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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지 아니한 삯 (약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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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아니한 삯 (약 5:1-6) 
 
 
오늘은 재물을 얻고 쓰는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경은 재물을 얻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라 말합니다(신 8:18). 야고보는 1장에서 빈부로 인해 형제를 차별하지 말도록 가르쳤는데, 가난한 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부자라는 사실 자체 때문에 비난 하고 역차별하는 것 역시 옳지 않겠지요.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1)는 말씀도 문맥을 보면 모든 부자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고(2-3), 품삯을 지불하지 않으며(4), 사치와 연락에 빠지고(5),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이는(6) 부자에게 말하고 있지요.

성경은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일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2-3)는 말씀도 재물을 쌓으려는 심리측면에서 살펴야합니다.

썩고 좀 먹고 녹이 슬기까지 재물을 쌓아두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보면, 부자는 재물을 쌓아두면서 마음속으로 자기 영혼을 향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합니다. 재물이 많이 쌓아두면 그만큼 삶이 평안하고 쉬면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돈은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지요.

모든 자연인들이 돈을 신뢰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돈에 신뢰할 만한 가치를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재물이 많은 만큼 삶이 더 평안하거나 더 쉬거나 더 즐거워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성도는 근본적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름과 동시에 자기가 부인된 사람이며,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사람입니다(갈 2:20). 이러한 성경적 가치관 없이 돈을 저축한다면 누구라도 말세에 재물을 쌓는 부자라 할 수 있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게 행한 결과로 성도의 삶에도 재물이 쌓일 수 있습니다. 이때 성도는 야고보서 1장의 가르침대로 부라는 것이 가난보다 더 큰 시험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쌓이는 것을 마냥 기뻐하기보다 아굴처럼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라고 기도해야 할 사람이 성도입니다. 머니 머니해도 든든한 것은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필요 이상의 재물이 쌓이면 줄일 방법을 찾는 태도가 필요하지요.

오늘날 돈은 삶의 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되었습니다. 자녀의 진로를 선택할 때도, 직업을 선택할 때도,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심지어 대선 공략도 경제 문제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돈에 최상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돈 때문에 싸우는 일도 많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돈 때문에 싸우고, 형제자매 간에도 돈 때문에 싸우고, 부부 간에도 돈 때문에 싸웁니다. 돈 때문에 자랑하고 돈 때문에 비방합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가난한 자로 사느냐 부자로 사느냐보다 어떤 처지에서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로 살기보다는 거지 나사로로 사는 것을 복되게 여기는 것이 성도의 가치관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4)는 말씀은 재물을 쌓는 과정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추수가 끝난 시점은 품꾼에게 지불할 삯이 충분한 때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부자는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주지 아니한”이라는 단어는 ‘속여서 빼앗다’는 뜻도 있고, ‘빚을 갚지 않다’는 뜻도 있습니다. 품삯을 주긴 했지만 줘야할 만큼의 정당한 삯을 주지 않고 착취했거나 마땅히 줘야할 품삯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주지 않아 품꾼이 울도록 만든 상황입니다. 돈을 버는 과정이 정당하지 않고 탐욕과 이기심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끌지 말라”(신 24:15),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렘 22:13),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말 3:5)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심판하러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팔레스타인의 품꾼에게 그날의 품삯은 그날의 생계와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성도가 급여를 주는 입장에 있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말해줍니다. 첫째로 노동 착취에 해당할 정도로 부족한 급여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재물 때문에 억울한 눈물이나 서러움의 눈물을 쏟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둘째로 선심 쓰듯이 주는 고자세 역시 합당치 않습니다. 품삯을 빚 갚는다는 단어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갚을 것을 갚는다는 빚진 자의 겸손한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본문의 지주가 왜 품꾼을 울렸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품꾼의 처지를 배려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는 이런 태도가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은 오후 늦게 일했던 품꾼에게도 하루 일한 사람만큼의 품삯을 주었습니다(마 20:1-15). 노동 시간만큼 정확히 삯을 준다면 생계가 곤란할 사정을 배려한 것이지요. 성도는 재물을 쌓는 과정에서 포도밭 주인과 같은 품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성경은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 29:7)고 말합니다. 스스로는 재물에 신뢰할 만한 가치를 두지 않지만, 타인의 재물 문제에 대해서는 최대한으로 배려해 주는 태도가 하나님의 백성답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5)는 말씀은 돈을 쓰임새와 관련됩니다. “사치”는 흥청거리며 낭비하는 쓰임이고, “연락”은 방탕하고 육욕적인 쓰임입니다.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부자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을 먹는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는 죽어서 불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쓰고 싶은 대로 쓰는 태도는 마음을 살찌게 합니다. 그렇게 쓰면 기분이 좋겠지만, 도살의 날에는 살찐 것이 잡힐 것입니다.

흔히 자신의 수입을 ‘내 능력과 내 힘으로 수고해서 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쓸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17-18a)고 합니다. 성도는 재물 얻는 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 때문에 가능했음을 인정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사용할 때에도 내 뜻보다 재물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은 은사를 주신 목적이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엡 4:12)이라 가르칩니다. 모든 은사는 자기를 위해서 쓰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재물 얻는 능력도 은사이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한 몸의 지체들인데, 자기는 평안하지만 다른 지체가 곤고하다면 평균케 하려고 힘쓰는 것이 성경의 원리를 따르는 태도이지요(고후 8:13). 성도는 더 많이 번만큼 더 많이 쓸 자격이 있다는 살찐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원리에 따라 재물을 쓰려고 힘써야 합니다.

돈을 바른 과정과 방법으로 얻는 일도 쉽지 않지만, 돈을 쌓아두지 않고 바르게 쓰는 일 역시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갑자기 복권에 당첨되고서 몰락하는 사람들은 돈을 잘 쓰는 태도가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이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고 명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넘어서까지 나눔이 실천되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재물을 쌓는 일보다 있는 재물을 잘 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여 바르게 쓰는 일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6)는 말씀은 재물의 성향이 어디까지 나가는지를 보여줍니다. 돈의 가치를 신뢰하는 세계에서는 돈을 이용해서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돈을 무기로 삼아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일 수도 있는 힘이 있지요. 돈은 선을 악으로 만들고 악을 선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일종의 절대 권력입니다. 권력이 돈 지갑에서 나옵니다. 그 앞에 대부분 무릎을 꿇지요. 재물의 이러한 성향 때문에 부자는 조심해야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원해도 행할 수 없는 죄를 부자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b)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맞수로 놓을 만큼 재물은 성도에게도 강력한 힘을 미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재물관을 분명히 확립하고 훈련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없을 것이고 성도는 하나님 백성다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은 재물에 신뢰의 가치를 두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재물 문제에 대해서는 최대한 배려해주고, 성경의 원리를 따라 재물을 쓰며, 재물의 성향을 알아 주의하는 성경적 재물관을 분명히 정립 할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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