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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로마서의 부활 (롬 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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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부활 (롬 6:1-23) 

오늘 부활절을 맞아 로마서가 말하는 부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이렇게 성경 한 권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교회 앞에 4복음서의 부활이 어떤 특색이 있는가 증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서를 택하여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 각 권이 부활에 대하여 증거한 바를 살피게 되면 이전에 성령에 대하여 신약성경 전체를 풀었던 것처럼 부활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로마서의 부활을 들으려 하는 것입니다.

주일오후강론 시간에 로마서를 하였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4복음서의 부활에 대하여 강론한 다음에 사도행전의 부활에 대하여 강론하지 않는 이유는 사도행전 강해를 하면서 어느 정도 부활에 대하여 정리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부활에 대하여 강론하고 나면 내년에는 고린도전서의 부활에 대하여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신약성경의 부활도 하나씩 순차적으로 정리해 가도록 하려 합니다. 신약성경의 각 권이 말씀하는 부활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여러분 가운데 이 부활의 생명이 확실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이 부활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최대 명절은 이 부활절에 있습니다. 성탄절 보다 교회가 가장 즐거워해야 하는 절기는 바로 부활절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 부활절을 매년 하나의 행사쯤으로 지나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구원의 교리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이 부활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너무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활은 어찌보면 신자의 삶에 있어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자가 구원얻는 삶 자체를 전부 부활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이 모든 말은 전부 부활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2000년 전에 역사적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부활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부활이 신자의 삶에 있어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얻는 삶이 무엇인지, 전도의 삶이 무엇인지 교회가 많이 가르치기는 해도 정작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잘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자의 구원을 얻었다라고 하는 삶은 부활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예수 믿어 천당갈 수 있다는 자격을 얻었다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지 의롭다 함을 얻은 삶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의미없는 삶의 반복이며 종교생활을 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왜 교회에 나오는지, 왜 예배를 드리는지 잘 모릅니다. 교회에게 주어진 부활의 능력있는 삶에 대하여는 잘 모릅니다. 

이 다음에 죽어서 천당간다는 막연한 기대감이나, 만약 지옥에 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교회를 다닐지언정 예수 믿음으로 사는 생명의 능력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로마서의 부활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부활에 속한 삶을 확실하게 살기는 바라서 오늘 로마서의 부활에 대하여 강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제가 부활의 생명을 확실하게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로마서는 복음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과 일치시킵니다. 복음에 대하여 기쁜 소식, 좋은 소식 이렇게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복음에 대해서 대등한 표현을 들자면 성경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 아들이라 답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2-4절에 복음에 대하여, 곧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은 하나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아들은 어떤 분이신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분입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 주, 우리 왕, 우리 임금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왕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문화대통령, 경제대통령, 민주화대통령, 군사독재대통령 등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죽음을 이기신 왕이 존재한 적은 없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할 때 하나님 아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왕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왕을 섬길 때 바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부르며 섬깁니다. 

이 부활하신 왕 앞에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여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고 로마서는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곧 신하로 부르심을 입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것은 로마교회가 이방인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를 쓴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복음을 봉사하여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려는 것은 이 복음에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 까닭은 바로 이 복음에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통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사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새로운 통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왜 복음 안에, 하나님 아들 안에서 새로운 통치가 나타나야 합니까? 그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1:18-3:20절까지 장구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전체적인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그 불의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로마서의 논조는 지금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경험하는 바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북한은 김정일의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많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를 통해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북한을 바라보며 김정일 통치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북한의 세습정권의 통치가 아니라 새로운 통치가 와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통치를 버리고 북한을 오픈하여 개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은 이 김정일정권의 통치로 말미암아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통치를 끝내고 새로운 통치가 와야만 북한을 살릴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거나 민주적인 새로운 통치가 나타나야 한다고 세계 여러 북한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자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이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나라 모든 시대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사망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창조의 언약에 사람들은 다른 피조물을 조물주처럼 섬기는 범죄를 저질렀고, 유대인들은 율법의 언약을 주었어도 지키지 않고 범죄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이나 헬라인, 즉 모든 사람들이 마치 북한 사람들이 거의 다 굶어 죽게 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통치가 나타나야 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왕의 통치가 나타나면 죽음 아래 있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능력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통치가 나타났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 새로운 통치가 나타나서 이것을 믿으면 순종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던 자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원을 얻는 능력의 삶들이 이 의를 따라 살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모세의 통치와 다윗의 통치는 죽음을 이기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가나안 땅의 풍성한 복을 누리고 사는 구원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이 분은 죄와 죽음을 이기는 구원을 주시는 새로운 왕이시라고 로마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새로운 의의 통치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서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하여 3:22-24절에 말씀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새로운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의 통치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이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입니다.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믿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었던 믿음의 의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되었던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완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4:16-25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게에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면 이 후손을 이루시는 약속이 어떠한 믿음으로 이루어졌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후손을 이루시는 약속에 대하여 자기 몸이 죽은 것처럼 나이가 많음에도, 또한 자기 아내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면서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이루실 줄을 확실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는 씨, 곧 이삭의 출생을 믿었습니다. 죽은 것과 방불한 몸에서 나는 씨를 믿었습니다. 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후손을 이루시는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에서 새로운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는데 이제 아브라함을 불러 새로운 나라 백성으로 일으키셔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으로 만들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동행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동행했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구원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을 믿음으로 그 나라 백성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를 성취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 의로운 삶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5: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삶은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평화하는 관계로 삽니다.  

