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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과 회복과 부흥 (계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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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회복과 부흥 (계 21:1-8)


오늘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은 우리 언양 영신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장의 맥박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우리의 심장은 끊임없이 맥박을 치면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명의 근원인 피를 온 몸에 흘러 보내고 있습니다.  심장이 멎으면 생명이 죽고 맙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기독교 복음에서 마치 심장과 같은 것입니다.  이 심장의 맥박의 힘이 저 구석구석까지 생명의 피를 흘러 보냅니다.  맥박의 힘이 약하면 사람의 생명은 위태로워집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의 심장과 같은 이 부활의 역사는 모든 지친 생명들 속에 새 소망을 줍니다.  새 능력을 줍니다.  새 사람의 역사를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잠자는 모든 믿음을 깨웁니다.  부활의 역사는 시들어진 모든 믿음을 깨우는 기독교 복음의 심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신앙이 약하면 우리는 능력 있는 믿음의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얼마나 비겁자였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그렇게 수많은 기사와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놀라운 이적을 보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못 걷는 사람이 일어나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이 나가는 수많은 기적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패배자였습니다.  겁쟁이였습니다.  배신자였습니다.  슬픈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의 사건은 저들을 용감한 순교자들로 변화시켰습니다.  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패배자, 비겁자, 겁쟁이, 슬픈 자, 배신자들을 모아 하나님의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바로 부활의 능력이 말입니다.  이 부활의 사건이 감격적인 사명의 역사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굶주림과 매맞음과 옥에 갇힘과 갖은 욕설과 형벌과 죽음 앞에서도 변할 줄 모르는 한결같은 주님을 향한 믿음의 제자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골목마다 거리마다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 힘차게 맥박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 속에 강하게 맥박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면 기억하십시오.  비겁자가 변하여 담대한 자가 될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 낙심하던 자가 변하여 다시 소망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타락한 자가 변하여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똑같은 구원의 역사가 오늘 성령으로 역사 하셔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미국의 조지 부시 전대통령의 전기에 보면, 그가 부통령이었을 시절에 구 소련의 브레즈네프 수상이 죽었습니다.  미국을 대표해서 그 장례식에 참여했던 그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례는 아주 완전한 공산당식으로 치루어졌습니다.  모든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회색과 붉음의 색깔들이었습니다.  장례식의 마지막 순서에 그 관에 누워있는 고인을 향한 마지막 인사로 경의를 표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인의 미망인 순서가 되었을 때, 브레즈네프의 부인은 자기가 품에서 준비해 온 백합 하나를 갑자기 꺼내 들었습니다.  이 백합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었습니다.  백합을 관 옆에다 놓으면서 갑자기 이 부인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기도를 드린 후에 일어섭니다.

여러분께서 아시겠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종교는 아편과 같다고 하여 금지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도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산당에서 철저하게 기도가 금지되었던 그 시절에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일어나더니 성호를 그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성호를 긋고 있을 때 여기저기서 몇 사람씩 동시에 함께 성호를 긋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인상 깊은 장면을 조지 부시는 술회하면서 그의 글에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동토의 땅,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이 땅에서 부활의 신앙이 부활하는 모습을 나는 볼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개념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의 중심과 목표가 바로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활 하나를 바라보고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투자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성경은 부활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두 가지 부활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망의 부활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대로 표현하자면, 하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이요, 또 다른 하나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못으로의 부활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사망의 특징은 영원히 죽지 않는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죽지 않고 죽음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곳에서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러한 축복이 없습니다.  꺼지지 않은 불 못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죽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부활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사망의 부활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을 간직하고 사는 믿음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부활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첫째는 회복이고, 둘째는 부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부활 속에는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모든 것들이 회복됩니다.  부활 속에 들어있는 회복의 능력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으로의 회복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모든 죽음이 생명으로 회복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살다가 간혹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야 하는 슬픔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만 하는 슬픔은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슬픔과 절망을 이겨 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바로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날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생명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부활은 모든 죽음을 생명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순간 새 생명으로 회복되어 주 앞에서 영원히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 아름다움으로의 회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모든 깨끗함과 아름다움이 부활을 통하여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살다보면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흉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참으로 추하게 사는 사람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습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날에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모든 얼굴과 삶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아름다움으로의 회복이 생명의 회복 못지 않게 기다려집니다.

