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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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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흔히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12)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는 부활이 없다고 가정할 때 생기게 될 엄청난 결과들을 말함으로써 부활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가르칩니다.

사도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13)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온전한 사람입니다. 만일 사람이 부활하지 못한다면 온전한 사람이신 그분께서도 부활하실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15b, 16절에서도 다시 강조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의 부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에 예언되었습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b). 성도의 부활도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사 26:19a)라고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불신자의 부활 역시 구약에 예언되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두개인들에게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막 12:25)가 있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과 당신님의 예고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죽은 자들도 구약의 예언과 예수님의 예고대로 역사의 한 시점에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한다는 것이 신구약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부활을 부정하는 불신자들조차 부활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구약의 예언도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을 선택적으로 믿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부활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무너지게 됨을 6가지로 보여줍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14a).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여기면서도 부활을 부정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몸의 부활을 부정하고, 어떤 이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단지 부활의 의미만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의 가르침이 합리적이고 학문적으로 탁월해 보일지라도 본문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가르침은 “헛것”입니다. 비록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고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을지라도 그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의 설교 역시 “헛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적인 가르침이나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전제 위에 있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의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게 된 것은 안식 후 첫날에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해서 매 주일에 모였습니다. 교회가 유대인들로만 구성되었던 초기에는 유대인의 관습대로 안식일과 주일을 함께 지켰지만,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됨에 따라 유대인의 관습인 안식일은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고 주일만 남았습니다. 교회가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행위는 매주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예배 자체가 헛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은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고전 11:26) 의미를 가진 예식입니다. “오실 때까지”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전제합니다.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동시에 부활이 함께 고려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성찬 예식도 헛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요일 2:1)로 사역하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부활은 믿지 않고 도덕적인 수양을 위해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 역시 헛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모든 은혜의 방편들이 헛것입니다.

둘째로,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4b). 스스로는 기독교인이라 생각할지라도 헛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 얻는 믿음을 부활을 믿는 일과 연관시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구원 얻은 성도라면 그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이 마음에 믿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15). 가룟 유다가 죽은 후 12사도단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맛디아를 뽑을 때, 베드로는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2)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하심”을 그들이 증거 할 내용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교하기까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들이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성경의 핵심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죽기까지 거짓말을 고집한 지독한 거짓말쟁이들의 증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증언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증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것이 거짓에 놀아나는 일이 됩니다.

넷째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7).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 하셨습니다(마 20:28).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그분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인지, 그분의 죽음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에 따라 자기 죗값을 지불한 한 인간의 죽음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에 갇혀계신 분이라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구주로 믿을 수가 있을까요? 그분의 죽음과 함께 그분을 생명의 구주로 믿었던 믿음은 헛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조차 해결하지 못한 죄는 여전히 성도들에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이 단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이시면서도 동시에 신성을 가지신 온전한 하나님이셨기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실 수 있으셨지요. 많은 사람을 대속하려 하셨던 그분께 사망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그분께서 죄의 삯을 다 치르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는 자들의 죄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다섯째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8).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지 못하셨다면 그분 안에서 죽은 자들도 사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을 맛볼 수 없는 영원한 멸망만 있겠지요. 사망이 영원히 왕 노릇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망이 생명을 이긴 것이며 지옥이 천국을 이긴 것입니다. 생명의 주께서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단에게 지신 것이지요. 부활이 없다는 주장은 참으로 사단적인 이론입니다.

여섯째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19).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최초의 핍박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행 4:2)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는 핍박 중에도 부활의 도를 전했는데,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히 11:35). 스데반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들은 너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성도의 소망이 이 땅뿐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졌던 사람일수록 불쌍한 사람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좁은 길로 걷기 위해 외로움과 힘겨움을 참고 견디며 싸웠던 사람들일수록 더욱 불쌍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자랑했던 사도 바울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입니다(31). 말씀을 적당히 믿고 사는 사람, 자기의 유익에 따라 말씀을 따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겠지요.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완전히 전복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이제”(20a)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금까지의 모든 가정은 역전됩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헛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진리입니다. 그들이 증언한 구주를 믿는 우리의 믿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분을 믿는 성도의 죄는 온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됩니다(계 14:13). 성도는 부활을 소망하기에 이 땅에서 어떤 모진 슬픔과 아픔과 고난을 겪을지라도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부활이 있기에 그분을 위해 고난 받음을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마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활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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