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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내가 무덤문을 열리라 (겔 3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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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덤문을 열리라 (겔 37:11-14)


(11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절)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절)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절)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부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이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오늘 새벽,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망권세를 깨치시고 무덤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예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야 말로 어둠을 뚫고 저 동녘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같았습니다. 누가 떠오르는 태양을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이 자리를 찾은 모든 분들 위에 부활의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 축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의 부활 앞에 우리 모두가 기뻐하며, 감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인류의 영원한 원수인 죄, 사탄,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죄, 사탄,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이 권세를 짓밟으셨습니다. 더 이상 이런 것들이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이 부활이 이제 나의 부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 사탄, 사망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내 능력이나, 의로움, 수양, 금욕, 고행으로는 도무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승리로 단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처럼 죽으나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는 ‘여기’ ‘이 땅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현재 목숨이 붙어있는 나에게, 처절한 환경에 던져져 있는 나에게 부활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독과 번민, 끊임없는 유혹,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나 또한 그러합니다. 이런 이들을 성경은 무엇이라 칭하고 있습니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를 죽은 자라고 칭합니다(마 28:4). ‘너무너무 배고픈 상태에 있는 자’(창 25:32), ‘낮은 자리에 떨어져 있는 자’(삼하 9:8)를 죽은 자라고 칭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히 11:12), ‘허물과 죄 아래 있는 자’(엡 2:1)를 죽은 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자’(눅 15:24) 역시 죽은 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모두는 이런 저런 형태의 죽음에 직면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과 예수님의 부활이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에스겔이 바라본 골짜기에는 뼈가 가득했습니다. 온 지면에 뼈들이 흩어져있는데, 심히 많고 마른 상태였습니다(겔 37:1-2). 그야말로 죽음의 계곡이었습니다. 에스겔은 25살의 나이에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끌려가 그 황량한 들판, 부역(賦役)의 현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실로 처참한 현실이었습니다. 무슨 소망이 있단 말입니까? 무슨 꿈을 꿀 수 있단 말입니까?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포로의 몸으로 살아가는 처절한 저들의 광경이었습니다.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이들은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아니 죽은 지 오래되어 뼈들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가 곧 이스라엘의 현주소요, 에스겔의 처한 상황임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서 겨자씨만한 믿음을 보셨고, ‘대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에스겔이 순종했습니다. 그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겔 37:7).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대언하니 살이 생겼습니다. 힘줄이 붙었습니다. 생기가 들어갔습니다. 대언하는 대로 기이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지극히 강력하고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기이한 현장을 보고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게 하리라’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리라’(겔 37:12-14). 새로운 창조, 새생명의 역사, 새로운 기운의 역사를 일으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Only by God) 실현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Only in God) 가능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통하여만’(Only through God)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을 보았는데, 죽지 않았던 것은 성자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부활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내 삶의 현장이 죽음의 골짜기와 같을지라도 마른 뼈들이 살아납니다. 살들이 붙고, 힘줄이 생깁니다. 생기가 들어가고, 큰 군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미 무덤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무덤을 향하여 외치기만 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예수를 만난 사람은 내일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죽음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부활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기쁨, 활기, 목표, 웃음, 평강이 넘쳤습니다. 부활예수께서 저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제 더 이상 환경에 짓눌려 울고 있지 않았습니다. 부활주님이 내 심령을 변화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무덤에 묻혀 있습니까? 우리는 예외 없이 다양한 형태의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무덤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립된 상태에 자기 자신을 자학하며, 왜소해진 모습을 저주하며,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는 가정도 무덤, 직장도 무덤입니다. 주 여호와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게 하리라’ 이 음성 앞에 ‘아멘’으로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를 재창조해 주십니다. 의미 없는 인생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치료해주시고, 꿰매어주시고, 싸매어주십니다. 친히 사망의 권세를 깨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일을 부활주님을 만난 나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2011년 이 뜻 깊은 부활절에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2). 이 부활주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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