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반드시 그 분이셔야 하는 이유 (행 4:1-12)

첨부 1


반드시 그 분이셔야 하는 이유 (행 4:1-12)


<다케모도 고노스케>의 『마지막 손님』이란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게이꼬>라는 열 아홉 살 된 처녀가 등장합니다. 게이꼬는 <춘추암>이란 제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과점이 크지는 않지만 직원들은 손님들의 마음에 남는 과자를 만들어 팔려고 노력을 합니다. <조그만 가게임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 조그만 당신의 가게에 사람 마음의 아름다움을 가득 채우자>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일합니다. 한 번 다녀간 손님들은 춘추암 과자를 잊지 못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게이꼬는 가게문을 잠그고 집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갑니다. 혹시나 하고 돌아보니, 자동차는 춘추암 앞에 멈춰 섰습니다. 게이꼬는 달려갑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대단히 미안해하면서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어머니가 하루 이틀 밖에 살지 못하신다고 하는데, 춘추암의 과자를 잡수시고 싶어 하셔서 이렇게 눈길을 달려 왔습니다. 눈 때문에 차가 늦어져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가게문을 닫으셨는데 미안합니다.> 

게이꼬는 그의 효성에 감동을 받아 다시 가게문을 열고 노인이 먹기 좋은 것으로 골라 담아줍니다. 그리곤 돌아가실 어른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라면서 과자 값을 받지 않습니다. 그가 떠난 후 게이꼬는 자기 돈으로 과자 값을 채워 넣습니다. 후에 그녀는 손님이 남긴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전화를 해서 노인이 별세한 것을 알게 되고,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노인이 과자를 잡숫지 못한 채, 아들이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둔 것을 알게 됩니다.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본인 특유의 성실함과 잔잔한 배려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왜 그 아들은 눈길을 달려 춘추암에까지 온 것일까요? 가까이에 제과점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춘추암 과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춘추암은 그 어머니가 건강하여 드나들 때 진한 감동을 주었고, 임종 직전에도 춘추암 과자를 기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에 중요한 것일수록 그렇습니다. 하찮은 것들이야 대용품을 써도 상관없습니다. 삼성 TV를 보던 사람이 LG TV를 본다고 큰 일 날 것 없습니다. 승용차를 타던 사람이 승합차를 탈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단독 주택에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길가는 아무나 붙들고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병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에게 이웃집 아이를 데려다 준다고 해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은 그 아이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은 모두 이 세상에 하나만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한 명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도 하나입니다. 이런 것들은 대용품이나 대신할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의 절정>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인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친구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할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요, 예수님을 모시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오직 그 분만이 우리에게 주님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사실을 말씀합니다. 12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자가 될 이름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도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면 왜 예수님만이 구주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신비성 때문입니까? 물론 예수님은 우리가 보기에 정말 신비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나시던 밤에 하늘에는 천사가 나타나 노래를 불렀고, 엄청난 별이 나타났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등장하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신비성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비성은 예수님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그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할 때 천사가 나타나 미리 말했고, 말한 그대로 요한이 탄생했습니다. 그 후 요한은 광야에 살면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었습니다. 요한도 매우 신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면 요한도 우리의 구주입니까? 아닙니다. 신비한 것만으로 구주가 되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구주가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특별히 말씀을 잘 가르치셨기 때문에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잘 가르친 것으로 치면 예수님 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백성을 가르친 모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외친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많은 예언자들,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모아놓고 율법을 가르친 학사 에스라 같은 사람들도 말씀을 잘 가르친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잘 가르쳤기 때문에 구주가 되는 것이라면 이들도 다 우리의 구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구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능력을 행한 것을 두고 말한다면 성경에 여러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의 엘리사 선지자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을 고치셨는데, 엘리사도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엘리사도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 그러므로 능력만으로 구주가 되는 것이라면, 엘리사도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사를 구주로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 희생하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까? 물론 남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만으로는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남을 위해 대신 죽는 것만으로 구주가 되는 것이라면 세상에는 많은 구주가 존재할 것입니다. 부하들을 위해 수류탄을 온몸으로 덮어 장렬히 산화한 강재구 소령 같은 이도 구주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모시는 상관을 위해 화살과 총탄을 대신 받은 많은 사람들이 구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만으로는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남을 위해 죽는 것은 예수님만 하신 일은 아닙니다. 로마서 5장 7절을 보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하시면서, 타인을 위해 희생적인 죽음을 죽는 사람이 가끔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까? 신비성 때문도 아니요, 말씀을 잘 가르치시기 때문도 아니요, 능력을 행하셨기 때문도 아니요, 남을 위해 죽은 것 때문만도 아니라면, 도대체 예수님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섬깁니까? 