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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역설 (요 1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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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역설 (요 12:20-26)

 
기독교 달력 가운데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고난주간이라고 불리는 이 기간을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교회는 거룩한 주간, holy week 라고 불렀습니다. 왜 이번주간이 거룩한 주간일까요? 그것은 우리처럼 더럽고 추한 인간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만왕의 왕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매 맞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갇히신 그런 숭고한 아름다운 거룩한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진 주간이기 때문에 이번 주간을 거룩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에 거룩한 주간 종려주일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사셨는가? 특별히 오늘은 잡히시기 며칠 전에 하셨던 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올바른 의미, 십자가의 역설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깨달음으로 한 주간 동안을 거룩하게 보낼 수 있고자 합니다. 

사람이 거룩하게 사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삶이 거룩해 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의 역설, 십자가의 길, 이 길을 배움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거룩하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헬라파 사람들의 방문을 받습니다. 헬라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러 온 이 사람들은 누구인지 우리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헬라사람이면서 유대교를 개종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헬라사람인데 진리에 대하여 늘 탐구하던 중에 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하나님의 집,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집으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내쫓았던 그 광경을 목격한 헬라사람들이 도대체 그 예수라고 하는 사람의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을 좀 알아보려고 연구해 보려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다고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일로 인해서 몇 몇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이 헬라파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방문 목적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 나를 보자고 했는데 무슨 일 때문에 나를 보자고 했느냐? 라고 묻지 않고 그들을 보자마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도다.” 라고 하는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됐다.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고요, 영광을 받을 때가 됐다. 영광과 때를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이 헬라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영광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됐다. 이 영광의 의미를 예수님이 오늘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의 세 가지 비유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것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역설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을 완전히 뒤 엎어서 반대로 해석하고 주장하는 것을 역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세 가지,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만한 때가 되었다.”의 그 영광의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영광과는 정 반대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지만 예수님은 정 반대의 일을 해야 만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세 가지 영광!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거기에 십자가의 역설이라고 하는 단어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의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제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되었다고.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농사를 지면 농작물의 씨앗을 심습니다. 그러면 보셔요. 어떤 씨앗은 보기가 좋습니다. 울긋불긋하기도 하고 모양도 예쁘고 크기도 합니다. 그런데 씨앗이 아무리 좋다고 해서 그 씨앗을 땀에 심지도 않고 병에 담아 진열해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씨앗이 있어야 할 곳은 차가운 깜깜한 땅 속입니다.

우리가 심는 이유는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자 심는 것입니다. 씨앗을 관상용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알의 밀알, 한 알의 씨앗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먼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최초에 나오는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듯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듯이 한 사람 예수님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속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의 형체는 없어집니다. 그런데 대신 이제 잎이 나고 열매가 맺혀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한 알을 심었는데 수도 없이 많은 것이 태어나듯, 예수님 한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만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새로운 열매가 잉태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그러면 한 알의 밀알이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되면,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사실일까요? 그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 시간에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죽어야 한다고요. 한 알의 밀알이 돼서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땅 속에서 죽을 수 있을까요? 저는 세 가지로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꿈과 우리 이상과,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인간적인 계획과 이런 모든 것들을 땅 속에 묻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적인 계획과 인간적인 포부가 없으셨을까요?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이 잔을 제가 마셔야 합니까? 예수님도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셨겠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고 싶지 않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싶지 않았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 받으면서 살고 싶으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그런 욕망과 꿈을 다 접으시고, 예수님은 고난의 길 그 욕망과 꿈과 계획을 다 접으시고 예수님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편안하게 죽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논리처럼 자기들의 꿈처럼 살았다고 한다면 예수님도 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으면 여러분과 제게 생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살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설은 지금 죽으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산다고 하는 논리는 세상에서는 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야기 합니다. 죽으라고요. 네 계획과 네 생각과 네 포부 네 인간적인 욕심을 땅에 묻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묻는 순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직도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포부 속에서 살아가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길 원치 않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인간적인 욕망과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죽지 않았다고 한다면, 생명은 구원은 희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땅에 묻는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교만을 자기의 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가 뭘까요? 끝까지 자기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다가 오늘 내 자존심 구겼어. 내 인격이 땅에 떨어 졌네. 사람들 굉장히 불편해 합니다.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내 자존심을 버리고 내 자만심을 버리고 이런 것을 다 땅 속에 묻어 놓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자유스러워 질수 있습니다. 자유스럽지 못한 이유는 아직도 내 자아가 내 자존심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네 자아를 땅 속에 묻으라고요. 자만심을 묻으라고 요청합니다. 교만을 묻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세 번째, 용서와 사랑과 인내를 땅 속에 묻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용서를 묻고 사랑을 땅 속에 묻으면 그 바깥으로 나오는 모든 것들은 화해의 열매, 사랑의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 시간에 이야기 합니다. 네가 살고 싶으냐? 용서를 받고 싶으냐? 열매를 얻고 싶으냐? 그러면 땅 속에 묻히는 죽는 연습을 하라고 이 시간에 우리들에게 요청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우리는 땅 속에 들어가서 죽어야 합니다. 교만도 죽이고 자만도 죽이고 내 생각과 내 재미와 내 세상적인 쾌락을 죽이고 대신에 화해를 심고 인내를 심고 사랑을 심으면 주님이 말씀 하시는 것처럼 많은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역설은 우리의 생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보존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을 버린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이것은 세 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자기의 팔을 잘라놓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시간을 잘라놓고 자기의 재물을 잘라놓고 자기의 권위와 자기의 재능을 잘라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잘라놓나요?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 세상을 위해 자기의 몸을 도려내는 아픈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헌신하는 의미합니다. 생명을 내어 놓으라고 해서 무슨 목숨을 끊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을 가리켜 희생과 헌신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영국의 에반스라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시골, 전국을 다니면서 쉬지 않고 정말 고통을 당하면서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너무너무 안타까워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조금 편안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없나?” 그러자 하는 말이 “나는 녹슬어서 없어지기보다 달아서 없어지는 인생이 되고자 하네.” 아름다운 표현을 썼습니다. 녹슬어서 없어지기보다 달아서 없어지는 인생이 되고자 한다. 

