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부활과 생명의 예수 (요 11:17-27)

첨부 1


부활과 생명의 예수 (요 11:17-2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쫘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11:17~27)


남해 거제의 외도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환상의 섬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이 섬에 쓰여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그리워하는 우리를 여기에 남겨 주시고
그리움의 저 편으로 가신 당신이지만
우리는 당신을 임이라고 부르렵니다.
우리 모두가 가야할 길이지만
나와 함께 가자는 말씀도 없이 
왜 그리도 급히 떠나셨습니까

임께서는 가파른 외도에 
땀을 쏟아 거름이 되게 하시었고
애정을 심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지게 하셨으며
거치른 숨길을 바람에 섞으시며
풀잎에도 꽃잎에도 기도하셨습니다.
더 하고픈 말씀은 
침묵 속에 남겨 두시고
주님의 품으로 가셨으니
임은 울지 않는데도 우리는 울고 있고
임은 아파하지 않는데 우리는 아파하며
임의 뒷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임이시여, 이 창호씨여
임께서 못다하신 일들은 
우리들이 할 것으로 믿으시고
주님의 품에 고이 잠드소서
이제 모든 걱정을 뒤로 하신 임이시여
임은 내 곁에 오실 수 없어도
내가 그대 곁으로 가는 일이 남아 있으니
나와 함께 쉬게 될 그 날까지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주 안에서 편히 쉬세요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낸 아내의 참으로 애절한 시입니다. 이 시는 애절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부활의 신앙으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넉넉하게 이기고 있는 믿음의 시입니다. 

