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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우리의 희망 (삿 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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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희망 (삿 2:6-10)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가정마다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는 우리 교회의 미래요, 다음 세대의 주역입니다. 한 교회나 나라의 흥망성쇠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좋은 가정, 더 좋은 교회,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을 바르게 양육해야합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입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부모들의 심정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부부가 이산가족이 될 각오를 합니다. 어린 자녀의 유학을 위해 엄마가 따라 나섭니다. 기러기 아빠는 더 이상 낮선 단어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아이티에서 오는 길에 아틀란타에 이틀을 머물렀습니다. 새한 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였는데 목사님 내외분이 점심 식사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한식집인데 거기서 서빙을 하던 한 자매가 자양동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잠실 북단에 있는 교회 집사님인데 40대 초반인 분입니다. 이민을 오셨는데 자녀 교육을 위해 식당일을 하는 것입니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취업 전선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미국에 와서 돈을 벌려고 하다보니 주일에 교회도 못나가는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찌 이 부부 뿐이겠습니까? 최근에는 젊은 부부를 중심으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취업이민을 많이 갑니다. 이민 브로커들에게 4-5천만 원씩 주고 취업이민을 간 뒤에 그들이 일하는 곳은 닭 공장입니다. 닭을 잡아서 가공하는 일은 미국 사람들이 꺼리는 3D 업종입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씩 중노동을 합니다. 손마디에 관절염이 생기고, 서서 일하기에 다리는 퉁퉁 부어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허리 디스크에 걸립니다. 

그런데 이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대기업 임원이나 금융기관의 중역 출신이 대부분입니다. 이 땅에서는 힘주고 살던 엘리트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낯선 땅에서 서러움을 견디면서 죽도록 고생할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빨리 영주권 받아서 좋은 환경에서 자녀 교육을 잘 시켜보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식 하나 교육 잘 시키려고 우리 부모들이 보여주는 희생은 가히 눈물겹습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입니다. 우리나라는 사교육비는 매년 약 24조원이 듭니다. 우리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자녀교육에 쏟아 붇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자녀교육에 헌신적인 민족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정성을 쏟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자녀들을 보십시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가장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역경 앞에 너무나 쉽게 자신을 포기하는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책임감이 없고, 의존적인 성인아이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해 있는 교육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녀들을 키울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사사기 2장 10절을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다함께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400여 년간의 노예생활을 하고 40년 간 광야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오합지졸이었던 이스라엘을 이끈 사람은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동안 강한 군사가 되었고,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승전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여호수아도 죽고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일어서게 되었는데, 결정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전지하심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런 사사시대의 비극이 벌어졌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교육의 실패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도 믿음의 유산을 전수하지 못하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신앙교육의 실패는 곧 개인과 민족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은 현명한 악마를 키우는 것과 같다.’ 신앙교육은 바로 다음 세대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본주의 교육의 날개는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과과정을 가지고 열린교육을 하고, 평준화 교육을 하고, 3불 정책을 써도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중심의 교육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개인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교육은 신앙교육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믿음의 대를 이어 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에 한 세대가 지나자 믿음의 단절이라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의 교육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신앙교육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고넬료의 가정이 복을 받은 이유는 온 가정이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남을 돕는 섬김과 기도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행10장). 행복한 가정의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함께 살게 하신 후에는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은 본래 완전한 걸작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가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얼마 전 뉴스에 부부싸움 때문에 119 구조대가 출동한 경우가 한 해에 1,353건이었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119 구조대가 불이 났을 때문만 가는 것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정 문제, 특히 부부 싸움 때문에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출동을 한다고 합니다. 가정이 이렇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이 아닙니까? 이 문제를 이 땅에 예수께서 오셔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보혈을 터뜨림으로 우리가 죄사함의 은총과 치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찢기까지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가정 행복은 예수 믿는 이들이 받는 큰 복입니다. 그 복을 자녀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 바로 가정 예배입니다. 여러분 가정 예배를 드리십니까? 가정 예배를 드려 보면 그 가정의 영적 상태가 드러납니다. 만약 가정 예배 분위기가 무거우면, 가정에 큰 영적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우선순위가 하나님보다 세상이라는 증거이거나 가족 간의 해결 되지 않은 상처와 불화가 있거나,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있으면 가정 예배를 드리기 힘들어지고 싫어집니다. 그러기에 더욱 가정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심을 심어주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받아들이면 심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반드시 심어주어야 합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믿겠지!”하는 생각 정도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부모는 자녀를 대할 때마다 “오늘 아니면 더 이상 자녀에게 신앙을 심어줄 수 없다!”는 다부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함에 있어서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면 언제든 쓰시겠지!” 물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면 언제든지 변화시켜서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방치해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목자가 양을 방치해놓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목자가 없으면 양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 방치해놓는 목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2.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는 실패자입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는가로 평가됩니다. 오늘 우리의 교육 현실은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항상 최고의 엘리트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이것은 결국 서로를 라이벌로 여깁니다. 싸움의 대상자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갈등과 분열, 미움과 증오가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진정한 사랑과 평화, 조화와 협력이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섬겨라.” 남을 배려하고, 섬길 줄 아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성공적인 자녀교육의 원리입니다.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집 아이가 잘 되어야 내 아이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잘못된 이기적인 교육의 태도를 버려야합니다.‘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라는 책을 쓴 전혜성 박사의 교육은 귀감이 됩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남편을 만나 고학을 하면서 6남매를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남편을 포함해서 8명의 가족이 받은 박사학위 수가 11개입니다. 이들은 미국 이민 100년사에 가장 미국에 영향력을 끼친 100명 가운데 3사람이 뽑혔습니다. 그 놀라운 비밀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전혜성씨는 자녀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한 두 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 재주가 덕을 앞지르면 안된다.” “둘째,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입니다.  