1978년인가요? 테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받고 난 다음에 뉴욕에 와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이 테레사 수녀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 일어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 콜카타에서 집 없는 거리의 아이들, 부랑아들, 거리의 여자들, 몸 파는 사람들, 과부들 고아들을 데려다가 그들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손마디가 얼굴 주름살과 다 고난이 있고 힘들지만 테레사 수녀님은 달아 없어진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비누를 한 번 보세요. 비누는 사람들이 자꾸만 쓰게 되면 비누 자체는 닳아서 없어 지지만 비누 자체가 없어진 일로 인하여 사람들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소금은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음식 속에 들어가면 맛을 내고 생선이나 이런 것들 속에 들어가면 썩지 않게 부패를 막아 줍니다.

자기 자신은 없어지지만 사람들에게 맛을 내고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밧데리는 자기는 수명을 다해 없어지지만 밧데리는 그 일로 빛을 밝히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닳아 없어지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쇠가 없어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녹슬어서 없어지는 방법이 있고요. 하나는 너무 너무 많이 써서 닳아서 없어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나니.......” 달려갈 길을 다 달렸습니다. 믿음을 지켰겠지요! 이게 닳아 없어진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돈을 버시나요? 돈 벌어서 뭐 하실 건데요? 건강하려고 운동하시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건강의 목적도 돈 버는 목적도 모두가 다 몸을 통해 재산을 통해 평생 살면서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일을 위하여 내 몸을 사용하고 내 재산을 사용하기 위해 닳아 없어지기 위하여 돈을 벌고 건강해 진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아름답게 받으실 수 있지만 돈 벌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고 건강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면 그것은 닳아 없어지는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생명을 버리라고요. 그것은 희생하라는 이야기 입니다. 헌신하라는 이야기지요. 이런 인생을 주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세 번째, 주님은 섬기는 자가 되면 주님은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움켜쥐려고 합니다. 잡아야 한다고 소유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앞서가는 인도자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야 인생 성공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주님이 말씀 하시는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 두 제자의 이름보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예수님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유는, 예수님은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섬기는 이런 섬김의 삶을 끊임없이 살 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들의 이름이 아름답게 위대하게 기억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역설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죽으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내려놓으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땅 속에 들어가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고 섬기는 종이 되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쉽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논리에 젖어 살아왔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역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키포인트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가셔서 지금 전 세계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귀와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희생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섬기셨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 길이고 내어 주는 길이고 남들을 섬길 때 주님은 우리를 위대한 존재로 삼으사, 우리에게 영광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주님의 역설, 십자가의 역설을 가슴에 담고 살아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 존귀히 영광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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