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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의 대리적 속량 (2) (사 53:1-3, 막 15: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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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대리적 속량  (2) (사 53:1-3, 막 15:33-39)
                    

지금 우리는 절기 중에서 하이라이트인 고난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2천년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뜻이 있는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동안 예수님은 고난의 여정을 가시게 됩니다. 일년 가운데 교회력 절기 중에 가장 무게 있는 절기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의 과정을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묵상하고 그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는 기간 40일간을 말합니다. 오늘로 40일간의 사순절 가운데서 끝 주간인 고난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주간에 이 시대에서 우리 삶에는 멘토가 필요하고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성장과정과 삶의 내용에서 그리고 위급한 때에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모델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혼란시대일수록 그리고 가치관이 혼돈되고 질서가 무시되는 세상일수록 더욱 모델이 필요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델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고 빈천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메시지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나는 섬기러 왔다고 했습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직접 섬기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완벽하게 치료해서 보내셨습니다. 또 십자가를 져야하는 가장 절박한 시간에 산으로 올라가 피땀 흘려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인상 깊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앞에 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깊은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 질시와 편견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몇 가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처절한 죽음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느냐 어떤 이유로 죽느냐가 중요합니다. 살아가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모습은 더 소중할 수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에서 가장 처절한 죽음을 죽으셨고 그것도 골고다 언덕이라는 역사상 가장 처절한 죽음의 현장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오전 9시에 달려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처절한 죽음으로 고난 당하셨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액세서리로 이해하고 있지만 원래 그 십자가는 목에 걸고 다닐 만한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도 로마에서 법 집행은 했지만 로마시민들은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방화사건이나 반란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본 보기로 처형하던 형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리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한사코 반대하였던 것도 십자가가 어떤 것 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도 십자가의 죽음은 계속되었습니다. 제자들도 상당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칼에 찔려 죽었고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짐승에 찢겨져 죽었고 돌에 맞아 죽었고 참수형에 죽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옥중에서 칼에 총에, 돌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6․25때에는 죽창에 찔리고 쇠스랑에 찍혀  죽었습니다. 모두 십자가형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는 죽음은 한결같이 십자가의 죽음처럼 죽었습니다. 오늘 기독교는 그 핏속에서 꽃이 피었고 결실이 맺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 피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가는 곳 마다 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만찬하실 때  “이는 내 피니 받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피를 통해서 복음이 뿌려졌고 확장되었고 피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준비된 죽음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준비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음의 시간과 시점을 결정하셨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으며 준비된 죽음이었습니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만족스럽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만족함을 표시하고 운명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이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백부장은 이방인 이였습니다. 로마군의 중간 지휘관으로 오늘의 대대장급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받고 골고다까지 인솔하는 동안 처형장면을 유심히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로부터 풍기는 신적능력을 보았을 것이며 예수의 실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경외서인 베드로 복음서를 보면 그 백부장의 이름은 롱기누스(Longinus) 라는 사람인데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고 회개하고 개종해서 갑바도기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켈벨(Kelber)이라는 학자는 “마가복음을 통틀어서 인간이 고백한 고백 가운데 유일한 참된 고백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는데도 예수를 정확하게 보고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하였습니다. 참 신비한 일입니다. 

신앙 안에는 이런 신비함이 있습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장차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예언을 믿었고 성경을 연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보지 못하고 끝내 예수를 잡아 죽였습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은 연구도 사전 이해도 없었던 사람인데도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때론 결정적일 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방인의 눈도 열어 보고 알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백부장이 또 나옵니다. 그 백부장도 이방인이었고 로마사람이었고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그에게 눈을 열고 귀를 열어 계시를 주셨고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향하여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말했습니다(누가복음8장28절). 그런데 평생 메시아가 올 것을 기다리고 연구하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정작 그가 왔는데 모르고 잡아 죽였습니다. 오래 믿고 전통 있는 믿음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전통이 있었고 오래 믿었고 성경박사였습니다. 밤낮으로 성전 안에서 예언서를 읽고 공부했습니다. 그가 오시리라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오셨는데 아무도 모르고 죽였습니다. 아이들은 살결이 부드럽지만 나이 먹고 늙게 되면 살결이 투박하고 굳어지고 감각이 무뎌지며 주름살이 커지듯이 신앙이 오래되면 굳어지기 쉽습니다. 오래 믿은 사람들은 뼈를 깎는 심정으로 연단해야 하며 수련하고 기도의 삶으로 영적 감각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 믿는 사람들은 목사님의 말씀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만 오래 믿은 분들은 감각도 감동도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 오래 믿었다는 것이 흠이 되고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백부장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제 싸움은 끝났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눈은 있는데 보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므로 성공적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 고백은 준비된 죽음을 말합니다. 준비된 죽음이라는 말은 죽음 앞에서 주저하거나 당황하거나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죽음 앞에서 당당하고 초연하고 만족하게 끝냈기 때문에 준비된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삶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종말의 모습은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고 왜 죽느냐는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지막 모습은 유감없이 메시지를 남기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도다” 그 말 한마디에 이방인의 입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폼 잡을 수 있는 순간은 임종시간입니다. 기왕 죽어야 한다면 그 시간에 유감없는 메시지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독일의 본 훼퍼목사는 히틀러 제거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 훼퍼 목사는 매일 아침 감방의 죄수들을 모아놓고 예배드렸습니다. 1945년 4월8일 부활절날 아침 수감자들을 모아놓고 부활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찬송 도중 감방 문이 열렸습니다. 

