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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뒤집기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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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기 (막 16:1-8)


I. 뒤집기

프린스턴 신학대학 총장 갈레스피 교수가 은퇴를 하고 주일학교 초등부 2학년 교사가 되었습니다. 
지난해 부활주일 아침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고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한 여자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Is it true? - 사실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갈레스피 교수는 “yes, it's true. - 그럼 사실이지.”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여자 어린이가 “It's impossible -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라고 대꾸하더랍니다. 

여러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퀸네드라는 신학자는 부활은 창조에 버금가는 성경의 “제1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 모두에 평안을 주시길 축복합니다.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모든 인생은 모두 무덤으로 끝이나나 우리 기독교는 빈무덤 부활의 종교입니다. 

일전 중국 베이찡 천안문 광장에 갔다가 모택동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썩지않게 방부제로 처리하고 항상 무덤 안을 섭씨 16도로 유지하여 지금도 죽을 때 모습 그대로 누워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위해 혹 우리처럼 구경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이찡에서 멀리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 한번 다녀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모스코바에 가면 레닌의 모습이 그렇게 되어 있고 북한의 금수산 기념 궁전에 가면 김일성의 무덤이 그렇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얼마전 대북전문매체 데일리 NK는 수백억을 들여 만든 이런 미라들이 쪼그라들고 있어서 그들 당국이 깊은 고민이 빠졌다는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무덤의 크기로 생전의 권세와 위용을 자랑하곤 합니다. 피라미드가 그렇고 중국 진시황릉이 그렇습니다. 

여산릉이라 불리는 진시황릉은 작은 산만 하다고 합니다. 
무덤 봉분 아래서 꼭대기까지 계단을 오르는데만 15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중국에 어떤 지하 무덤을 구경하는데 두 시간을 돌아보고도 다 보지 못하고, 다리가 아파 그냥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아무리 큰 영광을 누렸어도 죽음과 무덤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절은 죽음이 패하고 생명이 승리한 날입니다. 
마귀는 패하고 예수께서 승리하신 날입니다. 
절망이 패하고 부활의 소망이 승리한 날입니다. 

저는 운동을 잘 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퍽 좋아합니다. 
여러 운동들 가운데 한 가지는 어릴 때 기초 훈련도 받아 본 적이 있고 또 짧은 기간이기는 합니다만 선수 생활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믿지 않겠지만 믿거나 말거나 제가 씨름선수입니다. 

요즘이야 몸무게를 달고 체급을 나누어서 씨름을 합니다만 그 때는 체급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순서를 짜서 붙어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요즘도 제 몸이 거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백이면 백, 모두 나보다 몸집이 큰 사람하고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이 가장 통쾌하게 이길 수 있는 기술이 한 가지 있습니다. 
큰 사람 밑에 깔려 들어가 뒤집어 버리는 겁니다. 
혹은 넘어지는 순간에 몸을 뒤틀어서 상대와 위치를 바꾸는 겁니다. 
소위 “대치기” 혹은 “뒤집기”라고 하는 기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환경과 시대를 역류해서 살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대한 통나무 하나 물결 속에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잘려지고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피라미는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갑니다. 
믿음이 죽어있는 성도들은 세파속에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살아있는 성도들은 환경을 역류합니다. 
시류를 역류해서 살아가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모든 악조건을 뒤집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있다고 하면 뒤집기의 명수입니다.  

때로는 넘어질 듯 패배하는 듯 하나 상황을 반전시키고 역전시키는 능력이 있더란 말이죠. 이 시간 여러분의 행복을 빼앗아 가고 기쁨을 앗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불행해 하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실패와 좌절과 절망의 그늘에서 한숨을 쉬며 살아가십니까? 

우리에겐 역전의 능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곧 뒤집기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안에서는 불행이 행복으로, 불가능이 기적으로, 지옥이 천국으로, 죽음이 부활로 뒤집어 집니다. 
역사상 최대의 뒤집기가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일 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시간동안 실패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무덤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또한 반드시 부활합니다. 우리에겐 부활의 소식이 있습니다. 역전의 능력이 있습니다. 

얼마전 홍수환 집사가 탈랜트 이시영 양의 영화 촬영을 위해 권투 코치를 했는데 선수권에서 이시영 양이 우승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홍수환”하면 저는 역전승이 생각납니다. 