셋째, 완전함으로의 회복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은 불완전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늘 불안전하고 그래서 세상에서의 삶은 늘 불안하고 초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러한 우리 인간의 모든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회복시킬 것입니다.  모든 불완전함이 완전함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눈물도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애통도 없습니다.  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부활 속에는 부흥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회복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복만으로도 우리 인생들에게는 큰 위로와 은혜가 되지만 부활은 부흥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복과 부흥은 본시 창조의 원리요 원칙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흥과 성장도 창조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밀 알 하나를 심으면 그것이 30배 60배 100배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소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100배도 훨씬 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원칙과 질서 안에 있으면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그 부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시편 1편에도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하는 일마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매를 맺고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단순히 회복되는데서 그치지 않고 부흥하고 성장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이라는 단어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십시오.  보통 부활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어로 설명되어 집니다. 
Resurrection(부활).  Restoration(회복).  Revival(부흥).

그렇습니다.  부활(resurrection)은 회복(restoration)입니다.  부활은 부흥(revival)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시한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될 것이지만, 그 부활의 능력은 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지금부터 나타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미래에 나타날 어떤 현상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현재를 말합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그렇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우리들에게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바르게, 그리고 온전하게 믿으면 이 땅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으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부활의 능력은 회복과 부흥으로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죽음과 실패는 생명과 성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의 악함과 추함은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모든 삶은 완전하고 안전한 삶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약속한 바와 같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현상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될 줄을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목회가 직업인 사람입니다.  저는 목회의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제가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면 현세와 내세에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틀림없이 목회에 성공할 것이고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는 영적이고 육적인 모든 부흥과 성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목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면 모든 어그러진 것들은 바르게 회복될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죽어 가는 것들은 강하고 생명력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날 줄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된 부활 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들이 경영하시는 모든 일들 위에 이 부활의 능력, 즉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능력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욕심 내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아무리 불완전한 일을 많이 경험해도, 갈등과 상처와 번민과 시련을 경험해도, 그 어느 날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때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는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오늘의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은 좀 괴로워도, 지금은 좀 아파도 힘있게 살 수 있는 삶이 근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왜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부활의 능력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까?

