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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통로의 복 (창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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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복, 통로의 복’.com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기 전에는 그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 아브라함을 불러서 3가지의 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땅의 복입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너를 위해 준비한 땅이 있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예비 된 땅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땅입니다.

둘째는, 자손의 복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중학교 국어책인가??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이야기가 있습니다.   된 사람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며, 든 사람은 학식이나 실력이 있는 사람이고, 난 사람은 말 그대로 출세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이 많아져야 큰 민족이 됩니다. 우리의 자녀가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이 많아져야 부모의 이름이 창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런 자녀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셋째는, ‘복의 약속’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너는 복이 될지라” 전의 성경에서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로 결론을 내리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아브라함을 못 건드립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이 사실을 알고 누가 아브라함을 건드리겠습니까? 누가 아브라함에게 공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도여러분, 땅의 복, 자손의 복, 복의 약속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멘’하시면 나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아멘! 주님 이 모든 것이 나와 내 가정에서도 그대로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이 일이 오늘도 믿는 나에게 현실이 될 줄을 고백합니다.’  
이 말이 옳습니다. ‘아멘’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정도로 마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전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곧 인류를 구원하려는 ‘구원의 약속’ 입니다. 그래서 단지 세상적인 복만이 아니라 , 영적인 복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본뜻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여러분, ‘땅의 복’에서 이 어떤 땅일까요?  농사에 좋은 곳일까요?  앞으로 큰돈이 될 요지일까요? 아니면 아브라함이 터를 잡고 살 땅인가요? 지금 아브라함이 수십년 째 살아가고 있는 고향 땅과는 어떻게 다른 땅일까요?  ‘주기도문’을 보면 그 답이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땅을 말합니다. 

어떤 땅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땅이냐... 땅은 스스로 주인이 아닙니다. 땅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땅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거주하는 땅을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땅을 준비해 놓으셨고, 아브라함을 그 땅의 주인을 삼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그 땅이 점차 확장되어 마침내 온 천하가 하나님의 땅으로 바뀌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고 마침내 온 천하를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 ‘자손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은 지극히 세속적인 표현입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 기준으로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단순히 이런 자녀가 많아지는 것이라면 그냥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자손이 번창해서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고, 나라의 권세를 잡는 왕이 되면 됩니다. 그리고 자손 대대로 왕족으로 살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자손의 복’은 믿음의 자손을 말합니다.  보세요,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4;22-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은 이삭만이 해당됩니다.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 육신을 따라 난 자녀일 뿐입니다. 이스마엘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녀고, 오히려 약속의 자녀 이삭을 핍박하고,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삭의 후예와 대대로 원수입니다. 자녀의 복은 믿음의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녀가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 ‘복의 근원’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재수 좋은 사람, 행운을 몰고 오는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아브라함이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과 저주의 기준입니다. 신약에서는 기준이 되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갑니다.  

마태 18;18절 말씀과 같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믿는 아브라함의 복과 저주의 기준이고, 믿는 우리는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육신적인 복, 세상적인 복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죽고 영원히 사는  영의 복, 하늘의 복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의 복덕방, 복의 파이프’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잘 보시면 또 하나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복은 분명히 아브라함이 받는데... 그 복을 누리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 자손들이요, 땅의 모든 민족들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서 살다가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러’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불행하시지 않았지만 그분의 삶의 목표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단 하나의 목표였습니다. 그 십자가가 지금의 우리를 살렸습니다. 그 십자가가 천하 만민을 죽음에서 천국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꾸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시고, 천국은 우리가 갑니다. 
 
요3;16절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물론 나를 위해서도 됩니다. 소금으로, 빛으로 살지 않으면 내가 더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세상을 위해서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부패하였기에 소금이 필요하고, 세상이 어둡기에 빛인 내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세상을 멀리할 때가 많습니다.  장경동 목사님 설교를 들었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전부 교회 안에 득실득실하답니다.  은혜 받으면 다 신학교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어찌됩니까? 세상은 누가 구원합니까?
 
I-Care 교사 강습회에 갔을 때 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괴물입니다. 하시면서 한 가지 예를 드는데...  중3남자애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여동생이 혼자 잠자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오빠가 여동생을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절대로 의도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하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느냐. 그 학생이 평소에 야동을 즐겨보았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속담처럼, 들어 온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본 야동이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다가, 일정한 조건이 되니까 그대로 나온 것입니다. 야동을 그냥 재미로 보았겠지만 그 야동이 그에게 여자에 대해서, 성에 대해서, 성폭행에 대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여자는 인격이 아니라 단지 성적인 대상이고 성적인 상품이다. 

