골당에서 발견된 바에 의하면, 당시에 박았던 못이 아직 남아 있는데 길이가 약 20cm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손톱에 조그만 가시 하나만 박혀도 고통스러운데, 20cm나 되는 대못에 손과 발이 못 박히신 주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 광경을 보고 주님을 낳았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여인들의 아픈 가슴, 아니 하늘나라에서 그 광경을 보고 계시던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은 얼마나 더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께서 그토록 잔인하게 죽으시는 광경을 보고서도 끝내 외면해 버리셨습니다.

2)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함은 보통의 상함이 아니라, 뼈가 부서지는 것과 같은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은 극도에 달하여, 사람의 몸에 있는 206개의 뼈 중 아프지 않는 뼈가 하나도 없어서, 그 모든 뼈를 다 셀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3)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으로 가장 먼저 우리에게 임할 축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징계를 받으심으로, 원수 되었던 관계가 평화의 관계로 변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4)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으로 누리게 될 두 번째 축복은, 죽음의 병에서 놓임을 받아 영적 강건함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신경 정신과 의사 한 사람이 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신경 정신과 치료라는 것은 약물 치료나 수술 치료가 아닌 정신 치료이기 때문에, 환자들과 상담을 하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사는 천성 자체가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편인 데다가,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정신과 의사로서는 적임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의사를 만나서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대부분이 치료되어 건강을 되찾았고,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사 자신이었습니다. 의사 생활 30년째가 되던 해, 그 자신이 정신 신경병 환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발병 원인은 30년 동안 수를 셀 수 없는 환자들로부터 보고 들었던 사건과 이야기들이, 그 의사의 정신세계에 잠식했고 마치 먼지가 쌓이듯 스트레스로 쌓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3년 후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내 속에 쌓였던 모든 정신적 노폐물과 삶의 찌꺼기들을 예수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내가 걸머지고 있던 짐이 가벼워지면서 나는 건강한 정상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질고나 고통을 대신 지거나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찾았고 죽음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6절에서도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을 잘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에 보면 인간의 죄악 된 속성을,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 배회하기를 좋아하는 양의 속성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철없는 양처럼 그릇 행하였고, 제멋대로 살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멋대로 죄짓고, 멋대로 놀고 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란 말씀 역시, 죄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즉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기 보다는, 자기가 가고 싶은 본능대로 가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며 타락한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이렇듯 하나님께 반역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 죄에 따라 그대로 보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담당시키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대속의 절정입니다. 4절에서는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시고 슬픔을 당하셨다고 했고, 5절에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다고 했으며, 6절에서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악의 대가도 대신 담당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모든 나쁜 것들을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아파트 불이 나서 아래층에서부터 불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중 4층에 아버지와 세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세 아들은 아래층에서 불이 타 올라오자,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출입구가 막혀 있고 불이 워낙 세게 타올라서, 도저히 탈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층에서 타올라 오는 불길과 연기로, 세 아들은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들을 데리고 옆에 있는 건물을 향한 창문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창문에서 옆집 창까지는 불과 1m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향하여 옆집으로 건너뛰라고 재촉했으나, 아이들은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그 높이에 질려서 떨고만 서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아버지는, 자기편의 창문에 발을 걸고 건너편 건물의 창문을 향하여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창틀을 붙잡고 몸으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얘들아! 어서 내 몸을 타고 건너라 어서!” 아버지의 외침을 들은 아들들은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몸을 밟고 무사히 옆집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세 아들을 살리고 자신은 기진맥진하여, 그만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밟고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죄 씻음을 받았으며, 주님의 찢기고 상하신 몸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고, 주님의 거룩하신 희생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이렇게 고백해야 옳습니다. “주님이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주님이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앙입니다. 오늘 주님이 허락하신 성찬 상 앞에서 우리가 드릴 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나 때문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오 주님! 고통도, 수치도, 멸시도, 조롱도, 십자가도, 죽음도, 모두 다 나 때문에 겪으셨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두 청년이 도박을 하다가 붙들려 옥에 갇혔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 집 아들이므로, 금방 보석금을 물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한 청년은 집이 가난하여 감옥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구해 내려고 매일 온종일 험한 공사장에서 노동을 했습니다. 어느 날 돌덩이가 떨어져 손등을 크게 다쳐 상처가 났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면회를 갔을 때, 아들이 어머니의 상처 난 손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그 손 왜 다치셨어요?” “너를 구하려고 밤낮없이 노동하다가 그만 돌이 떨어져 다쳤다.” 결국 그 어머니는 보석금을 벌어 아들을 석방시켰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부자 집 청년이 다시 함께 도박을 하자고 그를 꾀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 청년은 이렇게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나는 결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네. 자네는 돈이 많아서 금방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나의 어머니는 노동하며 피까지 흘려 나를 구해 주셨네. 그러니 나는 다시는 그런 도박을 할 수가 없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죄에서 떠나 의롭게 살고, 주님 영광위해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며,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찔리고 상하신 주님을 이전보다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살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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