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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종의 부활 (사 61:1-3,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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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부활 (사 61:1-3, 막 16:1-8)
  

악명높았던 소련의 스탈린이 죽고 그 후 후르시쵸프가 실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후르시쵸프는 스탈린이 남긴 그늘이 너무 강하다고 느껴서 그 흔적을 지워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스탈린의 유해를 외국으로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프랑스 대통령에게 나폴레옹이 안장된 엥바리드 묘지에 스탈린의 유해를 안장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다음엔 미국 대통령에게 워싱턴에 있는 앨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또 거절당했습니다. 이번엔 영국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또 거절당했습니다. 

생각다 못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 요청했더니 받아주겠다고 회신이 왔습니다. 후르시쵸프의 얼굴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데 회신 말미에 첨언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양해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신성한 이스라엘에서는 부활하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는 사실입니다.” 후르시쵸프는 그 첨언을 보자 스탈린 유해 옮기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부활은 인류에게 주신 대단한 선물이고 환희이고 굿 뉴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부활이 아주 께름칙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봄이 왔습니다. 가는 곳 마다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아나고 곤충들이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계절과 예수님의 부활은 아주 조화가 잘 맞습니다. 예수님은 계절을 잘 선택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부딪치는 문제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불가사의한 것이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믿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동정녀 탄생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생리적인 과정으로가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신앙이 출발됩니다. 또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역사적인 사건이니까 믿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오늘 우리의 죄를 사해 준다고 할 때는 회의가 옵니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 같은 민족이면 혹시 모르겠는데, 중동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예수의 죽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이 성경의 뜻입니다. 그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 비로소 믿음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내용이고 믿음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살아남이 아니고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이것도 믿어지기까지 상당한 고뇌가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도난설, 환상설, 가사설, 신화설 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도 수용해야 비로소 참 신앙인이 됩니다. 이 세 가지는 기독교의 중심이고 근간이고 핵심입니다. 이 세 가지는 누구도 흉내 낼 수가 없는 일이고 어느 종교에도 없는 내용들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부활은 복음의 내용 중 내용이고 핵심가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이 부활에 대해서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을 보면 종의 수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수난은 참으로 참담한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청중에게 넘겨집니다. 예수님 대신 바라바가 석방됩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이끌려 희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비명을 지르고 운명합니다. 여 제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제자들은 도망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이 일이 어찌되는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광란의 도가니였고 거리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때 아리마대 요셉이 나타나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장사함으로서 마가복음 15장이 끝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무거운 적막 속에 빠지고 불안의 도가니로 빠집니다. 이를테면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은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6장에 와서는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캄캄하던 밤이 지나고 동이 트는 모습입니다. 안식 후 첫날 주일 아침이 동이 트고 있습니다. 여 제자들은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향유병이 들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해서 입니다. 그 말은 여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부활개념이 전무하다는 말입니다. 여 제자들이 무덤에 도착하여 보니 무덤의 육중한 문은 열려 있었고 무덤 안에 천사가 “너희가 예수를 찾는구나, 그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기사는 성경에서도 여러 번 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냈습니다(왕상17:17-24).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냈습니다(왕하 4:32-37).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냈고(눅7:11-18), 회당장 야이로 의 딸을 살려냈고(막 5:22), 나사로도 살려냈습니다(요 11:43).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생입니다. 그들은 또 다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에는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부활하심

성경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이 부활하리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을 신약 구약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약(約)은 “testament”라는 말입니다. 즉 성약,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이 주신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장차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그대로 세상에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앞으로 또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그것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도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그대로 세상에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삶의 질서를 바꾸심

지금까지 사람의 일생의 등식은 출생, 삶, 죽음이라는 구도로 짜여져 있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 그것이 인생의 등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그 구도가 바뀌었습니다. 즉 출생, 삶, 죽음, 부활, 천국이라는 등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실제로 실증해 보이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막대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지니는 가치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지 않으려는 의지입니다. 인간은 죽지 않으려는 의지 때문에 스스로 인생을 관리합니다. 조심하고 방종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스스로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지혜가 발휘되고 삶이 발전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영원을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값이 있는 존재인 것은 영원을 사모하고 중요시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에게만 주어진 선물입니다. 죽음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 죽음의 문제입니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빨리 병원에 가 보아야 하는데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다행스럽게도 이 죽음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위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신앙 때문입니다. 

생명의 위대함 증명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이야기 하신 적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겨자씨도 땅에 심으면 나무가 크게 자라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성장합니다. 예수님이 이 겨자씨를 비유로 드신 이유는 씨가 작다는 것만 아니고, 그 작은 씨 안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씨 안에 있는 생명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 비유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으면 모든 일이 끝날 줄로 착각했습니다. 죽으면 끝장난다면 이 세상은 큰일 날 세상입니다. 