전혜성 박사의 교육의 핵심은 자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그래서 한국에서도 세계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이기심의 노예로 사는 자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덕을 세우는 믿음의 사람으로 교육했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훌륭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3. 본을 보여주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110세까지 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태어나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올 때 거의 40세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두에서 지휘할 때에는 거의 85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습니다. 이 노인이 가나안 정복을 끝내고 세상을 떠날 때가 110세이므로 가나안에 들어온 지 약 2, 30년 정도 됩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2, 30여년 살던 사람은 가나안 전쟁을 치를 때 20대, 30대의 전사들이었을 것입니다. 손에 칼을 들고 선두에 서서 나라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110세가 된 시점이므로 약 30년이 지났습니다. 손에 칼을 들고 싸우던 20대, 30대가 이제는 50대, 60대로 다 접어들었습니다. 기성세대가 된 것입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가 이제 그 나라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그들을 앞에 놓고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수23:16) 지금 숨을 거두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지도자가 마지막으로 후손들에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왜 이런 불길한 말을 할까요?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볼 때 전쟁을 아는 기성세대가 영적으로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벌써 삶이 해이해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기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불안이 여호수아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수24:23) 기성세대가 집안에 우상을 갖다 놓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눈이 파랗게 살아있는데도, 주변에 있는 잡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받아 자기 집에 갖다 놓았던 것입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전쟁을 한참 치르는 긴장된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만하자, 배가 부르자, 돈이 많아지자 점점 해이해져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받아들여 우상을 집안에 갖다 놓고 남몰래 섬기며 가나안 잡족들이 하는 대로 부패한 행동을 모방했던 것입니다. 

이 정도로 순수성이 변질되고 세상과 타협하는 이중태도를 보이는 그런 부모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는 자손도 없습니다. 모범이 없으면 감동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있던 광야를 모르는 세대가 이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앞서가는 세대로부터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회의와 갈등 속에서 비판 의식이 생기고, 그 다음에 그들을 거부하는 의식들이 계속 발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기성세대는 참혹한 전쟁을 치른 세대입니다. 

극심한 가난을 딛고 일어나 그래도 세계에서 10위 안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한 썩는 밀알과 같은 세대였습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일만했을 뿐 여가가 없었습니다. 언제 취미생활을 했습니까? 언제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까? 일만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도 2, 30년 전부터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고 사는 재미를 맛보자 변질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합니다.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칙이 되지 못했습니다. 

고난이나 어려움이 올 때에는 신앙이 유일한 원칙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사는 어떤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큰 집을 짓고, 여유 있게 살고, 여가를 즐기며, 재산을 축재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만이 나의 삶을 유지한다는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이 따로 노는 모순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2세들이 볼 때 이것은 이중인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기성세대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 너무 모범이 되지 못하고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오늘날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이 개혁의 우선순위로 교회를 꼽습니까? 왜 대형교회는 개혁해야 될 영순위로 볼까요? 그들이 볼 때 교회는 말씀대로 살지 못한 부패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시각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뭔가 냄새가 나는 데가 있으니까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한국 갤럽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당신이 장차 종교를 선택한다면 무슨 종교를 선택하겠느냐?"고 질문한 결과 대다수가 불교였고, 그 다음이 가톨릭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니세프에서 조사한 기록을 보면 아세아 지역에서 17개국을 조사한 결과, "정말로 부모를, 어른을 존경하느냐?"고 물었더니, 존경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우리나라 젊은이들 가운데 17%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평균 수치가 72%에 이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든 믿지 않던, 기성세대는 다음세대에게 아무런 감동도 못 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모순을 안고 있는 세대로, 변화의 대상으로, 개혁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성세대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말씀을 통해 진단 받으면서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비판하는 젊은 세대를 놓고 나무라기만 하면 안됩니다. 섭섭하다는 말만 하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사기 시대에 기성세대가 잘못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은 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대로 따라옵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아라 말하기 전에 정직하게 사는 자의 형통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말하기 전에 계속해서 공부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내 입장에서 자녀를 평가하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책망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나지 않습니까? 별로 신통치 않는 성적표를 들고 온 아들에게 ‘야! 링컨은 너만할 때 책도 없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대통령이 됐는데 너는 왜 항상 그 모양이냐?’ 가만이 듣고 있던 아들이 아빠를 빤히 쳐다보며 말합니다. ‘링컨은 아빠 나이에 벌써 미국의 대통령이 됐는데 아빠는 지금까지 뭐하셨어요?’ 

우리들이 교육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머릿속에 남습니다. 자꾸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베스트 원(best one)이 아닌 온린 원(only one)의 인생을 살도록 격려해 주십시오. 모두 다 1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그 분야에서 최고의 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리 원의 인생입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사랑으로 기도해주고, 매일매일 축복해 주십시오. 그 속에 다음 세대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한풀이 식의 자녀교육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고 다음세대에게 그대로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실은 뒤에서 밀면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앞에서 끌어야 바르게 따라옵니다. 자녀교육은 실을 앞에서 끄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부모 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정성껏 삶의 발자국을 찍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 가치가 무너지고 상대 가치가 기승부리는 이 시대에 모든 것이 세상에 명예와 부귀와 권력이라는 소위 이것을 가지면 성공이라는 것에 귀결되는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우리 아이들이 주님을 위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 향기를 발하며 건강하게 키워야 하지 않습니까? 정말 멋진 아이들로 키워야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할 때입니다. 그들이 더 이상 세상의 유혹과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달려가도록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 어머니 기도회로 ‘자식의 장래 기도하는 어머니의 무릎에 달려 있다’ 자세로 매주 수요일마다 많은 어머니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보다 더 탁월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리더로 세워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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