성군이라고 하고 위대한 왕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세상의 모든 왕들은 백성에게 태평성대를 주는 자들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하나님과 더불어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통치는 새로운 통치이기 때문에 옛 세상을, 옛 시대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5장 12절에서부터 아담의 왕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왕노릇을 했던 왕국은 끝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왕노릇하는 새로운 왕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으로 시작되었던 죄와 사망의 통치 아래 살던 나라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새로운 나라는 의와 생명이 왕노릇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었고, 그 의로움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이라고 했는데, 그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인지에 대하여 로마서 6장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사는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우리는 믿음이라고 보통 생각할 때, 자기 밖의 어떤 사실이나 존재를 믿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것은 다른 사람은 믿지 않지만 나는 믿는다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여러 신들이 있지만 예수만이 참 신이신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속한 죄와 사망의 왕국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의와 생명의 왕국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것을 로마서는 6장에서 세례로 설명합니다. 

세례는 여러분에게 자주 설명을 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일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전에 애굽에서 살 때에는 애굽의 바로 왕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홍해를 건너게 되면 더 이상 애굽에 속하여 살지 않고 모세에게 속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지는 것입니다. 이전에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모르고 이방신에게 속하여 살았던 자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신랑으로 영접하여 그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가 겪는 현 생활에서도 충분히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핸드폰을 주로 쓸 때에는 세계적인 핸드폰의 최강국은 노키아였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대세가 된 요즘은 어떻습니까? 노키아 왕국은 죽고 애플 왕국이 살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핸드폰을 버리고 스마트폰을 자기 손에 가지고 스마트폰을 누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핸드폰과 함께 하던 삶을 버리고 이제 스마트폰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스마트폰과 함께 함으로 이제 스마트폰이 주는 새로운 세상과 접하여 살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다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게 스마트폰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삶의 열매들입니다.  

그런 것과 같이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진노 아래 있어 첫 사람 아담에 속한 왕국에 살았습니다. 그 나라는 우리에게 죄와 사망을 주었습니다. 죄와 사망 아래 신음하고 살았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바로 왕에게 속하여 그 아래서 신음하며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건 또 핸드폰 아래 살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스마트폰이 가져온 새 세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핸드폰에 속해 살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제 새로운 스마트폰에 속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새로운 의의 통치 아래 우리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왕은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주는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우리도 그와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6: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면 애굽에 대하여는 죽고 가나안 땅에 대하여는 산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또 핸드폰에 대하여는 죽고 스마트폰에 대하여는 살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게 세례의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1절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대답 앞에다 ‘결코’라는 말을 붙여야 합니다. 전혀 가당치 않은 말이라고 확실하게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강한 부정으로 답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6:2절에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 말을 바꾸어서 설명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애굽으로부터 벗어났는데 어찌 그 애굽으로 돌아가 다시 거하겠느냐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홍해를 건너 애굽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왕국에 대하여는 죽었는데 어찌 그리로 다시 돌아가 살 수 있겠는가? 전혀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왕국을 위하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애굽 왕을 위하여 살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12-13절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은 죄가 더 이상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즉 죄의 통치 아래 자기 몸을 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죄의 왕국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이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불의의 무기로 자기의 몸을 드리지 말고 의의 무기로 자기 몸을 드려야 합니다. 곧 예수를 믿는 믿음을 위하여 자기 몸을 병기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얻고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과 화평의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 혹시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핸드폰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마 까마득히 잊어버리셨을 것입니다. 기억조차 하지 않을려고 할 것입니다. 오히려 스마트폰이 주는 여러 가지 특혜를 더 찾아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주는 새로운 세계에 속한 것을 찾아서 다운을 받으려고 애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도 옛 왕국이 쇠퇴하고 새 왕국이 서는 것입니다. 군사독재의 통치가 물러가게 되면 민주화의 새로운 통치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새 세상과 새 통치에 속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의와 생명에 관한 것으 찾으려고, 그것을 맛보려고 힘쓰게 합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에 속한 것은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약적인 삶 속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으로 살다가 우리가 서로를 믿음으로 남편과 아내의 부부연합을 이루게 되면 더 이상 처녀 총각으로 살던 것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부부가 함께 누리는 삶을 위하여 찾으려 할 것입니다. 새로운 언약관계 안에 있는 것을 찾고 누리려고 힘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한 번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며 영원한 구원을 기필코 얻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를 믿고서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에 거하고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전권을 통해 어떻게 해서라도 천당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말하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믿음은 살리자는 것인가요, 아니면 죽게 하자는 것인가요? 이게 바로 교회 안에 횡행하는 거짓 구원교리이고 교인들은 이 잘못된 교리에 속아 사는 것입니다. 

