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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소망 (빌 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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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소망 (빌 3:10-11)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가 이 날을 소중히 알고 기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단지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닙니다. 부활절을 지나간 옛 사건을 기념하듯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은 위대하지만 지나간 옛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과 함께 복음의 핵심이며, 지금도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64장 6절에 이르기를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양을 하고 고행을 하고 도를 깨치고 자선을 많이 하면 될까요? 

찬송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이 찬송가는 인간의 그 어떠한 노력도 구원을 받는 데 아무 소용이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이 찬송가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영적으로 볼 때, 자연인은 누구나 죄와 허물로 그 영이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전혀 관심이 없고, 자나 깨나 이 땅의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연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므로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곧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이 거듭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적으로 살아난 것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하는 방법입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2장 12절에 이르기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받은 물세례의 의미를 설명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우리 몸을 잠근 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장사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온 것은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 사함 받는다는 말도 거짓말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간다는 말도 다 믿을 수 없는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고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처럼 훌륭한 인류의 스승 중 한 분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을 참으로 믿고 일생을 바쳐 믿는 것이니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7-9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뿐 아니라 주의 부활도 함께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장사 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어 장사되었을 때, 주님의 제자들은 다 겁에 질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대적들에게 붙잡히시던 그 날 밤에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던 자들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께서 죽고 없는 마당에 무슨 용기로 거리에 나가 예수를 믿으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방안에 칩거하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려고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무덤을 막아놓았던 큰 돌문이 열려 있고 흰 옷 입은 천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갔고,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시신을 감쌌던 천이 단정하게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 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마침 그 때 도마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마가 돌아왔을 때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하자,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도마가 대답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따르는 여러분은 복이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에서 부활한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증거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확실한 토대 위에 세운 집과 같이 요지부동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성경에 약속하신 복되고 영광스러운 모든 약속이 실현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어떠한 시련과 핍박과 유혹이 다가올지라도 너끈히 이겨내고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언젠가 조용목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런 경험담을 들려주셨습니다.

1970년 초에 쌍계동은 서울의 변두리로서 빈민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곳에 사는 구역장 한 분이 찾아와서 급히 심방할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지금 전도하고 있는 이웃 집 여자인데, 그 집에 살림 밑천으로 기르는 송아지가 한 마리 있는데 그만 설사병에 걸려 다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이 구역장님이 우리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송아지가 낫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그 구역장님의 열성을 보아서 함께 갔다고 합니다. 난생 처음으로 병든 송아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예수 이름으로 병이 물러가고 건강할지어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같이 송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 후로부터 그 여자가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올 때마다 조 목사님을 찾아와서 머리를 들이밀어 안수를 받고 갔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는데, 그 여자가 기도를 받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 여자를 전도한 구역장님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구역장님, 그 초신자 분이 요즘 기도 받으러 오지 않는데,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겠지요?” 그러자 그 구역장님이 대답하기를 “아이고, 목사님, 그 초신자는 벌써 교회를 그만 두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얼마 전에 그 송아지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 목사님께서 그 구역장님과 함께 그 여자의 집을 심방했습니다. 그 여자는 조 목사님을 보자 획 돌아섰습니다. “자매님, 어째서 교회에 나오시질 않나요?” 그러자 그 여자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기를 “송아지가 죽었는데 교회는 무슨 교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 목사님께서 그런 식의 신앙을 일컬어 “송아지 신앙”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은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다른 조건이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부하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약하든, 형통하든 역경을 만났든 변함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수가 있습니다.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 아멘!


두 번째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삶속에서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그를 믿는 자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부활은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차원을 뛰어 넘어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무참히 죽으셨을 때, 그들은 두려워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뵌 후로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어 지내지 않았으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당에 인간들을 두려워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으나 여전히 성령 안에서 사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부활의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습니다. 베드로가 나가서 전하자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에만도 수천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디 사울이라고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증오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 사건의 증인 노릇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에게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해서 옥에 넘기는 권한을 위임받아 집집마다 다니면서 기독교인들을 잡아 매질하고 옥에 넘겼습니다. 그 후에는 멀리 이방도시인 다메섹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을 잡아오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정오쯤 되었는데, 갑자기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그와 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모두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엎드러져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날 그 시간에,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날 이후로 핍박자가 나사렛 예수를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순교의 제단에 자기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성도님들의 삶속에도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결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죽음을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시험이 다가왔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도전에 직면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만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고난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고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절망을 이기고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 자신의 지혜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했습니다. 승천하시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부활의 주님을 믿고 나아감으로 언제나 이 같은 능력을 삶 속에서 경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근거이고 보증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르기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잠자는 성도들을 대표해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열매가 있다는 것은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햇실과를 먹으면서 머지않아 많은 실과를 거두게 될 것을 압니다. 우리는 첫 곡식으로 된 밥을 지어 먹으면서 곧 이어 대대적인 추수가 이루어질 것을 압니다. 그런 점에서, 첫 실과와 첫 곡식은 모든 실과와 모든 곡식의 수확을 예고하는 신호탄과도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첫 열매이고 첫 곡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성도들도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일컬어 부활장이라고 하는데, 거기 보면 성도들의 부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 이르기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강림하시는 그 날에,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다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살아있던 성도들은 홀연히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요? 빌립보서 3장 21절에 이르기를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영광의 몸의 형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젊고 아름답고 생명이 충만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부활의 몸은 병들어 아프거나 피곤해 지거나 노쇠해 지거나 죽지 않는 몸입니다. 

물리적인 장벽에 구애를 받지 않는 시공을 초월하는 몸입니다. 음식을 을 수도 있지만, 먹지 않아도 무방한 몸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을 지니고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천사들도 우리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는 항상 부활의 그 날을 소망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붙잡고 나아가는 성도들은 어떤 시련 앞에서도 실족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고 장차 부활에 참예할 것을 믿을 때 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으며, 강림하시는 주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 주의 일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부활절을 맞이하여 성도님들의 심령 속에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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