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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와 몸의 부활을 전하라 (욥 14:12-14, 행 17: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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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몸의 부활을 전하라 (욥 14:12-14, 행 17:16-18)


오래 전부터 러시아정교회의 전통에는 부활절 다음날에는 사람들끼리 유머를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활절은 정말 웃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웃으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비웃으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승리에 찬 웃음의 날입니다. 사탄에게는 한없는 비통함으로 통곡하는 날이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무덤이 빈 날입니다. 세상에는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모하멧의 무덤은 찬란하고 대단하다고 합니다. 죽은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시체를 잘 보관하여 참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레닌, 모택동, 호치민, 김일성이 그런 경우입니다.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무덤이 빈 것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아닌 생명의 종교이며,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무덤도 요란하거나 너무 호화로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적으로 부활에 반대하는 여러 이론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허위설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허위 즉 거짓말을 유포하여 만든 이야기라는 설입니다. 둘째는 무덤 오인설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잘 못 찾아가서 원래 빈 무덤에 가서 빈 것을 보고 부활했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절설이라고 하여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설입니다. 넷째는 환상설이라고 하여 실재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너무 예수님을 그리워한 나머지 환상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신비설이라고 하여 바빌론 신화를 적용하여 신비한 하나의 사건이지 실재로 부활한 것은 아니라는 설입니다. 그런데 부활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만 봐도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놀드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입증된 사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웨스트코트라는 교수는 저서 ‘부활의 복음’(The Gospel of the Resurrection)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만큼 여러 가지로 더 좋게 더 많이 지지를 받았던 단일한 역사적 사건은 없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말해도 상관없다”고 하였습니다. 칼 바르트는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확실한 사건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말씀이 204회나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7-19에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라고 합니다. 부활을 모르는 삶을 사는 이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어느 재벌 총수는 역사상 주식 배당금이 최고액인 1천억 원 이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그의 삶이 이생뿐이면 불쌍한 자입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예수님의 복음서를 설명합니다. 복음서도 부활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모습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몸의 부활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18절에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고 합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전하는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셨다”. 이 한 마디가 예수님의 신성, 말씀의 신뢰성, 구주성이 확실하게 증명되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부활을 목격한 자입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아주 확실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헬라 아테네의 재판정이며 토론장인 아레오바고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함께 변론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의 철학적 식견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쟁론하였다는 것은 바울이 상당한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직업적 철학자들이 준비를 갖추고 논쟁에 참여할 목적으로 광장이나 거리에 항상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논쟁 전문가들과 바울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바울을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새로운 신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한 이방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아나스타시스)을 예수란 신의 배우자 여신으로 잘못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나 부활은 생소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아나스타시스’라는 이 명사는 다른 죽은 자들의 일어남에 대하여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는 영원한 부활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 외에 어떤 사람도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일반인들의 다시 살아난 사건에는 다시 ‘살아남’(rising)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살아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마태복음 16:21에는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삼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 후에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오랜 후가 아니라 사흘 후에 다시 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을 당시인 누구나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5:4에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일러주신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났다는 단어 ‘에게르타이’는 현재완료형으로 현재도 살아나시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욥기 14:14에는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의문은 욥 이래 끊임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활의 확실성을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도 여러 번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활이 401회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책입니다. 부활은 무덤이 비었다는 말입니다. 빈 무덤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그렇게 인사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종교가 신앙의 대상이 있습니다. 불교는 대상이 석가입니다. 그는 80세에 죽었습니다. 유교는 대상이 공자입니다. 그는 73세에 죽었습니다. 이슬람교는 대상이 마호멧입니다. 그는 63세에 죽었습니다. 기독교는 대상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세계의 엄청한 왕릉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예 사람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없기에 가장 많이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그냥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는데 강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게바에게 보이셨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고,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고, 마지막에는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한 두 사람이 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보았습니다. 본 사람들이 ‘나는 봤다’라며 본 것을 얘기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남이 보았다는 것보다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욥도 희미하데 귀로 듣다가 ‘눈으로 주를 봅니다’라고 확실하게 증거하였습니다. 눈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에티오피아 속담에 “제 눈 보다 나은 목격자는 없다. 직접 보기 전에는 누구도 미리 판단하지 말라”고 사도행전 4:20에는 유대 관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절대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확실하게 봤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부활을r 전했다고 하는 것은 부활을 빼놓고 예수를 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 몸의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참 의미 있는 말입니다. 부활은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몸으로 부활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육체는 “비록 다르지만 동일하고 비록 동일하지만 다른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지만 그 육체가 새로운 영적 육체로 변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또 다른 특징은 부활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누가복음 24:39에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라보았고 예수님은 갑자기 그들 곁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방안에 있던 제자들 가운데 문이 닫혀 있었는데도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보고 있지만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몸입니다. 영적 몸으로 변한 영체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변화될 몸을 말합니다. 
  