이제 의롭다 함을 얻는 삶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면 스마트폰에 푹 빠져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 핸드폰은 전화걸 때나 받을 때 정도로만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스마트폰은 혼자 있을 때면 거기에 붙어 삽니다. 그 스마트폰이 주는 세상에 푹 빠진 것입니다. 그것처럼 예수를 믿으면 그의 부활의 생명에 푹 빠져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이건 또 다시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처녀와 총각으로 살다가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에게 푹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처녀와 총각으로 살 때에는 자기 자신에게 푹 빠져 살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전혀 새로운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입니다. 그러자면 이제 더 이상 죄에게 자신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의에게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죄의 삯인 사망을 열매로 받지 않고 의의 삯인 영생을 열매로 받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왕국에서 주는 것은 사망입니다. 의와 생명의 왕국에서 주는 것은 영생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비교하여 대조하면서 확대 설명합니다. 이건 아주 쉽습니다. 경제의 대통령은 백성에게 무얼 주겠습니까? 경제를 줄 것입니다. 군사독재의 대통령과 백성이 함께 살면 백성에게 무얼 주겠습니까? 군사문화를 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율법 아래 율법을 100% 다 지키며 살더라도 그건 결국 사망의 열매를 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생명을 주는 나라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 통치하던 옛 나라는 끝났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통치하는 새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 삽니다. 그러니 의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나타나겠지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인도함을 받아 가나안 땅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사망을 이기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영생의 길, 곧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영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영으로 함께 하는 백성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7:1-6절에서 남편 있는 여인을 말합니다. 이전 남편과 함께 살았던 삶과 새로운 남편과 함께 살았던 삶을 대비시킵니다. 이전 남편은 율법 남편이어서 사망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 남편은 복음의 남편이어서 부활의 생명을 줍니다. 이게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전 남편 아래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하는 신음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남편 아래서는 죽음을 이긴 화평을 노래하며 삽니다. 사망의 두려움으로 떨지 않습니다. 도리어 죽음을 이기는 생명으로 삽니다.  

로마서 8:5-11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죄와 사망의 법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법이 통치하는 나라에 속해 사는 것은 더 이상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육신을 따라 좇아가지 않고,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그 영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 영이 우리 안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죽을 몸도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신의 일만 생각하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서도 매주일 졸기만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자기 확신은 얼마나 쓸데 없는 것인 줄을 아시겠습니까? 내가 예수를 영접했다고 하는 한 번의 예전 경험, 그리고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체험 그게 도대체 무에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지금 내가 영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십니다. 죄에 져서 죄의 종노릇을 하며 죄의 삯인 사망을 받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죄를 이기고 환난을 이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자들은 당연히 이런 고백 속에 사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8:37-39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다시 묻습니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럼 부활의 승리가 나타납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고난을 이깁니다. 사망을 이깁니다. 이런 승리가 앞으로 미래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함을 얻은 바로 이 순간부터 영원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통치 아래 살지 않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이제 새 생명 가운데 행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묻습니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건 예수, 곧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과 연합하여 한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연합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나타납니다. 그 영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살게 합니다. 죄와 사망을 밟아 버립니다. 그것이 곧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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