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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신앙을 갖는 통로 (눅 24:13-17, 27-35)

첨부 1


부활 신앙을 갖는 통로(누가복음 24:13~17, 27~35)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무덤의 문이 열렸지만 예수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다. 마가가 전해주는 부활의 이야기는 제자들의 태도가 모두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이 되는 막16:14에 가서 보면 예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신다. 그 이유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자들은 귀로 듣는 부활, 그 복된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 믿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도 본래 믿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길을 걸어가던 이들이었다. 오늘 본문 눅24:13~35을 보면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서 주님을 뵙는 경험을 했기에 부활을 믿고 전하는 자가 된 것이지 처음부터 확신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을 자세히 보자.

엠마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마을이었다. 

눅24:16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17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라고 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믿지 못하는데서 오는 회의의 구름이 가슴 속에 가득한 체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두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다녀온 여자들이 부활을 알려주고 천사를 보았다고 전해주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신들이 보지 못한 주님이기에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없었다. 부활의 주님이 눅24:25에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한 것을 보면 두 제자들은 의심을 안고 걷는 중이었다. 그 걸음이 얼마나 힘이 빠진 걸음이었을까?

그 걸음이 눅24:33을 보면 확신의 걸음으로 바뀐다. 엠마오 도상의 석양 무렵 여관에 들어간 두 제자들은 눈이 밝아져 부활의 예수를 알아보게 되고 그 즉시 뜨거운 마음을 안고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해가 저문 시간이기에 머문 숙박집에 찾아들어간 두 제자는 예수를 보는 체험을 하자마자 그 주막집을 뛰쳐나와 깜깜해진 저녁 시간을 헤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부활을 경험하고 나니 내려가는 걸음이 올라가는 걸음이 되었다. 밤이 무서워 집으로 찾아 들어간 자들이 밤을 헤치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걸음이 되었다. 회의와 근심으로 슬픈 얼굴을 감출 수 없었던 걸음이 환희와 감격, 기쁨의 얼굴을 드러내는 걸음이 되었다. 부활이 믿어지는 순간 삶의 U턴이 이루어졌다. 희망을 빼앗긴 자처럼 엠마오 마을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본 후 부활의 전도사가 되어 예루살렘의 열 한 제자들에게로 향하였다.

그러므로 부활을 듣는 소식만으로는 내 부활이 되기가 쉽지 않다.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직접 만나야 내 부활이 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부활 신앙의 통로가 있는가?
  

1. 동행하며 신앙의 이야기를 나누라. (눅24:14)

두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눅24:14을 보면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고 하였다. 삶의 충격과 의혹, 알지 못하는 삶의 사건을 혼자 가지고 있지 말라. 예수님에 대해서 일어난 사건들이 삶 속에서 잘 용납되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며 삶을 나누라. 

눅24:15을 보라.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라고 기록한다. 삶을 나누는 것은 두 사람 이상의 관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룹이 만들어지면 서로에게 묻고 자신의 삶의 해석을 주고 받게 된다.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서로 동행자가 되어야 한다. 같은 방향으로 가고 같은 속도로 내려가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한 길 위를 걷는 동행자여야 한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려면 동행하면서 삶을 나누는 것이 그 체험의 시작이다. 

보라, 삶을 나누는 이야기 속에 예수가 다가오셨다. 눅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을 뿐이지 예수가 다가오셨다. 그리고 두 사람의 그룹 사이에 새 나그네로 들어오셔서 그룹이 3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 3명의 동행자들이 되어 함께 삶을 나누셨다. 두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이 나그네로 보인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들에 의하면 예수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았다고 하는데 정작 살아난 예수는 보지 못했다는 점을 공개했다. 이것이 신앙으로 진입하는 출발이었다. 삶의 나눔은 두 사람에서 세 사람으로 되고 그들의 근심, 걱정, 회의, 불안, 슬픔 등 믿지 못하는 내면의 실체들의 삶의 무게가 서로에게 공유가 되었다. 

부활 신앙으로 신앙의 변화를 일어나게 하려면 삶을 나누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 무거운 삶이든, 가벼운 삶의 이야기든지 공유되어야 한다. 그 나누는 자리가 속회다. 속회는 신앙의 이야기를 나누는 소그룹이다. 마음에 더디 믿고 미련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삶의 사건을 주고 받으며 한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의 자리이다. 교회를 다녀도 신앙이 안 생긴다. 불평하지 말고 속회에 발을 들여놓고 동행하라. 낙심되는 것까지라도 함께 나누는 속회로 들어가라.
  

