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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부활의 확실성 (롬 6: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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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날입니다. 이날은 고난의 좁고 긴 터널을 빠져 나와 마침내 감격스런 햇살이 빛나는 승리의 날입니다. 
부활 신앙은 다른 어떤 종교에도 없는 기독교만의 핵심 사상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나 과학으로 입증하거나 추론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면서도, 2천년 전에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으면 기독교도 없고 믿음도 없으며, 미래도 없고 소망도 없을 뻔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교회 제자들에게 엄청난 소망이 되었고, 교회를 번성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신약교회가 구약성경을 받아들이고 그토록 십계명을 순종하는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유독 제4계명인 안식일 성수의 명령을 토요일에서 주일로 바꾸어 지켜온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이날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처음 각지에 설립된 교회들에서는 제각기 다른 날에 부활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회는 부활절을 매년 춘분이후 첫 보름달이 지난 다음 주일로 정하기로 했고, 오늘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성도의 삶과 직접 연계시켜 교훈하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로마서의 전반부는 이 책의 기본주제인 이신득의(以信得義, Justification by Faith)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소주제들은 죄(Sin), 심판(Judgment), 칭의(稱義, Justification), 성화(聖化, Sanctfication), 최후의 승리(Final Victory) 등입니다.

이와 같은 문맥 속에서 제6~8장은 칭의 이후 곧 성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후의 국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칭의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사법적 행위입니다. 성도가 칭의의 은혜를 받은 것은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성도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4절). 성도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였고, 그의 죽으심이 곧 우리 성도의 죽음으로 간주됩니다. 다시 말해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 자아(old self)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죽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자는 주님의 부활에도 연합한 자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5절). “

오늘 말씀은 부활의 확실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과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부활을 확신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부활의 확실성을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1.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음 (= 예수님 부활의 확실성)

4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하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사복음서를 포함한 모든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거침없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한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우리들이 악한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당시 로마 황제 숭배가 강요되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순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시는 모습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예수를 믿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 -- 이것이 초대교인들이 전한 부활의 메시지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부활에 관하여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단순하게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요 20:27=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의 부활은 현장에 있던 제자들까지 믿지 못했을 만큼 놀라운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 앞에서 직접 떡과 생선을 잡수시는 현장 실습을 하셔야 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입니다. 무(無)에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이나 비판으로 따질 것이 못됩니다.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단지 사실만을 기록하였고,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믿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성도는 그와 함께 살 것임 (= 예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5절이 의미하는 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에도 연합한 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만일(에이)’ 은 현재 사실에 대한 반대로서의 가정이 아니라 현재 사실을 확인시키는 의미와 더불어 귀결절의 의미를 한층 더 강화시키기 위한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본절의 강조점이 하반절에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는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하여 새생명 가운데 확실히 살게 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장차 종말 때의 성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이고, 나아가서 현재 성도가 거듭난 자로서 새생명을 향유하고 있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저자인 사도 바울의 논리는 이제 좀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본절은 내용상 5절과 유사합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비슷한 내용의 말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기 위하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죽음 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적용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분명한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분명하다고 성경은 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전 15:20-2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 때문에 인류 위에 드리워진 사망의 그늘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끔히 제거되었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축복이 주어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활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된 몸의 형체를 입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입으신 영광의 몸처럼 우리의 몸도 변화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의 추한 모습, 병들고 찢겨진 상한 심령이 예수님의 모습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자랑인 주기철 목사님은 확고한 부활 신앙으로 모진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순교의 길을 가신 분이십니다. 1940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잠시 풀려난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다섯 가지 나의 기도' 란 유명한 설교를 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일사각오' 란 말이 오늘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1) 죽음권세 이기게 하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유용한 재목이 되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게 하소서. 

2) 오랜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랜 기간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 죽을 것 뿐이오나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님의 부활하심 같이 영생 불사,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3) 늙은 어머니와 처자식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나이다. 나는 팔십 넘은 노모와 병든 아내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처자를 여러분에게 짐이 되게 할 맘 없습니다. 다만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더러운 땅 밟던 내 발을 씻어서 하늘나라 황금길 걷게 하옵소서. 아멘. 