죽음은 우리 모든 인간의 최대의 적입니다. 큰 소리치고 잘난 척 해봐야 죽음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누리는 사람같이 보여도 이 죽음 앞에서는 큰 소리 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먼저 떠나도 자기의 죽음을 평안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만 하면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나중에 떠나도 먼저 가는 사람을 평안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고 권세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두렵고 불안하지만 믿음이 있을 때는 불안도 두려움도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 속에 죽음과 사망을 이기신 우리 주님의 권세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실 곳이 어딜 가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친히 누가복음 9장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가슴을 느낄 수 있습니까? 어느 시대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도록 만드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은 누릴 것이 있어도 누리지 않고, 자기가 누릴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이 다 그렇습니다만 특별히 오늘은 옛날 구 이스라엘 아합 왕 때의 엘리사 선지자를 기억하게 됩니다. 기적이란 기적은 전부 다 행한 것 같은 엘리사, 그러나 편히 쉴 데가 없었습니다. 그 엘리사는 심지어는 제대로 잡수지도 못했던 것 같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그렇습니다. 희한하게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하시는 일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 종들을 섬기는 사람을 보내 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먹을 것도 주시고 평안한 것도 주시고 좋은 것도 많이 주시면서 일을 시키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일하시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에게 종의 일만 잘하면 먹을 것은 내가 챙겨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이 스스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느 덧 너는 더 이상 내 종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일들이 성경에서 상당히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쉴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수넴 여인을 엘레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왕하4: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이것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종의 일의 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계속해서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레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 갔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엘리사에게 수넴 여인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도 그렇게 한 집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다니의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 틈틈이 예루살렘에 가셨는데 가실 때마다 다른 데 가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항상 이 집에 가셨습니다.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가셔서 그 곳에서 쉬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유명하고 대단한 선지자 랍비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대접한 사람들이나 쉴 곳이 있다고 모실 분이 없었겠습니까? 틀림없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에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종들을 모시는 것은 영광이었고 자기 자신의 의무처럼 생각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모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근처에 있는 베다니의 이 집에 들어가셨을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을 쉬게 하는 것은 장소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든 저 하나님의 종을 좀 쉬시게 하고 챙겨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사람을 쉬게 하고 음식을 드시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가고 정도 가고 몸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음식만 대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이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다보니 겉으로만 볼 때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분에게 음식만 대접해서는 될 일이 아니며 이렇게 해서는 저 어른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상의하는데 성경은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청하건데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왕하4:9~10)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담위란 옥상 즉 옥탑방을 말합니다. 남편도 이것을 받아들여 엘리사가 그 집에서 잘 쉬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종을 사랑했던 그 수넴 여인의 집과 가정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먹을 것만 준 것이 아니고 그냥 쉴 곳만 드린 것이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그 하나님의 종을 사랑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 정말로 기적 중의 기적을 여러 가지 선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마음에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왕이 업적을 하나 남기고 싶어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큰 교회를 하나 지으려고 나라의 최고의 설계사를 시켜 설계한 후 교회를 지었습니다. 예배당 짓는 모든 돈도 자기 혼자 다 내어 아주 훌륭하게 잘 지었습니다. 마지막에 교회 앞에 대리석을 하나 준비하여 거기에 자기 이름을 쓴 후 그 판을 붙였습니다. 그날 밤에 왕의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서 자기 이름이 있는 대리석 판을 떼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대리석판에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붙이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그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신하를 불러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아오라고 시켰습니다. 불려온 사람은 예배당이 있는 언덕 밑에 사는 가난한 여자였습니다. 왕이 그 여자에게 당신은 이 교회를 짓는데 무엇을 바쳤느냐고 묻자 그 여인은 ‘왕이여, 저는 너무 가난하고 삶이 힘들어서 바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치고 싶어도 아무것도 바치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이 교회를 건축할 때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말을 볼 때마다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그 말을 위해서 집에 있는 짚으로 말의 음식을 장만해서 대접했습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왕은 그제야 아무리 훌륭한 건축가를 불러서 많은 돈을 드려 예배당을 지었지만 거기에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 한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 바리새인은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집장단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죄 지은 여인 한 사람, 창녀가 그 동네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길 외에는 살 방법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손가락질을 받고 비난을 받는 창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나름대로 아주 정성을 드려 준비한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광경을 보시고 바리새인에게 ‘이 보게, 이 여자를 보시는가. 내가 자네 집에 들어올 때 자네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자네는 내게 입 맞추지 않았으되 이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춤을 그치지 않았으며 자네는 내 머리에 그 싼 감람유도 붇지 않았으되 이 여자는 그 값진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최고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을 쉬게 하고, 사람을 쉬게 하고 사람의 사랑을 불러오는 것은 마음입니다. 뭘 주고 뭘 대접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하고 큰 것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들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것 봤습니까?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큰 일 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봤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있으면 그 마음을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베다니에 살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 또한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본래라는 말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님의 사랑을 늘 받아오던 가정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계실 때에 두 자매로부터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아주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니 이미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장례 치른 지가 이미 나흘이나 되었으므로 너무 많이 늦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시기는 가셨지만 곧바로 가시지는 않았다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갈을 받고 곧바로 가신 것이 아니라 그냥 이틀을 더 계시다가 가셨습니다. 성경에는 그 이유를 써놓지 않고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는 것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틀림없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만 아니 이런 것보다 더 귀한 일이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께서 곧바로 가셨어도 살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성의를 보이며 서둘러 가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약에 특별한 사유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성경에 그런 사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기록을 해 놓았을 것인데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으로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참사랑이 무엇이며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참된 사랑과 신앙이란 이렇게 이해하지 못할 일까지도 믿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섭섭하면 불평하고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참된 사랑이란 도무지 내가 용납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것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했는데 이렇게 해주시지, 내가 이렇게 했으면 이 정도의 기도는 들어 주셔야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도 이용하려 하고 하나님도 이용하려하는 아주 이상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은 그냥 믿는 것입니다. 내 아내이기 때문에 믿고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저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계산적이고 조건이 많습니다. 너무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다 좋습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의 믿음이 진짜 신앙입니다. 한번 마음 주면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냥 믿습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마르다와 마리아가 처음 오빠가 병들었을 때에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자매는 오빠의 위급 소식을 전하면서 예수님께 그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3절을 봅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이것이 끝입니다. 나머지는 우리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라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우리 오빠를 사랑하시고 우리 자매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오직 알아서 하시겠는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 집에 갔을 때에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에도 마르다는 또 이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라고 섭섭함을 보였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생인지라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비록 오빠가 죽고 난 뒤 늦게 오셨지만 늦게 오신 것, 그 뒤에도 다 주님의 뜻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그렇게 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연약한 인생이기 때문에 소원도 간구하는 바도 있을 수 있고 그것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압니다. 무엇을 아느냐?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우리 주님의 지혜를 압니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아는 것보다 우리 주님이 더 잘 아시고 정말로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압니다. 내 아들 딸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보다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가장 바른 판단은 내가 아니며 내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다른 사람에게 묻고 공부를 해서 다 알아내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참된 신앙인들은 압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인데 마르다를 통해서 확인됩니다.

이 마르다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마르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라고 자상하게 가르치시는데 마르다는 이렇게 부연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27절에서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고 대답했는데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안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주님께서 한번 설명하시고 두 번 계속해서 설명하시는데 저는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아듣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지만 저는 믿습니다 라고 하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세 남매에게 이 믿음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바로 오늘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43,44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도 사랑하시고 사람도 사랑하시고 그저 사랑하십시오. 대통령도 사랑하고 야당도 사랑하고 다 사랑하십시오. 원수같은 사람도 사랑하십시오, 예수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복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