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마 28:1-10)

첨부 1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마 28:1-10)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에 의한 신앙입니다. 그것도 아름답게 꽃이 피고 실록이 돋는 4월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찬란한 달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이 그의 서사시인 황무지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시를 한 구절을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주었다. 

그는 잠자던 만물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활발하게 약동하는 생명과 부활의 계절인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명을 표현할 수 없는 황무지와 같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황무지란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입니다.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경험했던 시대였습니다. 생명이 깃들 수 없었던 전쟁의 참화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죽음이 삶의 유일한 소망처럼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라며 시대를 역설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아프게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와 절망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절망조차 의식하지 못한 현대인의 황폐한 정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역설적으로 설명합니다. 생명을 경험하기에는 죽음이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죽음이 단절되는 생명의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단절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외치면서 오히려 추운 겨울이 더 따뜻했다고 반어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해방 이후의 역사 속에서 4월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격변의 달이었습니다. 우리는 51년 전에 일어났던 4.19 학생 혁명사건을 기억합니다. 독재정권의 저항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선언했고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젊은 학생들의 피의 외침이 바로 4.19 학생 혁명입니다. 아니, 그렇게 멀리 과거로 가지 않아도 우리는 작년 3월에 백령도 천안함 폭파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46명의 젊은 해군장병들이 전사하는 슬프고 안타까운 사건을 우리는 목도했습니다. 온 국민들이 애통해했습니다. 정부가 작년 4월 25일부터 29일까지를 국가 애도기간으로 설정하면서 죽은 장병들의 장례식을 거행했던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말하기 전에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부활절도 4월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원래 부활절을 정할 때는 춘분을 지나서 만월을 지난 첫 번째 주일을 부활절로 지킵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이 4월에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 우리는 사순절을 지냅니다. 40일 동안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려놓습니다. 부활절 전 일주일 동안은 수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지시고 고난의 길을 가셨던 것을 묵상하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가 지난 주일에 하루 한 끼씩 금식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해보라는 권유였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일주일에 1번 하셨습니까? 아니면 6번 다 하셨습니까? 제가 왜 금식을 하라고 말씀드렸을까요? 금식하면 제일 먼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깨닫는 분들은 영적으로 굉장히 탁월한 분들입니다. 금식하면 제일 먼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배고픈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육체가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때론 배가 아프기까지 합니다. 이 금식이란 작은 고난입니다. 작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얼마나 힘들고 아프셨는지, 인간의 모든 죄악과 허물과 질병을 대신 지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건이었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생명을 말하기 전에 먼저 죽음을 말합니다. 치유를 말하기 전에 질병을 말합니다. 용서를 말하기 전에 죄악을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와 치유와 생명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얼마나 큰 은혜의 사건인지를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그 생명의 아기를 보았을 때 얼마나 가슴으로부터 노래를 부르고 기뻐합니까? 

저는 며칠 전에 남산을 다녀왔습니다.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그동안은 황토색, 때로는 회색빛에 죽어있는 남산처럼 보였는데 연두색의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돋아나는 것을 보니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참 감사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렇게 멋있는 것이군요. 내가 이런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내가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내가 생명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며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봄을 다시 예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명이란 값진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총의 사건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기 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면서 생명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느끼면서 가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죽었다는 죽음의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마음껏 울지 못했습니다. 숨을 죽이면서 흐느꼈습니다. 자기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해서 비명을 지르는 기도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숙여지고 죽음으로 떠나간 것을 보면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겪는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무서운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설 때 당당할 자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쏘는 것입니다. 아픈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통곡합니다. 다시 만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대화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사랑할 수 없게 인생의 저편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가슴은 메어집니다. 이 여인들도 그랬습니다. 1절의 말씀은 여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태복음 28:1) 

남자 제자들은 어디에 가있었는지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마 허탈해진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 신뢰하던 힘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면서 그들은 무력감에 빠진 것 같습니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니,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여자 제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랑의 깊은 기억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때문에 아파합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마음은 쓰라린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이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다가 향료를 붓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과 무덤이 그를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난 아픔을 겪은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얼마나 안타까웠습니까?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아팠습니까? 얼마나 보고 싶었습니까? 얼마나 함께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슬퍼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만이 무덤에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기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태복음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덤에 찾아왔지만 이제는 무덤에서부터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무덤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덤이 예수님을 가둘 수 없고 죽음이 예수님을 묶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예수님에 대한 슬픔으로부터 그들을 끄집어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살림을 예찬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거절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고 세상을 향해서 선포하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아. 나는 여기 무덤에 없다. 살아있는 나를 무덤 속에서 찾지 말라. 이제는 무덤을 너무 오래 응시하지 말라. 이제는 죽음을 너무 응시하지 말라. 이제는 슬픔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지 말고 거기서부터 벗어나라!”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생명을 향해서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떠났을 때 아파하고 슬퍼했지만 거기에 너무 오랫동안 연연하고 애통해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보내드린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거라사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거처를 무덤 옆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중턱에 있는 무덤에서 해가 뜨면 산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가 무덤 옆에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어둠이었고 죽음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처음부터 그런 귀신들린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정체성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의 인생에 사랑의 단절을 깊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 단절 속에서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어둠을 생각했습니다. 슬픔에 머물렀습니다. 애통하는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어둠의 세력이 다가 옵니다. 그때 사탄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밝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밝은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이 밝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생명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무덤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신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의 어떠한 고통 속에 있을 지라도 다시 그 자리에서부터 일어서서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마태복음 28:7) 

무덤에서 빨리 세상을 향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갈릴리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했던 장소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확인했던 장소가 갈릴리였습니다. 그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갈릴리란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과도 똑같습니다. 죄악과 불의가 만연되어 있는 곳, 비겁함과 게으름이 도사리고 있는 곳, 그리고 두려움과 무서움이 우리를 협박하고 있는 장소, 바로 그곳이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인 갈릴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먼저 가겠다는 것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에 내가 생명으로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신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한걸음 먼저 앞서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의 인생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어주시는 것이라고 확인되면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사는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갈릴리란 어디일까요?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직장입니다. 오늘도 아옹다옹하면서 다투고 있는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쁨의 사명을 가지고 사십시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마태복음 28:8)

여기 보면 빨리 무덤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무덤이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네가 떠나라. 이제는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어라. 여인들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할 말이 생겼습니다. 큰 기쁨으로 마음에서부터 용솟아 오르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방인이었던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별을 보면서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맨 마지막인 28장에서도 여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천사의 말을 듣고 기뻐하고 또 기뻐했다고 기록하며 끝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명에 대한 약속과 믿음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슬픔과 어두움,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무덤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삶의 현장인 갈릴리를 향해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더불어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