어떤 선교사님이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교회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그때 그 선교사님이 한국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왜 한국 교인들은 교회만 오면 갑자기 우거지상이 돼 가지고 이러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한국 목사님이 딱히 이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 중이라서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선교사님이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한국 교인들은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잊어버렸나요?"
부활하신 것은 잊어버렸나요?  우리는 이 물음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주에 제가 재미있는 유머를 하나 읽었는데, 여러분은 '구기자의 전설'을 아십니까?
한국 남자들이 지금 전부가 다 그냥 무기력해져 있고 다 죽어 있습니다.  그냥.  그것이 왜 그러냐하면, 전부가 한약 한 첩을 잘못 먹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한약의 이름이 구기자입니다.  구기자 먹고 다 구겨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십니까?  구·기·자.
그래서 아내가 너무너무 근심이 되어 가지고 남편에게 무엇 하나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고 나자 남편이 금방 다시 살아났습니다.  무엇을 먹었을까요?  피자.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는 분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옆 사람을 보시면서 한 번 따라서 하십시다.  "피·자."  좀 피자, 이 말입니다.  이제야 깨달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우리 "피자" 한 번 해보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좀 피고 삽시다.  무얼 그렇게 우거지상을 해야만 합니까?  온 세상의 고뇌와 번민을 혼자서 다 짊어지고 사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믿는다면 그 부활의 신앙을 믿는 사람답게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당당하고 넉넉한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덧입기를 원한다면 이 부활의 능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능력과 축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과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은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구원과 부활을 살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식으로도,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권세로도 구원과 부활을 살수는 없습니다.  구원과 부활은 오직 믿음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저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이라고도 하는 천주교입니다.  그들은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함을 강조합니다.  중세시대에 로마 교황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연옥에 가면 그곳에서 약 190만년 이상을 지내야 하는데, 연옥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선행을 행해서 구원받을 힘이 없기 때문에 후손들이 선행을 행하면 조상들의 죄가 탕감이 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연옥에서 짧게 지내고 싶은 사람들은 돈을 바치고 몇 년 정도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후손들이 금화를 헌금함에 넣을 때 댕그랑 소리와 함께 몇 년씩 감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정도 선을 행해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헌금을 드려야 하늘나라가 보장된 것입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더 불안한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인 의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가 죄인 의식에 사로잡혀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된 의식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영원히 구제 불능한 그런 저주와 절망 의식에서부터 벗어나서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모든 사건에서 느끼며 사는 것이 엄청난 부활 신앙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부활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자유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결코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의 부유함으로만 이 부활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이 믿음이 부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가난하며 초라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너무 보잘 것 없고 초라하여 부활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고 참으로 가난한 삶, 구차한 삶을 살아가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 성에 차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집중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적당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답답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 이놈아!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겠냐?"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꼭 공부 잘 못하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전적으로 믿음에 집중하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믿음이 영 시원치 않습니다.  평생을 믿어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혹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야, 이놈아!  그렇게 예수 믿어서 천당 가겠니?"

성경은 우리들에게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저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봉사는 중요한 것이지만 봉사한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예수를 믿는 믿음은 정작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꼭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믿으면 반드시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거나 믿음이 부족하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구원을 얻으면 죽어서도 물론이지만 이 땅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죽음과 실패는 회복될 것입니다.  모든 삶과 일에는 하나님의 부흥의 원칙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사람은 목회에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 구원과 부활의 능력은 가정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에도 나타나고, 교회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놀라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전 뜰만 밟고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부유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일하기를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 생활을 믿음으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장 생활을 믿음으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생활을 믿음으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한 모든 일에 구원과 부활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부요한 자들이 되어 구원과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감동적인 부활절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끝내려고 합니다.
교회학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들이 교회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필립이라는 정서 장애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서 장애자인데도 항상 밝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장애를 겪고 있는데 그런데 성경 말씀만큼은 이 필립이 그렇게도 좋아합니다.

어느 부활절 아침에 교회학교를 하면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부활절을 상징하는 계란 모양으로 만든 플라스틱 박스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다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설명을 한 다음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너희들에게 15분의 시간을 줄테니까 이 부활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들을 넣어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15분여의 시간이 지난 후에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설명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한 아이가 나와서 자기가 가지고 온 플라스틱 계란 박스를 열면서 보니까 거기에는 꽃이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꽃이 생명을 상징합니다.  살아있는 꽃.  선생님과 아이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두 번째 아이가 또 박스를 열었습니다.  그 속에는 아주 아름다운 나비가 나왔습니다.  살아있는 나비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세 번 째 아이가 와서 또 박스를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돋아나는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로 필립 차례가 되었습니다.  정서 장애를 겪고 있었던 이 필립이 앞에 나왔습니다.  학생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 바보 같은 필립이 무엇을 가지고 왔을까?"

필립이 한참을 주저 거리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괜찮아 필립.  뭐 가지고 왔니?  한 번 열어봐."
그러니까 필립이 박스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막 웃으면서 손가락질하면서 "그러면 그렇지, 필립은 아무 것도 못 가지고 왔어."

그런데 필립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쉬!"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잖아요."

순간적인 정적과 감동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잖아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의 부활이 우리의 소망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부활이 구원과 능력 있는 사람의 기초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사셨기에 우리도 살 것입니다.  그가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고 사셨기에 우리도 절망과 어둠을 박차고 새롭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승리를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을 통해서 부활과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증거되고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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