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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거절당한 소원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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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당한 소원 (마 20:20-28)


오늘 성경말씀의 기록도 예수님 사순절 기간 중에 일어났던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어떤 여자가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매우 당돌한 요청을 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변하신 것으로 말씀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이 집의 배경을 살피면 아버지 이름이 ‘세베대’라고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 생활을 했는데 비교적 어부 생활에 만족하고 조금은 여유 있는 집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집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으로 둘 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살로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나는데 예수님과 친척이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자매지간입니다. 살로메는 예수님과 촌수로 따진다면 예수님의 이모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모가 되는 살로메가 오늘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면서 무엇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절까지 하며 요청을 하는 것을 보니까 보통 요청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랬더니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살로메의 소원에 즉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 하면 기가 막힌 것입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내 좌편에 앉고 내 우편에 앉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어떤 것이냐? 무엇을 바라고 내 좌우편에 앉기를 원하느냐?” 

또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명하소서. 임명하소서.” 아예 임명장을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참 기가 막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이시며 살로메의 생각을 지적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권세를 부리고 싶어서 내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니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우리 인간은 기본적 몇 가지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생을 통해서 버리지 못하는 소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생존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고 싶은 소원을 인간은 누구나 다 가지고 살기 마련입니다. 제가 10대적에는 부흥회를 많이 쫓아다녔는데 그때 부흥사들은 부흥회 기간 동안 꼭 한번 짚고 넘어가는 말이 있었습니다. 어느 부흥회를 가보아도, 어느 부흥사 이야기를 들어도 그 문제는 한 번씩 짚고 넘어갔는데 바로 천국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옛날에는 부흥사들이 무슨 질문을 던지고 교인들이 대답하는 형식의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천국을 믿으십니까?” 교회 온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멘!” 그럴 거 아닙니까? “천국이 그렇게 좋다는 것도 믿으십니까?” “아멘!” “그러면 천국 가시길 소원하십니까?” 모두 “아멘!” 큰소리로 대답합니다. “오늘 가시기 원하십니까?” “…….” 그렇게 천국이 좋다고 믿으면서도 생존본능을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 다음에는 평등적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이 명품을 가지고 있으면 나도 가지고 싶습니다. 뭐든지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고 싶습니다. 사실 유행이라는 것은 잠깐 지나갑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따라잡기를 원합니다. 왜? 남이 누리기 때문입니다. 내게 별로 그렇게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내가 누리지 못할 때 그 스트레스나 섭섭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따라가고 싶어 하는 것이 평등적 본능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배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권세자가 되어서 집권하기 원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내 마음대로 명령하고 부리고 싶어 하는 지배 본능적 욕구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되기 위하여 끝없는 투쟁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저도 한때는 살맛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인데 제가 여기 분당 초등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교장선생님이 아침 조회할 때 꼭 전교생을 모아놓고 교단에 서셔서 “오늘은 이거, 오늘은 이거…….” 어쨌든 학교에 간 날은 비 오는 날 빼놓고는 반드시 아침 조회를 합니다. 선생님들이 모두 앞에 서있고 교장 선생님 계신 바로 그 앞에 전교생을 향해서 명령을 하는 대대장이 한 사람 있게 마련인데 바로 제가 그 일을 했습니다. 생활 주임 선생님이 저에게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 말 안 따르는 사람은 우리 선생님들 앞에 다 있고 교장 선생님도 계시니까 벌주어도 괜찮다.” 그러면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차렷! 열중 쉬어!” 하다가 잘 안 따라하면 “4학년! 땅 바닥에 손대고 1분간 엎드려!”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제 말대로 엎드려야 합니다. 생활지도 선생님이 그렇게 해서 군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흐느적거리고 잘 안 따라하면 그때가 제 세상입니다. “5학년 어떻게 된 거야? 줄 똑바로 서!” 그때가 정말 살만 했습니다. 어린 아이도 지배 본능적 욕구가 좋습니다. 그런데 어른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일평생 이런 것을 누리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욕심을 부렸고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칭기즈 칸, 히틀러 이런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온 세계를 한번 흔들어보고 싶은 지배 본능적 욕구가 끝이 없이 발전한 것이 세계 전쟁 역사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살로메는 지금 거기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셨습니다. 집권자들이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임의로 부리는 것에 매력을 느껴서 “내가 왕이 될 때 당신의 두 아들을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냐?”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반응이 나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인데, 바로 24절에 나옵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열 제자가 화가 났습니다. “아니, 쟤네들이 벌써 저런 정치를 해?” 여러분! 한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사람이 특별 취급을 받고자 할 때 그 공동체의 분위기는 살벌한 경쟁의식이 생겨집니다. 