주기철 목사님은 1944년 4월 21일에 장렬히 순교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그의 부활신앙은 지금도 한국교회의 심장 맥박처럼 뛰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연합한 우리는 장차 반드시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3.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임 (= 성도는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감)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부활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 재림 때에 반드시 다시 살아 날 것입니다. 성도는 부활의 신앙으로 이땅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11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영적 원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명령문인 본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오늘 우리 성도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탄원(歎願)에 가까운 요청입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언제든지 자신을 죄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로 인식하여야 합니다.

본절의 ‘여길지어다’(로기조마이)의 기본 의미는 ‘신중히 생각하다’, ‘논리적인 결론을 내리다’ 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의미의 동사를 사용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전개해 온 성도의 성화의 근거, 즉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 자신의 현실을 인식한 자라면 당연히 본절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비록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인(義人)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을 안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부단히 죄와 싸우는 성화의 과정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전에는 죄 아래 놓여 죄를 위하여 살았으나 이제는 부활의 능력으로 그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소망있고 약속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마다 부활절을 지키고도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간다면 이건 부활을 믿는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서도 애굽의 떡과 고기를 또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광야의 시련이 모질고 험해도 묵묵히 이 길을 가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찬송하며 기쁨으로 승리의 삶을 산 것이 여건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그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불에 타면서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환난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황제 루이 14세를 아십니까? 그는 `짐이 국가다' 할 정도로 독재 정치를 하며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영화를 누렸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세금 늑탈을 일삼던 황제는 자신의 죄와 타락을 책망하는 `세조올프' 를 파리의 탑에 가두었습니다. 

부활절 아침이 되었습니다. 루이 14세가 많은 성직자들과 함께 화려한 부활절 행진을 하는 중 파리 탑을 지날 때 세조올프는 부활의 예수님을 크게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힘 있는 찬송에 크게 감격한 루이 14세는 감옥으로 찾아가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는 많은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었지만 이 아침 당신의 찬양처럼 생명의 힘이 있는 노래는 처음 들었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오.” 

황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그를 석방했다고 합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기에 죄를 이기고 시험을 이기고 환난을 이긴 것입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온전히 예수와 함께 죽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때 바로 그 죽음에서부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베드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비겁했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 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자 어떻게 변했습니까? 자기를 잡아 죽이려 하는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베드로는 마침내 예수의 이름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하자 그는 아주 여유 만만하게 말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감히 내가 어찌 제대로 십자가에 달릴 수 있겠소? 나를 거꾸로 매달아 못박으시오.” 비겁한 베드로가 어떻게 하여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고, 부활의 능력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뿐만이 아닙니다. 오합지졸 같은 제자들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자 변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사자굴에 끌려가면서도, 펄펄 끓는 기름가마 속에 들어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죽어갈 수 있었습니다. 흩어졌던 성도들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고, 목이 잘리고, 화살에 맞고, 돌에 맞아 장렬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로마의 칼날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들이 이제는 로마의 칼날을 향해 돌진하며 ‘예수 다시 사셨다’ 고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강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이란 말을 헬라어로 `아나스타미스'라고 하는데 `ana'는 `다시', `histemi'는 `일어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면 다시 일어섭니다. 부활 신앙을 갖게되면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됩니다. 부활신앙을 갖게되면 암으로 죽어가던 환자들도 다시 일어납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은 그의 삶이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메시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24:5-6). 
여기 계시지 않다--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첫마디입니다. 빈 무덤--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토대입니다. 기독교는 거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부활의 보증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에 옛사람을 못박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땅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영생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육신은 비록 죽어도 영혼은 주님과 함께 거하다가 예수님 다시 오실 때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선구자인 김활란 박사는 부활 소망을 가지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육체가 떠난다고 해서 나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장례식을 해 주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만일 원한다면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생명의 나라로 가는 환송 예배를 드려 주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며, 성령을 파송하고 계십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을 날마다 증거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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