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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네 번의 부활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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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부활 (마 28:1-10)
 
 
1. 부활을 믿는가?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 기독교인들의 最大 名節이자 가장 즐거운 祝祭日인 復活節입니다! 올해도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불교 사찰이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달아줄 정도이니, 오늘이 信 不信을 막론하고 특별한 날인 것이 분명하지요? 그렇지만 궁금한 것은 ‘과연 그들이 부활절을 제대로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다 아는 부활절, 심지어 타 종교인들까지 축하해주는 부활절, 과연 그들은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세상이나 다른 종교가 부활을 바로 알기는 바라는 것, 물론 그렇게 되면 정말 좋지요! 또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사실 썩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 기대해야하는 것은 기독교 안에 있으면서도 부활을 의심하거나, 부활을 이상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무리들이 부활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자료를 보았습니다. 그 자료는 ‘예수님이 틀림없이 부활하셨으나 그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단지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줄 알았다는 것,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과 그 긴 시간 동안 동행하면서도 못 알아본 것 등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돌아가시기 전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변화 산에서 변모하신 것과 같거나, 어쩌면 그 이상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못 알아본 것이지, 영으로 부활하셔서 못 알아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부활을 사실 그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 뿐입니까? 부활을 믿는다면서도 삶 속에서 그 부활 신앙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이 날,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의 확실성과 성도의 삶에서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2. 예수 부활!

먼저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성경의 몇 증거를 통하여 부활의 확실성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은 그 빈 무덤이 증명해줍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빈 무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 속에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혹자는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숫자가 겨우 십여 명뿐인 제자들은 대개가 어부 출신으로 非武裝이었고, 예수님의 체포와 함께 수배 중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로마 군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무덤으로 가서, 총독의 도장을 찍어 붙인 금단의 종이를 뜯어내고, 그 큰 돌문을 옮긴 후, 시신을 꺼내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약하기 짝이 없는 그들이 로마 경비병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 못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도 무덤 입구가 열린 채 시신이 사라졌으며,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조차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고 보고한 것을 보면(마28:11~15),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까지 열세 번 이상 제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신 사실들이 증명합니다. 부활의 첫 새벽,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4~8).”고 증언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500여 명이 함께 보기도 했으며, 그 목격자들의 태반이나 바울이 성경을 기록 당시까지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그들의 말을 옮긴 바울의 기록을 어떻게 부인하겠습니까? 

3) 세 번째로 사도들의 변화된 모습이 주님의 부활을 증명해줍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체포되자 다 도망쳤습니다. 죽는 데까지도 함께 가겠다던 베드로는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 겁쟁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또 그 약속대로 성령을 받자(행2:1~2)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주님의 부활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행2장).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온갖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등 주님이 하시던 일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 최고의 권력자인 대제사장 앞에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행4:12).”고 당당히 외쳤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이 그 분의 부활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듭니다. 

4) 끝으로, 박해자로 가장 악명 높았던 사울이 가장 열렬한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 놀라운 변화가 주님의 부활을 확증해줍니다. 그는 유대 名文家 태생으로 로마 市民權을 가졌으며, 學識이 탁월하고, 政治的인 감각도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흩어진 신자들의 일부가 다메섹에서도 예수를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그들을 체포하러 가던 도중,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천둥소리 같은 큰 소리와 함께 강한 빛을 받아 눈이 멀어버린 사울은 땅에 꼬꾸라져서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너는 이제 이방인들을 위해 나를 전할 내 그릇이 되어라.” 이 말씀을 듣고 일행에 이끌려 다메섹에 도착한 사울은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를 만나 기도를 받고 사흘 만에 눈이 다시 밝아지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신자들을 포함한 유대인 회중 앞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부활하셨다!”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행9장). 그 후 이름을 바울로 바꾼 그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실신하기도 하고, 여러 번 죽을 만큼 채찍과 태장을 맞았으며, 航海하다가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고, 同族들과 異邦人들의 죽이려는 위협과 굶주림과 추위와 싸웠고, 여러 번 옥에 갇히는 등 온갖 고난을 겪으며(고후11:23~28) 평생토록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 한 로마서를 비롯하여, 고린도전후서, 목회서신인 디모데 전후서, 그리고 여러 권의 옥중서신 등 13권 이상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 박해자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사도 바울이 되어 복음 전파에 평생을 바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줍니다. 이 정도의 증인과 증거 자료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을 불신의 사람일 것입니다.

3. 나의 부활(벧전 1:1~3)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의 자신의 부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저와 여러분의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기를 원치 않지만,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다가오는 것이 죽음이지요. 그리고 이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요, 영원한 죄인의 流刑地인 지옥에서 살게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며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덤 문, 곧 죽음의 문을 여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사망의 존재가 생명의 존재로 바뀔 수 있는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을까요? 그의 죽음으로 죄는 용서받았으나 여전히 죄인의 상태로, 즉 죄의 저주와 그 질긴 사슬로부터 자유하지 못하여 여전히 매여 있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짊어지게 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하신 놀라운 은혜를 이루셨습니다. 즉 영원한 죽음에 처한 우리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것이죠.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요?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을 면하는 길이 열린 것이고,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 얻게 되고, 죽음과 상관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2:1~5).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살아남”, 즉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이 또 하나의 부활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것이 우리의 부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

이러한 주님의 부활은 현재 여러분의 삶에서도 진행 중임을 알고 계십니까?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3~7).” 라고 합니다. 