무서운 견제 세력이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열 제자가 이 사건을 보고 분하게 여겼다는 이 말은 자기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날부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공동체는 험악해 졌습니다. 저마다 눈치를 보면서 이 출세의 기회를 이제 때가 되었으니까 놓치지 않으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조금이라도 우수한 점을 내세우는데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 살로메라는 여자는 왜 이렇게 두 아들의 출세 작업에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나왔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사역은 거의 끝나갑니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는데 우선 자기의 두 아들과 예수님은 어떤 다른 제자의 관계보다도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왜냐? 예수님과 이종사촌입니다. 혈육관계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마리아, 즉 예수님의 어머니와 살로메는 빨리 통합니다. 지름길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를 가지고 있으니까 자신만만합니다. 또, 평소 예수님의 마음을 관찰해 볼 때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의 제일 사랑하는 제자는 자기 아들, 바로 요한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옵니다. 사랑받는 제자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살로메의 마음에는 ‘틀림없어!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 제일 많이 있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특별한 의미 있는 일을 행하실 때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세 사람을 선택합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서 신비한 광경을 보여주실 때 다른 제자들은 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야고보, 요한, 베드로 세 사람만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만 그것을 보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러 가는 그 현장에도 다른 사람은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들어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야고보, 요한, 베드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두 아들은 항상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철야기도를 하실 때 다른 제자는 못 오게 하셨습니다. 야고보, 요한, 베드로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살로메의 두 아들은 언제나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어머니 살로메의 마음에는 자신감이 있을 만합니다. ‘우리 두 아들은 충분히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특별 관심과 사랑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베드로가 걸립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 베드로가 심상치 않게 수제자의 자리를 확보해 나갑니다. 살로메는 이 베드로 때문에 사실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그 베드로 앞에서 “명하소서. 아예 이쯤에서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이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좌편, 우편의 권세를 내 아들 두 사람에게 이제 임명장을 주소서.” 이렇게 말해놓으니까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로메가 그럴만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경제적 후원자였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선교 사역에 절대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소원을 거절하기 힘든 관계입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를 이리 재어 보고, 저리 재어 봐도 절대 자신감이 있으니까 대담하게 나와서 그러한 자기의 마음을 충분히 발표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파장을 계산하지 못할 미련한 여자가 아닙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난처해 졌습니다. 이 돌발적인 당돌한 요청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하실 것인가? 예수님은 아주 어려운 상태에 빠졌습니다. 사실 이 때 인간 예수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싫으나 좋으나 열두 제자는 3년 동안 자신들의 모든 내용을 다 포기하고 자기를 따라왔습니다. 사실 리더로서 예수님도 이 제자들에게 만족할만한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왜 안주고 싶겠습니까? 한 조직의 리더가 갖는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저 같은 목사도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고 싶지 거절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사정은 좀 다르지만 다 똑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들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원하는 선물은 뭐든지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것을 거절하고 싶은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가족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싶습니다. 주님도 지금 열두 명의 자녀를 거느린 가장 같은 위치에 있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아픔이 무엇인가? 자신이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거 어떡하나?’ 남자들 잘 모르지만 요즘에 여자들 핸드폰에 유행하는 문자가 있습니다. “사정상 남편 급매합니다. 

