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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는 이 세상에서 외롭다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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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이 세상에서 외롭다 (막 14:3-9)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 종려주일

종려주일 아침 주님을 우러르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오늘, 우리는 느릿느릿 걷는 나귀 위에 앉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행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올리브 산 중턱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에서부터 시작된 그 행렬이 예루살렘 성에 다가서자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폈고,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나무가 종려나무(대추야자)였다고 말합니다(12:13).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복음 기사를 기초로 해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다른 복음서와 달리 그 생나무 가지를 종려나무라고 특정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종려나무의 상징성에 주목했기 때문일 겁니다. 종려나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사사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 앉아(삿4:5) 이스라엘 자손들을 재판했다고 합니다. 이때 종려나무는 정직과 정의를 상징합니다. 시편92편12절에서 우리는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라는 표현과 만납니다. 여기서 종려나무는 번성하는 생명의 은유입니다. 에스겔은 성전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나무판자 위에 그룹과 종려나무가 새겨진 모습을 비전으로 봅니다(겔41:18). 여기서 종려나무는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종려나무는 복합적이면서도 아주 긍정적인 이미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이렇게 좋아하는 까닭은 척박한 땅,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큰 울림을 주는 나무이기 때문일 겁니다. 종려나무는 기후 조건이 좋지 않은 척박한 땅이나, 염분이 많은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가물어도 깊이 뿌리를 내려 물기를 찾아내고, 그 힘으로 줄기를 하늘 높이 뻗치고,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사람들에게 자양분이 되어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종려나무에 빗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길 위에 펼쳐놓은 겉옷과 깔아놓은 종려나무 가지는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나타내는 오브제입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11:9-10)

사람들의 이런 환호성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참 쓸쓸합니다. 그 야단법석의 한복판에서 홀로 외로우셨을 예수님의 마음과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외롭다”는 파스칼의 말이 참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제자들이나 군중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불과 며칠 후에 벌어질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닥쳐올 현실에 눈을 뜨고 계십니다. 

• 고조되는 긴장

예루살렘에서의 나날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단호하면서도 긴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이제부터는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막11:14)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 후에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막11:17)며 탄식하셨습니다. 성전 체제를 통해 기득권을 얻고 있던 사람들을 빗댄 게 분명한 ‘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듯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막12:10)는 말씀을 인용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성전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이들에게 예수는 불순하고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아프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삶의 방향을 바꾸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로마의 정치권력이나 민중들의 분노를 이용해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막12:14b) 하고 묻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것은 하나님과 세속 권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충성을 바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며 인사받는 것을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하지만,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신랄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칭찬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렙돈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가난한 과부를 보며 주님은 눈시울이 붉어지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여인의 마음은 하나님을 내세우며 제 배를 불리려는 지도자들과 너무나 대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금기를 건드렸습니다. 그것은 성전의 위용에 놀라는 제자들을 향해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막13: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설사 그런 생각이 든다 해도 차마 발설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서슴없이 말씀하십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거듭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나날은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이 안전한 자리에서 복음서를 읽는 제게도 팽팽한 긴장이 밀려오니 그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어땠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치 섬처럼 외로우셨을 겁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철이 없습니다. 스승의 괴로움을 모릅니다. 

• 몰이해와 이해 사이

오늘의 본문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의 일입니다. 음식을 잡수시고 있는데,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그가 막달라 마리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은 그를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그의 행동은 매우 특별합니다. 여인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 그것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히말라야 원산 식물인 나르초(草) 뿌리에서 짜낸 것이라 합니다. 희귀했기에 값도 무척 비싼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급작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인은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인은 자기의 마음의 중심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 평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좋으신 주님께 그 귀한 것을 부어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여인의 몸짓은 ‘시’와 같습니다. 표현된 것보다 표현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 향유를 쏟아부어드리는 순간 여인의 마음에는 향유보다 더 값진 것이 스며들었을 겁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친밀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시’를 ‘산문’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명 회복의 사건을 보지 못한 채 그들은 여전히 돈 타령, 가난한 사람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팔았더라면 300데나리온은 되었을 것이고,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명분이야 근사하지만 사실 그들이 마음 쓰고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그 값진 향유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십니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주님은 여인의 그 행동이 당신의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런 일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여인이 보인 그 사랑과 감사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바치는 찬가였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과 대립하면서 지치고 긴장됐던 예수님의 마음에 새로운 힘이 공급되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그렇습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의 진정을 알아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인이 이전에 예수님에게서 그런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면, 지금은 예수님이 이 여인을 통해 그런 따뜻한 사랑을 맛보고 계십니다. 

• 오늘의 예수

고난주일을 맞으면서 제 마음에 깊이 울려온 말은 ‘예수는 이 세상에서 외롭다’는 말이었고, 바로 우리가 예수님이 마음 두실 곳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교계 소식에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나날입니다. 1980년 대 초에 정호승 시인이 쓴 <서울의 예수>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정호승, <서울의 예수> 부분)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80년 대 초, 새 세상을 염원하던 사람들, 들풀처럼 일어났던 사람들이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붙잡혀 들어가는 살풍경한 세상에서 시인은 겨울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예수님은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사람,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지어 먹이는 사람, 스스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설 자리가 되어주는 사람,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들이 없어 주님은 지금 외로우십니다. 도시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십자가의 표식은 넘치지만 주님은 지금 머무실 곳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이 머무실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교회가 살아납니다.

사순절 고난의 여정 가운데 계신 주님은 지금 동행을 찾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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