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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승리자예수 (요 1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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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예수 (요 16:25-33)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참 복잡하다고 말들 합니다. 그런데 그 복잡한 세상살이의 중심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복잡한 인간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은 인간이 여러 가지로 복잡한 세상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인간입니다. 

심지어는 먹는 것까지도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냥 입으로 먹는 것으로 끝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단 몇 사람만 모여도 “어느 식당으로 갈까?”에서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먹을까?”까지 쉽게 합의가 되지 않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겨우 입에 음식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먹는 것 하나에도 심리적 차원에서 그 복잡한 구조를 가만히 보면 그 다양성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감정주도의 유형입니다. 

이 사람은 식당에 가면 음식보다 음식을 가져온 사람의 얼굴을 중시합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있느냐 없느냐, 종업원의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에 따라서 입맛이 좌우되고 심지어 그것이 소화를 되게도 하고 안 되게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음식점의 분위기가 절대적으로 맛과 연결 지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음식 맛을 따라 식당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쁜 종업원이 있고, 친절한 집이면 음식 맛과는 상관없이 그 집을 갑니다. 정말 감상적인 사람입니다. 가져다주는 음식을 그냥 먹으면 좋겠는데 그릇이 어떻고 음식 가져오는 사람의 분위기가 어떻고 그게 먼저입니다. 어떻게 보면 본질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는 좀 피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두 번째는 감각주도 유형입니다. 

이 사람은 반대입니다. 음식을 누가 주느냐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만 음식의 맛이 어떤지, 영양가가 얼마나 있는지, 몸에 유익한 음식인지, 이런 것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먹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흔히 미식가(美食家)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뚝배기 보다 장맛을 중시하는 유형입니다. 

아무리 허물어져 가는 움막집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오직 자기 입맛에 배인 대로 그 맛 때문에 늘 그곳을 찾아듭니다. 형식보다는 음식점이라고 하는 본질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좀 특별합니다. 

음식 맛, 영양가, 분위기 다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해야 옳겠지요. 살아야겠으니 먹어야 하겠고, 일해야겠으니 먹어야 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식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습니다. 배고픔을 면하기만 하면 되기에 주는 대로 먹을 따름입니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게 아닙니다. 

쓰면 약으로 알고 먹고, 달면 달구나 하면서 먹는 것이지 까다롭게 입맛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생계 주도적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먹는 것보다는 우선 사는 것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복잡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각기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나름의 성취를 꿈꾸고, 성공을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자기만의 승리 방식을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면서 오늘도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과연 무엇이 승리인지, 무엇에 승리하는 것이 값진 인생인지를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승리란 무엇일까요? 어떤 의미의 승리가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강자의 역사가 아니고 약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승리라는 것은 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을 죽여만 내가 사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빼앗고 빼앗기고 그리고 빼앗은 후에 허망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요, 오히려 주고도 기뻐하는 것이 승리입니다. 