죽으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빨리 수정해야 합니다.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간혹 가족끼리 싸우다가 “나만 죽으면 그만”이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나만 죽으면 그만입니까. 내가 죽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게 되는데, 그리고 내 부모, 내 형제들이 얼마나 큰 장애를 입는데 말입니다. “나만 죽으면 그만이다” 이 생각은 아주 무책임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예수를 죽이는데 빌라도도, 제사장도, 바리새인들도, 서기관들도 합심하였습니다. 

평소에는 원수지간이었으면서도 공동의 적을 무찌르는 데는 쉽게 한통속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심으로 끝났으면 이 세상은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진리나 생명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잔디는 짓밟아도, 불 질러 태워도 여전히 살아나오듯이 생명이나 진리나 정의나 진실은 아무리 짓밟아도, 땅에 묻고 그 위에 돌을 굴려 쌓아 놓아도, 그리고 군인들을 중무장시켜 지키게 하여도 다시 살아납니다. 진리나 생명이나 정의를 누가 짓밟을 수 있습니까! 그것을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증명해 주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지방에 갔다 오다가 산을 보니 꽃이 만발하고 새싹들이 돋아 나오고 나무 가지들이 물이 오르고 잎이 피고 겨우내 죽은 듯이 있다가 봄이 되니까 저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듯이 싹을 내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 생명력은 위대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그 옛날에 시체를 넣을 때 함께 넣어 두었던 씨앗들이 발견됐습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이 넘은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햇빛이 있는 땅에 심으니 싹이 나더라고 합니다. 

그 씨앗 안에 생명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 가 보니 야자열매로 담을 쌓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 야자열매들은 햇빛에 바싹 말라서 돌로 쳐도 깨지지 않을 만큼 아주 단단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단단하게 말라버린 야자열매 한 귀퉁이에서 나무순이 비집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습게보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볼품없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우습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죽여 땅에 묻으면 그것으로 끝장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혹시 예수께서 생전에 “내가 3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한 말이 께름칙해서 돌로 무덤 문을 틀어막고 인봉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만에 하나라도 또 살아나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할까 해서 군인들을 풀어 중무장시켜 무덤 문을 지키게 했습니다. 거기까지가 인간의 할 일입니다. 인간은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여 땅에 묻으면 그만입니까? 구약성경에서 요란하게 오시리라 예언되고, 십자가에서 죽으리라 예언되고, 그리고 그가 마침내 살아나리라고 예언된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그 예수의 부활을 무덤 문을 틀어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예수님이 보란 듯이 요란하게 부활하신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소리도 없이 세상에 오셨듯이 또 조용히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위대함을 보여주었고 예언의 정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삶의 활력소를 주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결코 소망적이지 않습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성도들이 이 부조리한 현실에 직면하면서 자칫 세상적인 방법에 의존하거나 세상과 타협하라는 유혹을 받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암울한 우리의 현실에 활력소를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확신을 주었습니다. 진리의 위대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생명의 귀중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새 출발의 동기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참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부터입니다. 사람들이 떡을 얻어먹고 기적을 목격하고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고 메시아인 것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 했으면서도 그런데도 예수를 몰랐습니다. 그저 위대한 스승이고 능력 있고 신비한 재능이 있는 사람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선생님을 따라다니면 어느 날 출세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였고, 이 다음에 우리를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제자들이 무슨 힘으로 고난을 이기고 골고다 십자가의 행렬을 따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시행착오를 많이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언제 예수님의 실체를 알았는가 하면 예수님의 부활 이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제자들이 비로소 참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도마를 보십시오. 얼마나 큰 실례를 했습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는 다시는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떡과 잔을 주시면서 “이는 내 살과 피니 먹고 마시라”고 했을 때, 야고보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인데도 그분이 메시아임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형님은 능력 있고 재능이 있음에도 자꾸만 죽는다고 말만 하시니 실망되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셔서 “이제야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물으실 때 야고보는 비로소 무릎을 꿇고 “주여 이 개 같은 자식을 어찌 이리 사랑하십니까” 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야고보가 그 후 진정한 제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예루살렘교회 감독이 되었으며, 그는 평생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실인으로 살면서 흰옷을 입고 무릎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려 나중에는 낙타무릎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 제자들 뿐 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수많은 가정들이 예수께로 돌아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로부터 개종해서 돌아왔고, 수많은 민족들과 이방인들이 개종해서 예수께로 돌아왔으며, 수많은 국가들이 오늘 기독교의 나라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삶과 죽음의 질서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미래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진리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 부활을 예시해 주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그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처럼 나도 그 부활을 상속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우에게 주어진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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