왜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하신 것, 그것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신비함을 보여준 세례 요한도 죽었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말씀을 잘 가르친 모세, 이사야, 에스라, 능력을 행한 엘리사, 그리고 남을 위해 장렬하게 죽어간 사람들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음 다음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열어 가신 분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굳게 닫힌 무덤 문이 열렸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 많은 사람들, 마지막에는 오백 여명의 성도들 모두가 있는 곳에서 나타나 보이신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도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부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아멘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이름만이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주는 유일한 이름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는 엄청나게 부흥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하루에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전 미문이란 곳에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 장애인 거지가 있었는데, 예루살렘 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그 자리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장애인을 고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렇게 말하자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온 예루살렘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베드로는 행각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그 날 오천 명이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당황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일단 가두었습니다. 2-3절을 보세요.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의 문중이 모두 모였고, 그 자리에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7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장애인을 고쳤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0절을 함께 읽어 보실까요?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렇게 능력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의 핵심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게 핵심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병든 자, 고통받는 자, 죄로 인해 죽을 자들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라고 묻는다면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 분의 가르침이 좋아서, 그 분은 사랑을 실천하셨으니까, 그 분은 능력이 많으시니까, 그 분은 위대한 성인 중의 한 분이니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은사님이 열심히 믿는 분이라서.....> 이런 대답은 본질적 대답은 못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대답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복음 증거의 핵심은 부활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습니다. 2장 32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공자도, 석가모니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이들도 모두 죽어 무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증거로 빈 무덤을 남기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무덤에는 백골이 남아 있지만, 예수님의 무덤에는 생명의 기운만 충만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이유는 바로 이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를 위한 구원 사역의 완성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우리를 공격하는 적들의 이름을 보세요. 실패, 좌절, 고통, 절망, 슬픔, 열등감, 미움, 시기, 질투, 갈등, 분쟁, 욕망, 편가름, 전쟁, 폭력, 모독, 질병......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의 배후에 이 모든 것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 강력한 마지막 적이 버티고 있는데,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실패와 좌절과 고통과 절망 등이 가져오는 마지막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 뒤에는 사단이 버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이중적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죽을까봐 겁을 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살하기도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 이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믿는 사람들은 정반대입니다. 신실한 성도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이여 오라!>, 이렇게 당당히 외칩니다. 아무리 위협적 상황 아래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그러면서도 신실한 성도는 결코 자살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아무리 큰 실패를 해도, 질병을 앓아도, 결코 자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버팁니다.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의 사람이라면 말기암을 앓으면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암 환자일지라도 그 하루 하루에 감사하면서 생명을 즐깁니다. 그래서 살고 싶은 생각을 빼앗는 적의 공격 앞에서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겁하게 살려고 하지도 않고, 삶을 두려워하여 죽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생명이며, 그 무엇도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초라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이 거느리고 오는 친구들과 함께 삽니다. 그 친구들의 이름은 성공, 용기, 치유, 소망, 거룩한 자존감, 기쁨, 사랑, 포용, 화해, 하나됨, 평화, 존경, 건강 등입니다. 이런 생명의 축복들 맨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 주님은 사단은 물리치고 우리에게 이 축복을 주십니다.  예수님만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생명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이 세상의 유한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병들고 고통받는 한계 상황 안의 생명이 완전한 축복된 생명으로 연결됩니다. 그 양쪽을 붙잡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구주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장차 이 땅의 생명을 다하게 될 때 우리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오직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만 붙들고 우리를 죽음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적과 맞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손님>이란 작품에서 그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춘추암의 과자>를 떠올렸다면,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에 생명과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 분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