성이란 윤리 도덕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즐기는 것이다. 성폭력은 죄가 아니다. 이것을 수백 번에 걸쳐서 주입을 시킨 것입니다. 이런 음란인터넷 사이트가 수백 개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청소년들이 즐기는 것이 야동, 음란 사이트뿐일까요?  게임도 전부 폭력과 살인 그리고 색스로 가득합니다. 사람을 죽이면 계급이 올라갑니다. 계급이 올라간 그 캐릭터는 돈을 받고 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 아이들에게는 상식처럼,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박게임은 이미 다양한 모습으로 청소년들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문상’입니다. ‘문상’으로 학용품을 사는 아이들 없습니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게임 요금을 대신합니다. ‘마구마구’라는 야구게임이 있습니다.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 광고로도 등장하는 공식스폰서입니다. 프로야구협회에 40억? 인가를 후원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게임 중의 하나가 이정도 후원을 할 정도로 엄청난 매출을 올린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김제 마늘밭에서 110억원이 나왔다는 뉴스 들었지요? 한 도박 사이트에서 2년 동안의 수수료 중의 일부랍니다. 이런 도박 사이트가 수백 개입니다.  우리나라가 도박공화국이고, 게임나라고, 섹스천국이고, 탈세 공화국이라는 말이 틀린 말인가요? 저는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現實)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문화(文化) 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만을 보고 듣는 우리 아이들은 이미 괴물입니다. 여학생들의 치마가 왜 그리 짧은 줄 아십니까? 저도 몰랐는데... ‘꽃보다 남자’ 아시지요? T.V. 히트 프로입니다. 그곳에서 여주인공들이 다 짧은 치마를 입었습니다. 

저는 그 프로를 보면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습니다. 일본여학생들의 교복치마 길이구만...했습니다. 그러나 연예인이면 미치는 아이들이 다 따라한 것입니다. 안 따라하면 왕따입니다. 이것이 文化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도박공화국, 게임나라, 섹스천국, 탈세 공화국, 복권나라... 말세라는 말이 나올 만하지요. 그러면 이 모든 것의 책임소재를 따진다면, 누구의 책임일까요?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는 아브라함의 복이 미치지 않는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의 복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불신앙의 나라, 마귀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지극히 세속적인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구의 1/5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입니다. 밤거리를 보면 십자가 밖에 보이지 않는 나라, 전 세계에서 교단 별로 세계최고의 교회가 다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왜 이런 기적적인 일이 현실이 될 수 있느냐...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세상 문화(文化)를 더럽다고, 악하다고 교회 안으로만, 기도원으로만 모인 우리 신자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를 불신자들이 만들고, 모든 게임을 불신자들이 제작하고... 불신자들이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온갖 타락한 성, 불법적인 돈, 음란한 영상을 만들어서 퍼뜨릴 때, 우리는 기도만 하고 더럽다고 멀리하고, 세상 것이라고 멀리하고, 홀로 고고한 체 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문화를 찾아보려고 해도 없습니다. 이것이 다 마귀책임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챤들의 책임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멀리해서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나누는 복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은 아이가 자기 것을 예수님에게 줄 때, 예수님께서 자기의 것을 사람들에게 줄 때 일어납니다.
 
세상의 복은 소유의 복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소유의 부자가 되라고 합니다.  누가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먹을 것을 창고에 쌓아놓는 그런 부자가 되라고 합니다. 세상의 복은 자기를 위해 쌓아놓는 복, 남은 어떻든지 자기만 소유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먹이는 부자가 되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은 나누어주는 복, 다른 사람을 살리는 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자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말씀을 정리합니다. 땅의 약속, 자손의 약속,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 소금과 빛의 사명...이 모든 말씀이 우리를  5,000명 먹을 것을 창고에 쌓아놓는 부자가 아니라, 5,000명을 먹이는 부자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복덕방, 복의 통로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통로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나라입니다. 우리도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  

제사장은 자기를 통해 남을 고치고, 남을 바르게 하고, 남을 축복을 받게 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제사장이 자기 혼자 부자가 되려고 하면... 그것이 부패입니다. 백성들의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빼앗아야 자기가 부자가 됩니다. 실제로 구약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3;1-3)“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2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였습니다. 마치 조선시대 포악한 관리들처럼 백성을 수탈한 것입니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이요, 제사장들입니다. 마침내 이 사람들이 예수님마저 죽입니다.  성도여러분, 어쩌면 우리의 싸움은 세상이나 마귀와의 싸움이 아니라 진리와의 싸움이요, 바른 신앙과의 싸움입니다. 어떤 복이 진짜 복이냐, 나는 어떤 복을 위할 것이냐 하는 싸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만을 위한 부활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부활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우리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각 분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고, 그곳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문화입니다.  속이지 않는 정직한 문화, 거짓이 없고, 순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여성과 약자를 돌보며, 성실하게 일하는 문화, 가정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일확천금이 아니라 땀 흘려서 일함으로 행복해지는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를 앞장서서 만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오염된 다, 타락한 자손, 그러나  세상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것이 아브라함과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이 아닙니다. 영적인 복이고 통로의 복입니다. 소금과 빛으로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복, 자손의 복, 복의 근원의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 저와 여러분들의 약속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도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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