‘성육신’(incarnation)은 라틴어로 살을 입으셨다는 말입니다. 육체적 살을 뜻하는 ‘카르누스’(carnus)에서 온 말입니다. 성육신은 육신이 되었다(in-carnus)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육체적인 살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오실 때 육신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실 때 육체를 다시 가지지 못하시겠습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의 디베랴 바닷가에서의 대화를 보세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고기가 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조반을 먹은 후에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다짐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육적인 부활이었음을 증명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고기를 다 드시고, 다 소화시키고 베드로와 대화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적 부활이었음을 증명하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부활한 영체도 먹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에도 열두 가지 열매가 매 달 열려 있습니다. 이 열매들은 하나님의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먹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이 나라에서는 살기 위해 먹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먹는 즐거움으로 잔치로 먹는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4:2에는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면 육체로 부활하신 것도 시인할 것입니다. 요한이서 7절에는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는 것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라고 합니다. 육체로 오심 부인하는 자는 육체의 부활을 부인할 것이고 육체의 재림을 부인할 것입니다. 육적인 부활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은 우리의 육체의 부활의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훗날에 육체로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살 것입니다. 
  
지난번에 A380이라는 현재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기를 타 보았습니다. 500명이 타는 비행기인데 정말 큽니다.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큰 비행기를 작은 예인차가 끌고 다닙니다. 항구의 큰 컨테이너선도 작은 예인선이 부두로 끌고 옵니다. 아무리 커도 작은 것이 끌고 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커도 시동을 걸지 않고 동력이 없으면 동력이 있는 작은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명이 없으면 아무리 크고, 많고, 높아도 아무 힘이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있고, 내세의 생명이 있어야 참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산다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부활은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축복입니다. 고양이는 7층보다 10층에서 떨어졌을 때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다고 합니다. 매우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사뿐히 내려앉지만 제 스스로 뛰어내리는 게 아니라면 고양이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으면 삽니다. 자신이 죽은 것을 알면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죽은 것을 모르면 영원히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우리 부활의 증거입니다. 부활은 천국에서 열매를 거두는 일입니다. 부활은 다시 새로운 육체로 사는 즐거움입니다. 
  
에마뉴엘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유산’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27년간 영계를 왕래한 신비주의자입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육체적 삶을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보니 세상을 떠난 사람이 가장 젊고 예쁜 시절로 변하여 있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았더라도 장애가 없이 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부활의 소망은 성경 가르치는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영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의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 보면 사후의 육체적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증언을 통하여 많은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소망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루프스 모셀리는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장례식을 집례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만이 그의 소유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스스로 사셨고 또 살리시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우리 신앙의 뿌리입니다. 매일 다시 소생하는 소망의 뿌리가 우리가 전해야 할 제목입니다. 
  
요한계시록 2:8에는 서머나교회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말씀합니다. 지금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가 평안하냐?” “성령을 받으라”.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전하라”. 
  
십자가는 부활의 전제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전제입니다.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 삶을 큰 소리로 외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몸의 부활을 소망이 없는 세상에 크게 외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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