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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이를 내게 오게하라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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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내게 오게하라 (막 10:13-16)


얼마 전 미국에서 발간된 책 중에 세계적인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세계적 컴퓨터 회사를 이루었고, 현재도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 무려 370억 달러로 가장 부자인 빌 게이츠의 아버지의 회고록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빌 게이츠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그가 그렇게 거대한 기업을 이룬 것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검소하게 살 고 있으며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 사업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거기에 기부하는 남다른 건강한 삶의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도 물론 가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변호사 활동을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의 회고록의 많은 부분은 빌 게이츠를 중심으로 한 그의 자녀들의 성장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지는 못하고 기자들이 소개하는 것만 접하였지만, 그 이야기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빌 게이츠라는 아이가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쉬운 아이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렇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주 세련되고 고상한 품성을 가진 어머니로서 빌 게이츠가 남다른 삶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건강한 토대를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격이 좋고 잘 훈련된 부모이지만 빌 게이츠는 때로 이런 부모님들을 격분하게 만들 정도로 성격을 돋구는 고집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가 11살 되던 해에는 그가 어머니에게 너무 심하게 대들고 말싸움을 걸어오니까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얼굴에 컵에 담긴 물을 끼얹어 버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 같으면 이런 이야기가 아무런 문제가 될 수도 없겠지만... 이 사건이 아마 그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만한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빌 게이츠는 부모인 자기들이 상대하기에는 쉽지 않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부모들이 그를 항상 신뢰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는 들어가기는 했지만, 졸업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도중에 휴학을 하고 컴퓨터 회사를 차렸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중요한 선택을 할 때에도 그의 부모들은 자기들의 생각이나 입장을 강요하기 보다는 아들의 선택을 지켜보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비단 빌 게이츠뿐은 아닌 것이지요. 요즈음 자녀들 치고 만만하게 키울 수 있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127:3) 

이렇게 자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자녀를 기르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더라도 만일 그 사람이 자식을 잘 키우지 못했다면... 그는 어디에 가서도 어깨를 피며 당당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는 수긍할 수 있습니다. ‘맞아 세상에서 자식을 잘 키우는 일처럼 중요한 것은 없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태의 열매는 그 상급이로다...’ 자식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고개가 갸웃 거려집니다. 어떤 때에 우리의 자녀들을 생각하다보면 ‘상급’이 아니라 ‘원수’처럼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요즈음 아이들을 키우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네 살만 되면 반항기가 오고 일곱 살이 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뒤흔드는 아주 심각한 고비가 찾아온다고 하지요. 오죽 하면 옛사람들이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말을 했을까요? 하지만, 빌 게이츠의 이야기를 생각해볼 때... 이렇게 자식 때문에 고민을 하고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 부모를 힘들게 하고 부모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과 요구를 하는 자녀들일수록 우리가 기대감을 가지고 그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자녀들을 잘 키운다는 것에 대하여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는 우리들에게 좋은 실마리는 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에게 데리고 오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들은 제자들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아이들이 소중하게 대접을 받을 수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한 인식이 제자들의 행동 가운데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예수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아이들까지 데려와서 예수님을 번거롭게 해야 하겠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고는 ‘분노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을 맞아 들이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일이 아이들을 안아 주시고는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번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때에 이 자리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기고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던 소중한 삶의 경험을 가진 아이들이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모든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며 변두리에서 자라났을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이 아이들이 달라도 틀림없이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사고방식... 아이들을 아주 하찮게 생각하며 그들의 인격이나 정서를 무시하는 태도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자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린 아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행동 속에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아이들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시면서 아이들이라고 해서 마구 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도 자기들이 가진 가치나 자기들의 생명에 대한 존엄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들은 어린 아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에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어린 아이들은 우리들의 스승이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러한 말씀을 어린아이들이 분별력이 있어서 들었더라면 그들은 자기들의 존재감에 대하여 굉장한 자부심을 가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 대하여 가장 많이 생각해야할 대목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로마의 영웅 쥴리어스 시이저를 보면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홀어머니의 밑에서 이렇다할 후견인도 없이 자라났습니다. 그 당시 일찍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보통 재혼을 해서  새로운 삶을 찾아나서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재혼도 포기하고 그를 가르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특별히 그녀는 아들이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그를 배려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이저를 아주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인물로 세우는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살펴보면서 가지는 염려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어떻게 사람들이 가진 서로 다른 개성이나 장단점들... 이러한 것들을 오로지 일방통행식의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이 삶 속에서 느끼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것들을 죽어라 외우게 한 다음에 그것을 시험 치게 하고... 그리고 마치 그 결과가 그들의 인생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서열을 매길 수가 있는 것인지...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남미의 급진적인 교육학자인 이반 일리치같은 사람은 ‘학교는 죽었다...’라는 충격적인 책을 썼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책을 보면서 학교가 죽긴 버젓이 살아 있는데... 오늘도 학교마다 학생들이 넘쳐나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아한 마음이 있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주장에 동조하고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아마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거나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가치를 발견하며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는 우리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이제 우리의 아이들이 예수를 통해서만 자기들의 존엄성이나 하나님이 부여하신 내면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요즈음 우리의 아이들을 재는 거의 유일한 척도가 있다면... 그것은 학교성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삶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는 일이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전제될 때에 비로소 그 아이가 세상에 나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추구하면서 세상을 살 수가 있는 것이지요. 
   
