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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길 (막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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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막 11:1-11)

 
지난 주 월요일 아침에 실로암 병원에 가서 의료진들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는 가운데 원목실에 있는 후배 목사로부터 참으로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후배 목사의 사모님이 재일교포인데 이번에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 일어난 후쿠시마 지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센다이에 살았었고, 아직도 그곳에 여동생이 살고 있답니다.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 일어난 후에 대부분의 한국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철수했답니다. 

일본인 교회 목사님은 50명 정도 되는 교인들과 함께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한국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오면 선교사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선교사들이 모두 본국으로 철수했으니 어떤 도움도 제대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사로 떠날 때 복음을 위해 죽을 것을 각오하고 떠납니다. 선교 사역지에 뼈를 묻겠다는 다짐을 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그 뜻과 생각이 아무리 선하고, 각오가 새로워도 고난 앞에서 그것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남의 이야기라 하기 쉽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죽음의 잔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만큼 몸부림치며 기도하시면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내 뜻을 접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의 길이고 헌신의 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고난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주일을 통해 우리에게 강렬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난 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얻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진리를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지고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진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넓은 길로 가지 마라. 그 길은 멸망의 길이다. 좁은 길로 가라 그 길은 영생의 길이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 안에는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치신 대로 낮은 자리, 죽는 자리, 좁은 길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부활시키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 위에 있는 것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로 무릎을 꿇게 하시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 뒤에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는 제사는 오직 성전에서만 드려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사는 동네에 회당이라는 것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평일에는 학교로, 마을 회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야 했기에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일 년에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3대 절기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제사 드리는 것을 꿈으로 여겼습니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두 번은 꼭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의 종류를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죄인 줄을 알고 지은 ‘고의적인 죄’와 죄인 줄 모르고 지은 ‘과실의 죄’입니다. 우리들이 보통 회개 기도할 때 ‘우리들이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인 줄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받는 길이 제사라고 믿었습니다. 죄인 줄을 알고 지은 죄는 고백과 함께 선행을 통해서 죄의 값을 치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의 무게와 선행의 무게를 잴 것인데, 만일 선행의 무게가 고의적인 죄의 무게보다 크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교인들에게는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제사’와 ‘선행’은 두 개의 기둥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로 인해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방법으로 부지런히 죄를 씻어 내야만 하나님의 눈에 들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이 두 가지를 다 행할 수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모르고 지은 죄 값을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성전 문 곁에 늘어서 있는 거지들에게 적선을 하고 성전 헌금 궤에 헌금을 드리는 선행을 통해 알고 지은 죄를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도시에 꽤 유명한 유대인 거지가 몇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전문직 거지’ 인데, 실은 저택을 가지고 사는 알부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교인들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는데, 그 태도가 매우 당당하다고 합니다.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나에게 돈을 달라.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돕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죄인 놈들아, 나에게 후하게 적선하라!’

성전 제도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세워지고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만든 복된 제도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도, 제사를 집례 하는 제사장들도 성전 제도를 오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행을 통해 고의로 지은 죄를 회개하는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성전을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성전이 강도의 소굴처럼 타락했을 때 그 성전을 숙청하시면서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은 이런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에 담겨 있는 정신은 자기 부인과 헌신입니다. 자기 부인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이루는 결단이 있는 것이 제사입니다. 그러한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성전 제도가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이유는 성전 제도와 제사가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과 정신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성전 제도와 타락한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명하시면서 예수님 스스로가 십자가를 지고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서십니다. 당신을 제물로 드리시면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리심으로 제사의 참 의미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인류의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있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는데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인이 그것을 왜 가져 가느냐 하면 뭐라고 말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말씀에 따라 마을에 내려가서 묶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어서 가져가려 했습니다. 주인이 왜 그것을 가져가느냐고 묻자 제자들은 ‘주께서 쓰시겠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주인이 기꺼이 나귀새끼를 내주었습니다. 대단한 헌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귀 새끼는 그 당시에는 한 가정의 재산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이었습니다. 한 가정을 살릴 수 있는 밑천이었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기꺼이 내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외형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이 헌신하며 봉사하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 새끼 등에 깔았습니다. 자신들의 겉옷으로 예수님께서 편하게 타실 수 있도록 안장은 만든 것입니다. 군중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붉은 카펫을 깔은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주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모두가 예수님을 향해 헌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을 보면 헌신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가장 고귀한 헌신자는 나귀 새끼 주인이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단 한 마디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제산인 나귀 새끼를 예수님을 위해 내어 놓았습니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비싼 나귀 새끼를 아무 조건 없이 드리는 데는 마음에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 주인의 본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까워 거절하고 싶지만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에 자신의 뜻을 접고 순종하며 드렸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순종의 마음이 나귀 새끼 주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의 헌신은 나귀 새끼 주인의 헌신과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헌신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 새끼 등에 깔았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예수님을 위한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그러나 그 헌신 뒤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셔서 왕이 되면 자신들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행한 헌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헌신이 아닌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위한 이기적인 헌신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의 정신이 담긴 헌신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보다는 내 뜻을 이뤄주소서’ 라는 뜻이 담긴 왜곡된 헌신입니다. 사실 이것은 헌신이라기보다는 투기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군중들의 헌신이 나옵니다. 군중들이 겉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소리를 치며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의 행동과 찬양은 외형적으로 보면 대단한 헌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헌신과 찬양 뒤에도 그들의 바램과 욕구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가 되어 로마 제국을 멸망키시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 왕과 같은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그들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기대와 소망을 담아 헌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투기이고 이기적인 기복 신앙 표현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고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오늘 본문의 상황에 우리들이 살고 있었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겠습니까?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타신 나귀 새끼 등에 안장을 만드는 제자의 모습입니까?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의 모습이겠습니까? 아니면 아무 조건 없이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씀에 따라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접고 자신의 것을 내려놓은 나귀새끼 주인의 모습이겠습니까? 

세상에서 먹고 살기에 힘들고 바쁘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소원을 중심으로 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이번 고난주간 한 주간은 음식 금식과 미디어, 탄소 금식을 통해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고백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나귀 새끼를 드리는 나귀새끼 주인의 영성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고난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분명히 믿고 이 고난주일 아침에 진정한 순종의 헌신을 배우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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