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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그가 살아나셨고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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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아나셨고 (막 16:1-8)


찰스 카우만(Charles E. Cowman)의 ‘젊은이를 위한 명상’ 이라는 저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젊은이가 길을 걸어가다가 어느 집의 창문에 그려진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생생하게 고난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감동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의 소년도 마찬가지로 그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소년의 표정이 빛나고 있었는데 그 그림이 분명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그러자 소년이 대답합니다. “저 가운데 계신 분이 예수님이고, 옆에 있는 자들은 로마 군인이며 울고 있는 여인은 예수의 어머니입니다. 

소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런데 저 군병들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라고 덧붙였습니다. 젊은이는 소년의 말을 생각하며 마을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그를 좇아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은 달려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어요. 그 말을 하기 위해 달려왔어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에 빠져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놓친다는 교훈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은 과거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가장 큰 날은 부활절입니다. 

여인들은 안식일 법에 따른 금지된 발걸음 때문에 날이 밝기만을 밤새껏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은 아예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죽은 시체에 필요한 향품을 가지고 간 것을 보면 여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들에게는 눈물, 슬픔, 낙담, 비통, 절망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산 자를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했으나 이들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보냈지만 그들에게는 진정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으나 아직도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즉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도 여인들처럼 실패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아직도 사망의 지배를 받으며, 걱정과 염려와 눈물로 무덤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어리석은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요, 체험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내 안에서 승리하심을 믿는 부활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아직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빈 무덤에서 예수를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무와 좌절 고통과 슬픔, 불신과 의심을 벗어 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도마 이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섭리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첫째로  승리를 주시리라

아프리카의 개척자이며 선교사였던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이 고국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글라스고 대학이 수여하는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강당에 나타난 그는 쇠약해 보였습니다.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사자에게 물리고 아프리카 특유의 심한 열병으로 스무 번이나 쓰러졌던 것입니다. 이날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하자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극심한 고생과 죽음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리빙스턴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가시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므로 어떤 고통도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부활신앙은 돌을 굴러냅니다. 여인들은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달려가며 ‘누가 무덤 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 주겠는가’ 염려하였는데 와보니 돌이 벌써 굴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돌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돌은 사단 권세의 상징이나 부활의 주님은 사단권세를 이미 정복했습니다. 

부활은 어떤 권세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돌 위에 빌라도가 인을 쳐 놓았지만 돌이 굴러질 때 그 인이 찢어졌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부활신앙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까지도 인간을 지배하지 못함을 선언하는 강력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와 죽음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 올무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주께서 이미 어두움과 죽음의 권세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유를 주시리라

스펄젼(C. H. Spurgeon) 목사가 어느 날 길을 가다 새장 안에 새를 괴롭히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새를 어떻게 할 거니?” 아이가 대답하기를 “조금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릴 거예요.” 그러자 새를 가엾게 여긴 스펄젼 목사는 아이에게 돈을 주고 새를 사게 되었습니다. 값을 지불하고 그 새를 샀지만 스펄전은 새를 새장 밖으로 날려 보내 주었습니다.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갔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죽음의 새장에서 꺼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새장을 나온 새처럼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날아오르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죄와 사망의 종이 되어 얽매여 있던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역사입니다. 부활은 거부할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입니다. 그 강력한 부활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의 모든 고통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비록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상과 먼 거리에 있을지라도 용서해 주십니다. 자유하기를 원하십니까?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과거를 채찍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지불하셨기에 대신 스스로 지불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과거의 고통에서뿐 아니라 현재의 짓눌림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메지 않고 자유함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만 자유를 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유를 전해야 합니다. 자유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이 죄악으로부터 해방을 주었기에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 자유가 주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소망을 주시리라

미국에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휘관으로 있던 러셀 코넬(Russell H. Conwell) 대령이 후퇴하면서 자신이 사용하고 아끼던 지휘도를 두고 오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이 일로 속을 태우던 그는 링이라는 용감하고 날렵한 소년을 시켜 그 칼을 가져오도록 명했습니다.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군 진지에 도착하기 직전 적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코넬에게 바치고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이시며 나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무신론자였던 코넬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년의 당당하고도 확신에 찬 모습이 뇌리 속에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마침내 소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 이 소년이 믿고 있던 하나님이시여,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저도 이 소년이 믿었던 하나님을 위해서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는 나중에 신학을 공부했고,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가 바로 미국 보스톤 교외에 있는 고든 코넬 신학대학원입니다. 그 후에 그는 템플 대학교를 세워 많은 영적지도자를 양성했습니다.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부활 신앙이 위대한 일을 하게 했습니다. 부활신앙이 죽음 앞에도 당당하게 했고, 더 나아가 한 사람을 살렸고, 그를 통해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심히 놀라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먼저 갈릴리로 가서 그를 품어 주셨습니다. 떡과 구운 생선을 주시면서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절망입니까? 사흘을 기다리십시오. 무덤을 깨뜨리신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우리의 부활도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이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으며, 죽음 앞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좌절과 실의에 빠졌어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소망을 주십니다. 모쪼록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심으로 부활의 소망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노벨상 수상작가 라게르크비스트(Pär Lagerkvist)의 소설 ‘바라바’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바라바가 민란을 일으킨 죄수로 잡혀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대신 바라바는 석방이 됩니다. 바라바는 멀리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합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가?” 바라바는 강한 의문을 갖고 고뇌합니다. 자신을 위해 대신 죽어가는 예수를 생각하다가 그가 메시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더 이상 편안히 살아갈 수가 없다며 당시 로마시내 방화사건에 스스로 연루됩니다. 그리고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아 죽습니다. 스스로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하셨습니다. 자유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부디 부활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부활 신앙으로 불의와 죄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여 언제나 담대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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