레바논의 작가 칼릴 지브란은 자신의 저서 예언자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자녀들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 딸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 왔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은 주어도 좋지만 당신의 생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들의 육체는 집에 두어도 좋지만 정신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정신은 당신이 방문할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지 당신의 속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을 좋아하기 위해서 애써도 좋지만,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뒤로 가는 것이 아니며 어제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살아 있는 화살인 당신의 자녀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생각할 때에 뜨겁게 사랑하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냉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부모들은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모세를 살려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느 정도 자라나서 이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 그들은 그 사랑하는 아이를 나일 강에 띄워 보내는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세도 살고 자기들도 살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나의 삶의 방식과 가치를 강요하고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소중하게 지어주신 존재라고 하는 자부심과 네 속에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이 얼마든지 숨어 있다는 것... 그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주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자신에게 온 아이들에게 하신 일은 그들을 안아 주시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복을 내려주신 일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는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그들이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축복을 받는 존재인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모인 우리가 자녀들에게 해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을 예수는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요즈음 한국 사람들의 우수함이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한국인 출신으로 미 연합감리교회의 감독으로 선출 되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정희수 감독이라는 분입니다. 76년에 감리교신학대학에 들어가,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더니만 한 오년 전에 감독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미 감리교회의 감독은 은퇴를 할 때까지 하는 직무이니까 그분은 거의 20년 동안을 감독으로 교회를 섬길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요즈음에는 그를 키운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도 자주 오셔서 강연이나 설교를 통해서 우리들에게도 많은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저는 우연히 지난 가을에 한 모임에 갔다가 그분의 라이프 스토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강화에서 성장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정에서는 처음으로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시골교회이니까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회학교 교사도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그 교회를 담임하시는 전도사님이 김성찬 전도사라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은 중학생이 자신을 향하여 꼭 ‘정 선생...’ 이렇게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끔씩 새벽기도회를 나가면 산골짝에 있는 샘터로 데리고 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시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학생시절의 이 이야기를 자신의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경험처럼 우리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비록 학생이지만.. 나이가 많은 전도사님이 항상 그를 부를 때에 ‘정선생’이라고 불러 주었던 것... 아마 그는 거기에서 자기가 참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겠지요. 그리고 그 전도사님이 자기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기도하여 주실 때...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어렵고 힘든 유학 생활이며 목사로서의 사역의 과정을 넘어서서 마침내 연합감리교회의 감독으로서 더욱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 어린아이들을 사랑으로 안아 주시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며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 바로 이것이 자녀들을 향한 부모님들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항상 우리의 자녀들을 안아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설혹 자녀들이 우리들을 실망시키는 때가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때로 자녀들을 야단치기도 하고 심하게 대하는 일이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자녀들을 안아주면서 그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나 가족들이 보내는 자녀들을 향한 깊은 사랑이 아무리 세상에서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만나더라도 잘 극복하고 헤쳐 나가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고 너의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는 소중한 대목입니다. 부모나 가족들이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그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자녀들은 어디에서도 행복함과 만족감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는 말씀처럼... 자녀를 키우는 일은 우리들에게는 세상에서 주어진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은 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예수는 ‘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절대로 금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아이들이 아무리 바쁘고 분주해도 무엇보다 앞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일이라고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삶의 길고 힘든 여정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면...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자라나게 된다면... 오늘 내가 세상에 존재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아이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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