1978년 이든가요. 주일 낮 예배가 막 끝나는 시간이었습니다. 
홍수환 선수와 카라스키야 챔피언이 권투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로 권투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 사택으로 뛰어 들어 설 때는 이미 홍수환 선수가 세 번이나 다운이 되어 패식이 짙은 시간이었습니다. 
또 한번 다운! 이제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벌떡 일어난 홍선수 -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카라스키야를 사정없이 두들겨 K.O. 시켰습니다. 소위 사전오기의 신화입니다. 


II. 뒤집기의 새아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무덤 속에 계셨던 사흘동안 
“예수가 K.O. 패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번져갔습니다. 

그러나 부활주일 -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과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가 죽음에게 역전승 했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뒤집기의 새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K.O. 패했다”가 아니라 “예수께서 죽음과 음부의 권세에 역전승” 
이 얼마나 멋진 소식이며 희망찬 소식이었습니까?

이날 아침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이미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줄 알고 시체에 바르기 위해 가져갔던 향유병을 무릎 앞에 놓고 절망과 낙심, 어둠과 슬픔에 빠져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게임은 이미 승리로 끝이 났는데, 
한편에서는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늘 패배의 그늘에서 슬피 울고만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놀라는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막16:6-7) 

놀란 여인들은 정신 없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곳 저곳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내 천사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이 말씀은 이미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시기 전 수차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32에 보면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III. 갈릴리: 절망을 뒤집는 곳

부활의 주님이 제일 먼저 가신 곳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군중들을 모으지도 않았습니다. 
원수라도 갚기 위해 빌라도 법정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던 겟세마네 동산을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의 광채로 빛나는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변화산 등반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으로 가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시며 “갈릴리 거기서 만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죽음의 공포에 떨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 부활의 소식을 주셨습니다. 

예수가 로마를 정복하고 한자리 할 것을 기대했던 제자들의 소망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3년이나 그토록 따라 다녔던 고생은 헛수고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가 왕국을 얻게 되면 오른편에서 한자리 해보겠다던 그들의 꿈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왠만하면 3일만에 부활하겠다는 예수의 말씀을 믿어 보며 3일만이라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볼만도 한데 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제자 공동체 마저 완전 K.O.패 당한 그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고향을 찾았다면 모두 갈릴리 이곳 저곳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은 자살한 가롯 유다외 11명의 제자들의 한숨짓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방 도처에서 절망, 낙망, 한숨, 좌절의 소식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 부활의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인간의 절망의 그 순간은 예수께서 오시는 순간이요, 
좌절의 장소는 예수께서 오시는 공간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그곳에 제일 먼저 오셨습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상처가 있는 곳, 실패가 있는 곳, 절망이 있는 곳, 
그곳에 승리의 소식을 선포합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절망의 땅을 희망의 땅으로 바꾸시기 위해 우리 예수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진 제자들을 일으켜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 -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 부활절 아침 그곳은 절망이 변하여 희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IV. 실패한 사랑 뒤집기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이 아니라, 
사마리아나 나사렛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둘째,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간의 첫사랑이 어려있는 곳입니다. 
열한 제자는 모두 이곳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주로 이곳을 무대 삼아 가르치시기도 하며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백부장의 신하를 고쳤고, 갈릴리 언덕에 올라 
소위 산상보훈으로 알려진 행복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빈그물 들고 낙심 중에 있던 베드로를 친히 찾아 오셔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게 해 주신 곳이 바로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주님은 이곳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 위를 걸어가셨고, 
갈릴리 강변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바로 첫사랑이 어린 그곳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실패한 사랑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세상의 헛된 욕망이 아니라 이제는 부활의 능력으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재출발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과연 지난 2000년 동안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새출발이 가능했습니다. 