2. 살아있는 말씀을 나누라. (눅24:27)

나그네로 동행하시는 예수는 십자가에 대한 언급을 하였다. 십자가가 수용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는 사건이라고 언급하셨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믿어야 할 것임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눅24:27에 말씀을 풀어주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부활 신앙이 내 신앙이 되도록 체험하는 둘째 통로는 성경이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은 예수에 관해서 알려주는 예언들이었다. 오경과 예언서 뿐만이 아니다. 시편과도 같은 성문서 속에도 예수에 관해서 알려주는 예언들이 있다. 역사서 같은 책 속에도 예수에 관해서 알려주는 예언이 있다. 나그네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 성경에 쓰여져 있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을 설명하셨다. 잉태, 출생, 성장, 공생애, 고난, 버림 받음 등에 관해 정말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말씀을 나누는 것은 신앙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다르다. 신앙의 이야기도 신앙에 자극을 주고 태도를 바꾸어 주지만 말씀을 나누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 눅24:32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는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말씀을 나누면, 정말 말씀을 풀어서 나누면 희미하던 것이 확실하게 보인다. 듣는 것에서 보게 되는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그 예언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십자가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 구약에 기록된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그 정밀하고 분명한 말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말씀을 나누면 확신이 선다. 구원의 확신, 승리의 확신, 인도받음의 확신, 죄사함의 확신, 부활의 확신 등 확신이 밀고 들어온다.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 말씀은 반석을 쳐서 깨뜨리는 불방망이같은 능력이 있다. 우리가 기름 부음 받는 이들이 되지 못했기에 말씀을 나누지 못한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서라.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가르침을 받고 속회를 인도하고 말씀을 나누자. 부활의 주님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그 복된 소망의 예수를 만나게 된다.
  

3. 친밀감 있는 친교를 나누라. (눅24:29~30)

두 제자는 마을에 들어갔다. 더 가시려는 나그네 예수를 그들은 강권한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나그네와 두 사람, 그들은 25리 길을 동행한 것 뿐이다. 그러나 두 제자들은 나그네를 떠나보내기 싫다. 함께 유하자는 것은 먹고 마시고 한 밤을 보내자는 것이다. 세 사람의 작은 그룹은 가까워졌다. 여행길에서 만난 나그네이지만 삶과 신앙을 나누는 순례객이 되었다. 그들의 동행은 신앙을 찾는 동행이었다. 그들의 대화와 그들의 머뭄은 그냥 헤어질 수 없는 끌어당김의 교제였다. 

세 사람의 나그네는 음식을 나누게 된다. 사람과 사람의 친밀감은 밥상에서 생긴다. 밥상을 같이 하는 것은 친교의 왕도다. 예수님은 본래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나그네 예수님은 눅24:30 “떡을 가지사 축사”하셨다. 그들의 친교 속에 기도와 감사, 축복이 곁들여졌다. 떡에 대한 기도, 떡을 나누는 것에 대한 감사, 떡을 떼는 일에 대한 축복, 이 성례전적 친교 속에서 눈이 밝아졌다. 그들과 함께 하는 나그네가 예수님임을 알아보았다. 부활의 예수가 자신이 걷는 길의 나그네였던 것이다. 

우리도 지금 어떤 지친 모습, 어떤 슬픔의 모습으로 걷고 있든지 간에 친교를 소중히 여기자. 코이노니아가 없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잘하고 예배는 잘 드리지만 옆에 앉아 있는 이가 누군지 알려는 마음이 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교제를 하려하지 않는다. 이는 교회가 아니다. 선생님인지, 농사 짓는 이인지 무심한 체 돌아간다. 교제하라. 코이노니아가 교회의 생명력이다. 이제 낯설기만한 옆사람과 나그네로 아는 그와 속장님으로, 장로님으로 알고 있는 그다. 친교 속에서 하나가 되어질 때 예수님이 보여진다. 부활이 믿어지고 부활 신앙을 갖게 된다.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엠마오 도상 위에 서 있는 나의 걸음

2011년 부활절 아침에 터벅터벅 걸어서 예배당 뜰어 나타난 것은 아닌가?

“생명의 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는 찬송을 들으면서 처진 어깨를 하고 예배당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도상에서 세 가지를 나누는 크리스챤이 되어 변화의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외치며 소망과 기쁨이 충만한 얼굴로 달음질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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