남을 미워하면서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는 그런 잔인한 승리가 아니요, 사랑하고 감사하는 그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의에 도취해서 남을 정죄하면서 기뻐하는 그런 승리가 아닙니다. 이유야 어쨌든 남을 용서하고 기뻐할 수 있는 거기에 승리가 있다는 말이요. 남을 누르고 즐기는 것이 아니고 화목하고 더불어 기뻐하는 거기에 참 승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참 승리라는 것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적성과 재능에 의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와 자세가 승리하게 한다고 합니다. 참 승리라는 것은 재능도 권세도 아닙니다. 환경에 문제도 아닙니다. 승리라는 것은 자세의 문제입니다. 어떤 자세로,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거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승리하는 신앙이냐 패배자의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자의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를 오늘 예수님께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신 날이라 하여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올라갔다는 것은 초라하게 보이지만 이것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왕이 취임하게 될 때 그 행사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왕은 겸손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올라가던 전통대로 오늘 예수님께서 나귀의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바로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곧 죽으실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 죽음을 앞두고 왕의 대관식 전통을 따라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라는 것을 나타내시고자 하심입니다. 승리한 왕의 모습입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지, 알든 모르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미 승자로서, 이긴 자로서 행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승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란 실패가 아니라 최후 승리의 표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왜 예수님인들 걱정이 없고 불안이 없겠습니까? 죽음이 불과 몇 시간 앞에 있는데...그러나 어느 순간 이것이 다 사라집니다. 깨달아지고 모든 것으로부터 깨끗해지는 순간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달아진다는 것은 분명히 은혜입니다. 무지한 것이 아니라 안다는 것은 은혜란 말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아무에게나 그리고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두고 볼 때 세상에는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무지 한 사람입니다. 둘째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 말 순수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아는 것은 많은데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이건 불행한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현명 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빨리 깨닫느냐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말하고 행동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언행심사를 반성하는 성찰의 작업이 절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승리자가 되어야합니다. 신앙의 승리자가 되어야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어려움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신앙적인 어려움입니다. 장로님이 대통령이고 보니까 세상이 기독교를 향해서 더욱더 악랄하게 비판하고 때로는 허무맹랑하고 맹목적인 비판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때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 분이 대통령이 아니라 교회의 장로님이라는 직분으로만 계셨다면 겪지 않을 어려움을 겪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정치적인 문제로 왈가왈부 하는 일들로 장로님이라는 직분과 기독교라는 종교를 비판하거나 욕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맹목적으로 욕하고 비난합니다. 뭐 다른 종교 이야기도 심심찮게 있습니다만 그렇게 거품을 물고 물어뜯지 않습니다. 불교만 해도 종단 사이에 떠들썩한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만 그리 욕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참 화가 나기도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승리의 방식을 따르려고 교회는 고요히 침묵하는 가운데 평안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항거하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이미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의연히 지시는 예수님의 승리방식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33절을 보세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언제나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성경적으로 살아야 됩니다. 실상은 목소리만 크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있다고 있는 힘껏 떠들고 남을 괴롭혀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힘으로 바꾸려면 실패합니다. 큰소리로 이기려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어떤 도전이나 믿음의 시련을 차라리 수용합시다. 그리고 받아들이십시다. 마음으로 승리하고 의연히 받아들이는 그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승리자 같은 실패자가 있고, 실패자 같은 승리자도 있습니다. 승리한 줄 알았는데 실패하고, 실패한 줄 알았는데 승리한 이런 새옹지마가 세상에 허다하다는 말입니다. 특히 진리의 세계는 항상 실패 같은 승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히 졌는데 이겼습니다. 잃었는데 얻었습니다. 내가 주었는데 더 많아졌습니다. 빼앗겼는데 더 풍성해졌습니다. 그리고 죽었는데 살았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묘미입니다. 신비한 신앙의 승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승자는 꼴찌를 해도 의미를 찾지만, 패자는 오직 일등을 했을 때만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승자는 죽어도 의미를 찾는 사람입니다. 승자에게 의미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의미 있는 승리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보면 도무지 신앙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에게도 그렇고, 상황 속에서도 그렇지만 이겨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당시에는 어떻게 이겨낼까 걱정도 되고, 그냥 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만 참고 견디면 충분히 우리 또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면 욕도 참을 수 있고, 굴욕도 견딜 수 있고, 아픔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오늘 주님도 말씀 하십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아니 하나님만이 내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습니다. 내가 노심초사 하고, 우리가 우기고, 내 고집을 부려서 얻어낼 수 있는 차원의 승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목소리를 낮춥시다. 그리고 조용히 받아들입시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주님의 십자가에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에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입니다. 그것을 아는 순간 주님은 이미 먼저 승리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그리고 십자가를 의연하게 감당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십자가보다 큽니까? 정말 근심하고 걱정하고 내가 내 맘대로 되기를 원하는 문제가 주님의 십자가 보다 중요한 문제입니까? 

주님의 말씀의 의도를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에 너희도 승리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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