1) 베드로전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에는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로마 시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 일은 네로 황제가 로마를 리모델링한다는 명목으로 불을 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안 시민들이 황제를 향하여 원망의 소리를 높이자 네로는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난의 화살을 다른 데로 돌릴 곳을 찾다가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책임을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의 분노는 기독교인들에게로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어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사나운 맹수들과 싸우도록 던져져 온 몸이 찢겨져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어떤 이는 네로의 궁전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인 채 기름을 뒤집어쓰고 불이 붙여져 밤새 네로의 정원을 밝히며 타죽었습니다. 이런 혹독한 박해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숨을 곳을 찾아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산으로 가서 동굴을 파고 숨었고, 어떤 이는 들에서 양 가죽을 입고 짐승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성도들은 이 지독한 핍박을 잘 이겨냈습니다. 어떻게요?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의 “산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이란 ‘살아 있는 희망’, ‘살게 하는 희망’, ‘현실의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실제적임 힘’이라는 말입니다. 

우선 베드로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큰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지금까지 절망과 낙심에 눌려 있었는데, 불안하고 두려워서 어쩔 줄 몰랐는데,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여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주님을 만남으로 평안함이 넘쳐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두려움이 사라졌으며 용기가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소망이 생기고 마음에 행복이 넘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沈鬱하게 復活節을 맞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絶望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疾病입니까? 사업의 失敗입니까? 失職입니까? 가난입니까? 알 수 없는 危機感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여러분을 덮어 누르는 모든 어둡고 무거운 것들이 다 밀려나고 온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불행과 절망에서 건져 주시고 참 소망을 주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2) 또한 부활의 주님은 성도에게 확실한 유업을 허락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업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정에서 버림받고, 포도원을 비롯한 부동산도 살던 집도 다 빼앗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족과 생이별하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사람들이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도들은 그 와중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곧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해 놓으신 기업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도 이런 기업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흔들 수 없고, 부도날 염려가 전혀 없으며, 빼앗길 염려가 없습니다. 그 기업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된 여러분의 수고와 비례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하신 상급과도 관련된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는 장차 얻을 유업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부활의 주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 시험을 복의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비록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땅을 살면서 여러 종류의 시험을 만납니다. 사람들에게 받는 상처, 물질적인 어려움, 육체적인 질병, 그 외 여러 종류의 위기를 만납니다. 그럴 때면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잠간 근심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무서운 고통과 시련을 당하셨으나 오히려 그 시련을 부활의 기회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난과 시련은 사망의 권세와 싸워 승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을 완성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도 고난 앞에서 움츠리거나 위축되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은 더 크고 놀라운 축복과 승리를 얻기 위한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고난을 복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은 죽음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긴 신앙은 모든 것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에 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고, 무슨 일을 만나도 소망을 잃지 않으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부활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5. 장차의 부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부활,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이 저와 여러분 앞에 남아있습니다. 장차 주님 오시는 날, 모든 성도들이 몸까지 부활하는 부활의 최종적인 사건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서울의 제법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이 자신에게 있었던 혹독한 시련을 책에 소개했습니다.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여 학교 학회장을 하면서 MT 장소를 답사하러 강원도 홍천에 있는 홍천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잠깐 수영한다고 들어갔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익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더니, 어스름한 저녁 시간 아들은 강가에 뉘어져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보니까, 아들의 몸은 상한 데 없이 아주 깨끗했으며 눈을 다 감지 못하고 반쯤 뜨여져 있었습니다. 아들의 눈을 감겨 준 후, 죽은 아들의 볼에 얼굴을 대고 목사님은 한참을 울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원망하듯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타는 듯 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자식이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어디 한 둘 입니까? 그러나 성도는 이러한 죽음의 아픔과 상처를 이깁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라” 하신 주님의 부활의 약속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것처럼,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그 뼈들에 힘줄이 생기고, 그 위에 살이 덧입혀지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에 대해 고린도전서 15장 35절부터 49절은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부활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42b). 부활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43a). 부활은 강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43b). 부활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44).

성도 여러분,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얼마나 절망적이겠습니까? 죽은 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우리를 비롯한 모든 믿는 자의 무리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6. 부활신앙으로 살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처럼 완전한 부활, 영광스럽고 영화롭게 되는 날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경험하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즐겁게, 그리고 당당하게 현실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과 억압에서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 신앙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은 미래에 대하여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살게 합니다. 

비록 내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 또 하나님께서 나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삶의 목적과 방향과 태도가 달라야 합니다. 이 땅이 아니라 천국, 지금이 아니라 장차, 육신이 아니라 영적인 가치, 그리고 인간적인 가치나 세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을 체험하며, 장차 영원한 부활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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