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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이에게 배우고 가르칠 것 (막 9: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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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배우고 가르칠 것 (막 9:33-37)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일 전에 있었던 일들 가운데 두 가지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용모가 변하시고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신 사건입니다(막9:2-4). 그때 그 대화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이었습니다(눅9:31).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죽임을 당하셨다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신 일입니다(막9:31). 

다시 말하면 이때쯤 해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앞의 32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버나움에 돌아오셔서 베드로의 집일 것으로 여겨지는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본문 33절)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물음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토론이 아니라 쟁론한 내용이 “서로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본문 34절). 제자들도 그들이 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 일이 결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님을 알고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집단의 삶에 있어서 서열과 지위는 중요했습니다. 랍비들의 글에는 종종 천국에서의 좌석순위에 관하여 언급하며 의인은 천사들보다도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앉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 때 예배나 식사 자리에서의 앉는 순서는 앞으로 올 나라에서의 영원한 순서를 준비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성 입성이 다가올수록, 그래서 착각이긴 했지만 예수님께서 메시야왕국을 선포하시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실 때 자기들에게 돌아올 자리에 대한 제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신경들이 날카로워졌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길을 가면서도 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을 못하고 있자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고 열두 제자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한 것은 흔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이미 함께 집안에 들어와 있던 제자들인데 굳이 부르셨다고 한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앉으셔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권위를 가지시고 진지하게 가르치시든가 준엄하게 꾸짖으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었습니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본문 35절)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섬기는 자”는 노예나 고용된 사람으로서 마지못해 또는 의무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섬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마20:26-28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신 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또 눅20:27에서는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셨다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면 그를 따르고 닮아가야 할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남을 섬기기를 힘쓰는 것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첫 번째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본문 36절):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본문 37절) “내 이름으로”라고 하신 것은 “나와 같이 여기며”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 하나라도 마치 주님을 대하듯이 따뜻하게 맞는 것은 실제로 주님을 맞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 자신을 맞는 것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25:40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셨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는 약한 자 중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우선순위에서 제일 뒤에 오는 존재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극히 작은 자였던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한 일을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한 것으로 간주해주시며 또 하나님을 영접한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상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나라의 대통령을 한 번이라도 대접할 수 있습니까? 보통사람들로는 어림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만일 그런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두고두고 가문의 영광이고 자랑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대접하고 하나님을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쉽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주님에게 하듯 어린이를 아주 귀하고 중하게 여기고 받아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 얼마나 고마운 은혜입니까? 이 은혜를 차버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어린이를 무시하고 박대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발길질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35절의 말씀 즉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말씀과 37절의 말씀 곧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하신 말씀은 사실상 서로 별 연관성이 없는 말씀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의 말씀은 섬기라는 말씀이고 뒤의 말씀은 어린아이를 주님처럼 영접하라는 말씀인데 그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할 때는 그 앞에서 한껏 낮아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이지만 그를 주님을 대하듯이 하려면 어린아이라고 깔보고 얕잡아보고 무시하며 무관심해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이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낮아짐 그것이 바로 섬김의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섬김과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짐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겸손히 섬기는 자세가 일반적인 제자도의 첫 걸음임을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대로 어린아이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함을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거울삼아 어른들이 스스로를 반성할 줄 알아야 함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린이는 역시 어린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는 더 자라야 하고 더 배워야 하며 교육을 통해 성숙해져야 할 미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른들에게 바른 길로 인도하고 바르게 양육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이를 통해 반성하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어린이들이 보고 따르지 않게 교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걸어온 잘못된 길을 어린이들이 따라오지 않도록 잘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6:4에서 쓰기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되지만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 교육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버릇없는 아이들로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기를 가르치고 남을 섬길 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친구가 되어야 할 아이들을 모두 경쟁자나 적으로 여기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알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형제자매와 이웃에 대해 늘 정직한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른들과 아이들이 다함께 복 받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어린이에 대한 존중심과 함께 바른 교육의 책임감을 동시에 확립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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