갈릴리! 그곳은 -
첫사랑을 회복하는 곳입니다.
믿음의 새출발을 하는 곳입니다.
흩어진 공동체를 재건하는 곳입니다.
절망을 바꾸어 희망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에 머물지 아니하고 새 출발을 했던 사람들, 실패한 사랑을 회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40세에 민족을 구하겠다고 나섰으나 실패하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40년을 살던 중 80세에 가시떨기 앞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를 회개시키라는 사명을 받고도 그는 다시스로 도망하여 풍랑도 만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기도하다가 두 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버리고 천사를 보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첫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갈릴리에서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모두 도망갑니다. 
다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 그 사랑 확인하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 이곳 갈릴리에서 빈 그물 들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다가 

요한복음 21장 - 이곳 갈릴리에서 다시 빈 그물 들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예수님 그 사랑 확인하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그곳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사랑이 스며있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 제자들과 이 첫사랑을 회복하시기 위해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부활절 아침!
그날은 하나님 사랑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실패한 사랑이 뒤집어지는 날입니다. 


V.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새롭게 만나주신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사해바다는 들어가는 물만 있지 나오는 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흘러 들어가는 물이 있고 오염되고 때묻은 물, 빠져나가는 물이 있습니다.

갈릴리 - 그곳은 은혜가 있고 회개가 있고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이곳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부인했고 팔았습니다. 
이곳에서 시기했고 다투었고 배신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했습니다. 
용서받았습니다. 제자로서 새롭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잘못도 있을 수 있고 허물과 부족이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이제는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배신했던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해 보자는 겁니다.

회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회개는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비겁한 자는 회개를 못합니다. 비겁한 자는 언제나 변명하고 핑계하고 위장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죄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언도한 빌라도 기념산이 있다고 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 산에서 빌라도의 손 씻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내 잘못이 아니다” 

빌라도의 변명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비 오는 날 산 울음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이런 소리로 들리는 모양입니다.
회개하기 싫은 사람은 예루살렘거리에 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갈릴리로 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회개하면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이제 용서하고 제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돌아오면 사랑하겠다가 아닙니다. 
이미 사랑하시기에 먼저 갈릴리로 달려가신 것입니다. 

갈릴리 - 거기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계셨습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라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 말씀하십니다. 


Ⅵ. 갈릴리: 버린 사명 뒤집기 

왜 -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갈릴리 - 이곳에서 소중한 교훈들을 들었고 수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성장했으나 

이곳 - 갈릴리에서 구원 역사, 전도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이곳 저곳 도처에서 예수님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그분의 교훈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분의 전도의 열정 - 그분은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던가?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이들은 제자로 부름받아 제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사명의 자리로 모이라는 것이지요. 인간구원의 본거지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분주하고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갈릴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을 잃었고 비전을 잃었습니다. 
하루 하루 부딪히는 실망과 초조 때문에 갈릴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속된 일들에 휩싸여 사명의 갈릴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일에 파묻혀 소중한 사람을 잃어 버렸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갈릴리는 사명의 땅입니다. 
부활절은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이 날은 비전과 사명을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예수 날 위해 죽고 날 위해 부활하셨으니
나 예수 위해 죽고 나 예수 위해 살리라 다짐하는 날입니다. 

부활절을 보내는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내가족 내 아이들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상황에서 저렇게 기뻐할 수 있다니 예수님은 부활하셨어”
“저 위기를 저토록 아름답게 디디고 일어서다니 예수님은 살아계셔”
“저 아픔을 견디어 내다니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

어떤 여의사가 인도에 선교사로 갔다고 합니다. 
그녀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사랑과 온유함을 나타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환자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원인이 무엇인가 알아보았더니 그녀의 통역인 현지인이 너무나 거만하고 오만해서 그 여의사의 온유와 사랑을 전혀 전달해 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통역들입니다. 예수님을 잘 통역하지 못할 때 내 말과 내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이 잘 전달하지 못한다면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잘 전달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어쩌면 인도의 그 여선교사의 통역과 같은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를 통해 살아계신 예수님이 잘 전해져야 한단 말입니다. 


Ⅶ. 역전의 송가

부활절! 이 날은 뒤집기의 노래, 역전의 송가를 부르는 날입니다.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죽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멸시하는 노래, 
죽음을 비웃는 노래, 죽음을 정복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빌리 그래함은 말했습니다. 
“오늘 신문에서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들랑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로 옮겨 간 것 뿐입니다.” 

김활란 여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라. 
천국문에 들어가는 환희의 노래,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다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의 얼굴, 사랑을 잃은 미움의 얼굴을 하고 이 날을 찾지 마십시요. 
슬픔과 실패의 노래를 하지 마십시요.
부활의 송가, 역전승의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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