해당 구청에 정품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명예 양도해 드립니다. 아끼던 물건인데 유지비가 많이 들어서 할 수 없이 급매합니다. 아직 쓸 만하고 AS는 안되고 반품도 사절하고 덤으로 시어머니까지 끼어 드릴 테니 사 가십시오.” 이런 문자가 오고 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인들 제자들이 소원하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절대 주실 수 없는 것을 요청했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도대체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무슨 길인지 알고 있기나 하고 그런 요청을 하느냐? 만약 당신이 내가 가는 이 길이 무슨 길이란 것을 알았다면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오히려 안하려고 도망을 갈 것인데, 모르기 때문에 나한테 그런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그의 말씀대로 고난의 잔을 마실 때 제자들은 좌편, 우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만약 살로메가 정말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였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비아돌로로사 골고다 가는 그 언덕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받으시는 예수님 곁에 가서 “예수여! 이 무거운 십자가를 어떻게 혼자 지고 가시겠나이까? 내 두 아들은 젊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서 주님을 도와 이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하옵소서.” 이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라셨던 것은 그런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살로메에게 무엇이라고 답변하셨겠습니까? “여자여! 그대는 장하도다. 나는 제자를 키운 보람을 오늘 찾았노라. 그래, 너의 두 아들은 하늘의 복이 있을지어다.” 아마 흐뭇하고 감격해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로메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도 갈릴리 사람들도 다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가 민족 해방자가 될 것이며 장차 이루어질 아브라함 후손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왕권을 갖게 될 것이다. 집권자가 되어서 백성의 임의로 주관하고 대인이 되어서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적어도 로마를 내쫓을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분! 좌편, 우편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옛날에 좌정승, 우정승 국가의 견제 세력의 두 그룹을 두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살로메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언니인 마리아가 대비마마가 됩니다. 그러면 자기는 그 곁에서 온갖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 계산하고 있는데 심상찮게 떠오르는 실세 베드로가 신경이 쓰여서 ‘쟤는 왜 항상 저기 끼는 거야? 쟤가 왜 수제자야? 내 두 아들이 있는데…….’ 그래서 베드로 앞에서 “오늘 명하소서. 그 자리는 누구도 안주겠다고 임명장을 내 아들에게 지금 주소서.” 야심 많은 여인의 안방정치에 아주 강인한 요청이 나옵니다. 

이제 예수님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살로메의 요청에 대해서 제자들은 나름대로 생각을 추리하고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저 여자가 저렇게 당돌하게 나오는 것은 평소에 예수님이 암시적 신호를 보인 것이 아니냐?” 여기 제자들이 분히 여겼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이 문제가 그들 가운데 얼마나 심각한 쟁점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 이런 기회가 올 때 남자들 세계는 출세를 위해서 장해 요소에 대해서 무자비합니다. 죽여 버립니다. 그게 남자들 세계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험악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예수님은 이렇게 설교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려는 욕심이 있다면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하리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나의 몸까지 마지막에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도 내 좌우편에 있기를 원하느냐?” 사람들은 조용해졌습니다. 우리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이익사회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이익이 있을 때에만 몸을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달에 월급 얼마 줄 테니까 그 약속을 믿고 몸을 바쳐라.” 만약 일을 잘했다는 평가를 받으면 사람의 이익과 직분의 권위는 점점 더 많아집니다. “당신 계장으로 있었는데 과장이 되기도 하고 부장이 되기도 하고 나중에 사장으로 승격이 되기도 하고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이익도 점점 커지고…….” 그런데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한 계념을 가지고 교회 들어온 사람입니다. 교회는 정 반대의 길을 갑니다. 교회 봉사 많이 하는 사람은 항상 교회 와 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입니까? 손해도 납니다. 헌금도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 일 하다가 마음도 상합니다. 날마다 손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예수님께 살로메가 요청을 한 그 일에 대해서 “내가 간 길은 이 길이다. 따라오겠느냐?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마시겠나이다.” 그렇게 대답한 사람들이 다 도망갑니다.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죽으셨습니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하나씩 둘씩 다시 모여서 평소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성령에 의해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이 길이구나.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도 예수와 같이 죽어야 한다.” 그렇게 깨닫고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다음에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일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도망갔던 사람들이 무엇을 합니까? 변화산에, 그리고 몇 군데 특별히 초대받은 세 사람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루살렘 초대교회 설립자가 됩니다. 

이 땅에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를 최초로 예루살렘을 세우는데 제일 공헌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베드로를 1대 교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좌편, 우편에 앉기를 바랐던 야고보와 요한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에서 예수님 좌우편에 앉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야고보는 열두 제자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죄수의 몸으로 유배를 가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세 사람이 가장 큰 일을 했습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이런 절기를 지키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묵상한 이유가 뭔가? ‘아!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려는 것이 뭔가? 진심으로 예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소원이 뭔가? 내가 예수님께 바랐던 소원이 뭔가?’ 이것을 정리합니다. ‘아! 이제부터 나는 주님의 소원을 따르자. 그 길이 비록 피를 흘리며 험악할지라도 나에게 주신 사명이 이것이로구나.’ 그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세웠던 일을 우리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사순절의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살로메도, 예수의 제자들도 모두다 세상의 허영적 욕심에 사로잡혔던 욕심을 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셔서 주님이 나에게 가르쳐주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땅 위에서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릴 사람이 누군고?”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사순절을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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