“본 훼퍼 나오라.” 순간 조용해지며 예배드리던 죄수들은 일제히 본 훼퍼 목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부름이 무슨 뜻인지 예배드리던 죄수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 본훼퍼 목사는 일어나서 “동지들이여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먼저 갑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누릴 시간이 다가 왔습니다. 부디 승리하십시오” 라고 말한 뒤 본 훼퍼목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간수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겠습니까. 그것이 준비된 죽음입니다. 거기에 당당함이 있고 혼쾌함이 있고 이미 준비된 죽음의 모습을 우리는 본 훼퍼 목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폴리캅은 로마황제 신상에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발당되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폴리캅은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았습니다. 폴리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끝까지 신앙심을 지켰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로마황제 신상 앞에서 머리를 숙이면 나만 쳐다보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평생 동안 유지해온 신앙신조가 무너집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폴리캅은 끝까지 신상참배를 거부하며 화형당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황제는 황제대로 폴리캅을 무너트리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저절로 무너지리라는 기대 때문에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습니다. 나중에는 폴리캅의 절친한 로마 실세인 친구를 보내 회유를 했습니다. 그 친구는 폴리캅에게 “왜 그리 융통성이 없는가, 지금 고개를 숙이는 체하고 위기를 모면한 다음에 회개하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 일세”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상황윤리, 상황신학입니다. 그때 그 상황 속에서 폴리캅은 껄껄 웃으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내 나이 83세요, 살만큼 살았네, 그리고 지난 내 인생 83년 동안 주님은 내게 서운한 말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는데 내 어찌 지금에 와서 더 살겠다고 주님께 실례를 하겠는가, 내 기꺼이 불에 타 죽겠네.” 그리고 그는 당당하게 화형당해 죽었습니다. 이것이 폼 잡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감화를 받았겠습니까. 로마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회유하던 친구와 숨죽이고 바라보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겠습니까. 또 그 순간 하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이것이 메시지를 남기는 죽음이며 준비된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하루라도 더 살아보려는 미련에 집착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입니다. 사형수들에게는 사형당하기 전날 마지막 먹고 싶은 것을 말하면 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형수는 굳이 “복숭아”를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니 지금이 한겨울인데 복숭아를 구하려면 내년 여름이나 되어야 하는데 어디서 복숭아를 구하느냐”고 하자 사형수는 “그럼 여름까지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하루라도 더 살아보겠다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준비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 “다 이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 백부장이 그 모습을 보고 신적 권위와 경외감으로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예수께서 죽으신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내가 죽어야 세상과 인류가 구원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죽음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대리적 속량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볼 때 인간은 무한한 보물입니다. 그 인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인간을 뺏을 기회가 왔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재빨리 인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그때부터 마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인간을 도로 찾기 위해서 마귀와 흥정을 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줄까. 돈을 얼마나 줄까”. 

그러자 마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아들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해서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제물로 세상에 보내시고 인간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대리적 속량의 죽음이라 말합니다. 본문 38절을 보면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입니다. 

그 휘장이 있는 한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 말은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두 개의 매개 즉 하나는 제사장을 통해야 하고 또 하나는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장벽이 가로막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 가로막혔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더 이상 장벽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값으로 주어진 은총입니다. 장벽이 무너지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독재가 무너지는데도,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도 피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노예제도가 폐지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마침내는 링컨 대통령이 피를 흘려 그 무서운 노예제도가 폐지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온전한 자기부정 

이 같은 예수님의 죽음에는 100% 자기부정의 결단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성자로 주님으로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는데 주님은 그런 기득권과 능력, 초월성을 철저하게 부정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음 그 자체도 자기부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들이 무력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주님은 온갖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모두 자기부정의 결과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때 펄쩍 뛰어 내려오셨으면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참음으로 진정한 스승이 되셨고 메시야가 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모두 자기부정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우리의 멘토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온전케 하는 이 이신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고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 칩거하다가 3년 만에 나오며 외쳤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 이 고난의 주님을 묵상하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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