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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씻으라 (요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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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으라 (요13:8-9)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장관으로 왕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찾아가면 그가 고쳐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왕이 써준 친서를 소지하고 먼길을 떠나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갔는데 나와서 맞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 말하기를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왕의 친서를 가지고온  군대장관을 이렇게 대하나! 하는 교만이 꿈틀거렸습니다. 그냥 돌아가려 했으나 수행원의 말을 듣고 뜻을 돌이켜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어린 아이 살같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왕하5:10,13). 나아만은 요단 강물에 몸을 씻기 위해 교만의 수레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옷을 벗고 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는 한번 두 번 계속 물로 들어갑니다. 여섯 번 씻고 일곱 번까지 씻고 또 씻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손을 씻으라

급성 전염병인 페스트는 잠복기가 2일부터 10일인데 사망률이 높아 순식간에 수천명 죽게되기도 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가 유행하여 전 인구의 1/3이 죽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페스트를 퍼트렸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왜 그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손을 씻는 습관 때문입니다. 식사 전에, 화장실에 다녀와서 반드시 손을 씻습니다. 당시만 해도 유럽인들은 손 씻는 일을 못해 전염병에 노출되었습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전통을 철저히 지킵니다. 장로의 전통은 손을 씻는 일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은 지키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나이까?”(막7:5) 
  
유대인들은 손을 씻는 것을 신성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유대 랍비로 유명한 힐렐이 급하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랍비를 보고 “선생님 바쁜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라고 인사하자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학생은 랍비가 급히 가서 하는 선한 일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서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랍비는 목욕탕으로 들어갔습니다. 학생도 목욕탕으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랍비는 목욕탕에 들어가 옷을 벗고 몸을 열심히 씻었습니다. 이를 본 학생이 힐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것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선한 일입니까?” 학생의 말을 듣고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청결케 하는 것은 대단히 선한 일이다.  자신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손이 깨끗해야 힘이 더해집니다.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욥17:9).  손이 깨끗하다는 말은 행동이 옳다는 뜻입니다. 부정한 손과 부정한 마음은 쓰임 받지 못합니다. 부정한 청지기는 쫓겨납니다. 죠지 워싱턴은 “당신이 스스로를 귀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쁜 친구와 사귀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있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
  
부정한 자는 쫓겨납니다. 더 이상 사귀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피합니다.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부정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막7:15-16) 

  
눈을 씻으라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의 눈을 씻어 보게 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는데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기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을 번역하며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실로암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사람들이 묻기를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하니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요9:1-11).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하셨습니다. 눈은 상징적으로 영적인 인식기관입니다. 마음, 정신을 의미합니다. 성한 눈은 자기 집에 빛을 주고, 성하지 못한 눈은 온 집안을 어둠 속에 잠기게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성한 눈은 마음이 청결한 자를 말합니다. 눈이 흐려지면 사물도 하나님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육신의 눈도 있지만 심령의 눈도 있습니다. 눈에는 지각의 눈도 있습니다. 보고 분간하는 눈입니다. 분변하고 식별합니다. 
  
사물을 보고 사리를 판단합니다. 분석하고 이해합니다. 눈은 항상 맑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히 봅니다. 앎을 위해 주님의 씻어주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도 동산지기로 알았습니다(요20:15).
  
눈을 맑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마음의 눈을 더 더욱 그러합니다. 사울은 열성적인 유대교 신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출현과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제자들을 위협했고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피신해 있는 다메섹을 향해갔습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환한 빛이 그를 향해 비추는 순간 땅에 엎드러졌을 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누구시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그때 눈이 멀어 안보입니다. 사흘동안 앞을 볼 수 없었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찾아와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길에서 만난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려하심이오” 하고 안수했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시력이 회복되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씻어 주셔야 합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눈을 씻어 주시면 자신이 죄인임을 보게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눈, 자신을 직시하는 눈,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리시기 바랍니다. 

  
발을 씻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저녁 식사시간에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베드로 차례가 되었는데,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베드로는 거절하려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들의 죄를 씻어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에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신을 벗는 것은 존경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자기 권리의 포기를 나타냅니다. 랍비들은 신발을 벗는 것은 “ego” 자아를 버리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16:24)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아를 깨뜨려야 합니다.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합니다. 
  
불교에서 쓰는 말로 구족제자(具足弟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석가가 죽으며 “내가 죽어 입관할 때 발을 관 밖에 내 놓으라!”고 유언했습니다. 
  
석가가 세상을 떠나실 때 가장 아끼는 제자인 “아난”이 멀리 떠나 있어서 임종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난”은 머리가 좋았으나 실천이 약했습니다. 아난이 돌아와 관 밖으로 나온 스승의 발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왜 발을 보여 주실까? 실천이 부족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 발을 보여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족이란 충분히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배워서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발걸음을 따라가기는 제자가 구족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은 그 발로 나를 따라 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셨습니다. 씻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서하며 살라 하셨습니다. 
  
부부가 서로 발을 씻겨 보십시오. 놀라운 일체감을 느낄 것입니다. 서로 씻어주며 살지 않으면 일생을 함께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씻어주면 밀착관계가 형성됩니다. 씻겨주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3-14)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셨고, 화해와 일치를 가르치셨습니다. 
  
씻어주심을 받은 여러분! 그 발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복음 전하는 발이 되어, “아름답도다! 복음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하고 칭찬 받는 발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는 것은 하나님과 접촉하는 신성한 일로 여겼습니다. 식탁에 앉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손을 씻는 일은 위생을 위해서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영혼을 오염시키는 죄의 먼지를 씻어야합니다.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하는 먼지는 욕심입니다. 
  
여리고 길가에 맹인 두 사람이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니 “주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예수를 좇아갔습니다”(마10:29-34)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게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님이 씻어 주심을 받아 깨끗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 따라가는 구족제자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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