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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 이후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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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이후 (행 7:54-60) 


복된 부활 주일에 흩어졌던 높은 뜻 교회들과 교우들을 한 자리에 불러주시고 예배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 동안은 네 교회가 연합하여 예배를 드렸지만 올해는 다섯 교회가 연합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3월 첫 주일 첫 예배를 드린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 교인들이 멀리 천안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교회를 분립할 때 가장 많이 기도한 것 중에 하나는 독립과 연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분립된 교회가 완전한 독립을 이루면서도 그 넷이 완벽한 연합을 이루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넷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넷인 교회를 꿈꾸며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넷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넷인 교회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자마자 하나님은 다섯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다섯인 교회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전통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흩어지지 않고 잘 이어져 내려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을 함께 먹고 자고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도 제자다운 면모를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자 다 도망하여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변하였습니다. 초대교회 때 저들은 다 사도가 되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대부분 순교하였습니다. 무엇이 저들을 그렇게 딴 사람이 되게 하였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저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도한 후 저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하게 된 것이 저들이 변하여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은 용감해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서워 피하여 도망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서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랬습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최초의 순교자였던 오늘 본문의 스데반을 보아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스데반을 통하여 그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를 포함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죽음과 실패와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주를 위한 일이라면, 그것이 옳고 좋은 일이라면 죽고 망하고 실패하고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도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 결국은 승리하였습니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 바로 죽음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이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3년 전 우리 교회가 세운 열매나눔재단은 탈북자들의 자활을 위하여 메자닌 아이팩 공장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정말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염려하고 걱정을 하였었습니다. 그것은 확률 제로 게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그 일을 진행하는 줄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사라도 그 일의 성공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저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해 보이는 아니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설교 중에 드린 말씀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인가 아닌가만 생각한다.’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다가 망한 것은 망한 것이 아니다. 할 수 없다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면 망하지는 않겠지만 그것 자체가 망한 것이다.’였습니다. 

망할 수도 있었지만 망하는 것이 크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신앙에 의하면 망하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망하는 것 이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공장은 역시 어려웠습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6개월 동안에 4억 원 정도 적자가 났습니다. 

그때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슬퍼하며 심히 애탈지라도’는 찬송이 참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제 심정이 정말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찬송의 다음 구절이 너무 은혜스러웠습니다. ‘나중 예수께서 칭찬하시리니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 까 슬퍼하며 심히 애탈지라도’는 십자가였습니다. ‘나중 예수께서 칭찬하시리니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는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승리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자닌 아이팩은 우리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믿음의 각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대로 되게 해 주셨습니다. 메자닌 아이팩은 연매출 45억 원 정도를 올리는 공장이 되었습니다. 지난 1월에는 파주에 약 천 평 정도 부지의 공장을 사서 이전하였습니다. 실패가 두려웠다면 절대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패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기에, 하나님과 부활을 생각하고 믿을 수 있었기에 도전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의 신앙고백대로 되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맛 볼 수 없는 부활의 승리를 맛보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복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존재의 용기’라는 책을 썼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용기라는 이야기를 그 책에서 저자는 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용기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는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용기입니다. 용기 중에 최고의 용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입니다. 그 용기를 부활 신앙이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오늘 본문의 스데반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가족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죽음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짐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인생의 승리를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부활 이후 부활의 확고한 신앙을 가진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매우 중요한 현상 중에 하나는 세상에 대한 미련과 욕심이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저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었습니다.

막내 아이가 세 돌 좀 지났을 때 집을 나서는데 저를 가로막아 서면서 ‘100원’을 웨쳤습니다. 100원 짜리가 없고 500원 짜리 동전이 마침 있어서 그것을 주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500원 짜리를 본 적이 없는 아이가 그것을 내 던지며 다시 손을 내 밀었습니다. 500원의 가치를 모르는 아이는 100원 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500원의 가치를 알게 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500원과 100원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두 번 도 생각하지 않고 500원을 선택할 것입니다. 500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100원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 제자들과 교인들은 100원 짜리와 같은 세상에 대하여 더 이상 미련과 욕심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서에서 그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자랑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근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한국 교회의 망신을 부끄럽지만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라고 하는 분이 ‘돈, 권력, 색스’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바로 그 세 가지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기자가 저와 인터뷰를 하다가 왜 그런 일이 우리 한국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제가 쉽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 목사들이 예수를 안 믿어서 그래.’

설마 싶지만 사실입니다. 정말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가 믿어진다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산다면 ‘돈, 권력, 색스’와 같은 세상을 대표하는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그 욕심 없는 마음의 축복을 줍니다. 욕심이 우리를 어리석게 하고 욕심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만족을 모르게 합니다. 그래서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릅니다. 욕심 때문에 늘 불만하며 욕심의 노예가 되어 평생 쉬지도 못하고 고장난 기계처럼 돌아갑니다. 그리고 욕심 때문에 죄를 짓고 죄를 지음으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욕심 없는 마음처럼 귀한 축복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욕심 없는 마음은 우리에게 만족이라는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얼마나 근사한 말씀입니까?.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고 찬송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통하여 죽음 이후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니 죽음 이전의 세상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 받는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과 같은 축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과 교인들이 이 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부활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연합하여 예배하는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이 복을 다 받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명인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좇아오던 햇빛인데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종소리도 드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그 용기를 가지고 죽을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그 용기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죽을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일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좋을 일이 생겼습니다.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은 그 일을 위하여 대부분 순교하였고 순교하지 않았어도 순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목사를 성직자라고 부릅니다. 목사는 성직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목사만 성직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 즉 성직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목사만 성직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소명과 사명은 목회자에게만 있고 자신들에게는 없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직업의 세상적이고도 인간적인 목적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선교적인 소명은 부업 또는 봉사인 것처럼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하거나 하면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인가만 생각하고 그것이 해결이 되면 정말 실직자처럼 할 일 없이 세월을 낭비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활을 믿고 부활 이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 부활의 복음과 부활 이후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자신의 모든 기회와 실력과 경험과 능력을 사용하여 그것을 전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저는 요즘 트리플 서티라는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90으로 보고 그 90을 셋으로 나누어 계산하고 계획하는 것입니다. 처음 30년은 공부하고 두 번 째 30년은 열심히 사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나머지 30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다 쓰고 죽자는 운동입니다.

은퇴를 앞둔 많은 분들이 노후를 어떻게 하면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살다가 죽을까를 생각하는데 저는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건강한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벌었던 물질 중에 얼마를 떼어 하나님의 몫으로 정해 놓고 은퇴 후의 시간과 은퇴 전의 경험과 경력을 다 활용하여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간다면 얼마나 그 인생이 건강하고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의 삶을 보면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였으나 보다 중요한 믿음의 생활에는 미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이라면 부활 이후 제자들과 교인들에게 실제로 나타났던 일들이 일어나야만 할 것입니다. 죽음과 실패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 용기를 가지고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일에 도전하는 정신, 그리고 그 정신으로 이루어내는 승리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내세에 대한 확신 때문에 금세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하여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족하며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복을 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온 삶을 집중하여만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나름대로는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그와 같은 일이 정말 내 삶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죽음과 실패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갈렙처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옳은 일에 도전하며 사는 삶이 욕심 납니다.

저는 정말 세상적인 욕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어리석음 삶에서 벗어나 정말 배부르며 만족하며 행복한 삶을 천국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높은 뜻 교우 여러분, 교회만 다니지 말고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절 예배만 드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 이후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의 나타났던 그 근사한 삶의 자취를 밟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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