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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그리스도인의 자녀양육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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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녀양육 (엡 6:4)
 

자녀들의 양육을 위한 부모들의 관심과 노력은 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전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은 민족을 들라면 누구나 유대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느 통계를 보니까, 1901년부터 2008년까지 노벨상 수상자 793명 가운데 유대인 수상자가 무려 178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체 수상자의 22.3%를 유대인이 차지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한국인의 교육열도 자타가 인정할 만큼 보통을 넘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한국인의 교육열을 자주 언급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교육열이 높은 만큼 생계비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취학 자녀를 둔 20~44세 기혼여성 3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생활비에서 자녀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1자녀 가구는 23.8%, 2자녀 가구는 59.0%, 3자녀 이상 가구는 63.8%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자녀 교육에 올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녀교육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지식 습득이라는 한 가지에 초점이 맞 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생존 경쟁의 역량을 높이기 위한 것이 교육의 목적처럼 되어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아 소위 일류 학교에 진학하고, 실력을 갖추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지만, 교양이라든지 예의범절, 인격적인 성숙 등에 관해서는 고려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요즘 사람들 가운데는 공부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교양이 없고 무례하고 비인격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같은 현실은 오늘날 교육이 생존을 위한 경쟁력을 높이는 데만 치중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교육열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한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예의와 책임감 등을 갖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자녀 교육을 진단해 보고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이르기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특히, 본문은 어머니들이 아닌 아버지들에게 권면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은 권위 의식이 강해서 집안에서 가장으로서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들의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야단부터 치고 훈계부터 하려고 합니다. 자녀들이 반발하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권위를 내세우면 실망하기 쉽고, 마음에 상처를 입고, 분노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틀어지기 쉽습니다. 사도가 아버지들에게 이 권면을 하신 것은 대체로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화나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에서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노엽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이 권면은 부모 된 사람이면 누구나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년시절 또는 청소년 시절에 입은 마음의 상처가 자녀들의 일생에 걸쳐서 삶의 태도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식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흉허물이 없는 관계여야 하는데, 이 관계에 금이 가고 상처를 입으면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경계하는 성향을 갖게 되어 앞으로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책망하고 징계할 때 자녀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부모의 기분에 따라서 자녀를 나무라고 벌을 준다면 내심 반발하고 마음에 담을 쌓게 됩니다. 자녀를 책망하거나 벌을 줄 때는 자녀가 수긍할 수 있도록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부모의 책망과 벌이 노엽지 않고 자기의 잘못에 대한 정당한 징계로서, 다시 말하면 사랑의 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녀에게 너를 신뢰한다고 말해 주십시오. 부모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자녀는 밖에 나가서도 신뢰를 받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신뢰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를 가르치는데 실패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반면에, 부모의 신뢰를 받는 자녀는 어디를 가든지 신뢰에 근거한 대인관계를 해 나가기 때문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룹니다. 

요즘 어린 자녀들은 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도 학원 수업을 받기 위해 밤늦게까지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와 만나서 대화를 하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 대화하지 않으면 부모 자식 간에도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의도적으로 자녀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원만한 인격체로 자라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자녀들의 성적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보다는 공부 자체를 자녀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이지, 성적에 대한 관심은 당사자인 자녀들이 더 많습니다. 부모가 지나치게 성적에 관심을 가지면 자녀들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일찍부터 공부에 흥미를 갖고 잘하는 사람도 있고, 좀 늦게 공부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만 잘한다고 반드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좀 늦게 출발했어도 꾸준히 노력하고 매사에 성실한 사람은 얼마든지 이 사회에서 제 몫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주십시오. 성적이 오르면 사랑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미워하는 식이 아닌 진정한 부모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는 자녀들은 어디서나 자신감이 있습니다. 실패를 할지라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복원력을 발휘합니다. 그만큼 사랑 받고 있다는 의식은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자녀들은 성격이 밝고 긍정적으로 되어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학교 성적 보다 원만한 대인관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자녀는 이 후에 결혼을 해도 원만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가정의 행복을 위한 첫째 조건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책망보다는 칭찬을 많이 해 주십시오. 19세기에 미국의 저명한 화가였던 벤자민 웨스트는 자기가 화가가 된 경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에게 어린 여동생 셀리를 맡기고 외출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없는 동안 웨스트는 서랍에서 물감이 담긴 여러 개의 병을 발견하고는 그것으로 동생 셀리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웨스트의 손과 옷은 물론이고 온 방이 물감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어머니가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종이를 들고 그림 그린 것을 보고는 “오, 이거 셀리로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서 웨스트의 볼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후, 벤자민 웨스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어머니의 키스가 나를 화가로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부모의 칭찬은 자녀들을 격려하고 분발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 전적으로 맡겨 두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학교나 학원은 지식이나 재능 교육에만 치중하지 우리 자녀들의 인성 교육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결국, 자녀들의 인성 교육은 가정의 몫이고, 부모가 교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녀들을 학교와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부모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부모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실망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모의 위선적인 행동을 배웁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방지하려면 부모가 자기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고쳐 나가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시정해 나감으로써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도님들의 가정마다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 앞에 기꺼이 순종할 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 간에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이룸으로써 가정이 위기를 맞이한 이때에 진정으로 가정다운 가정을 가꾸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한 대로, 자녀 교육은 지식이나 재능 교육이 전부가 아니라 인성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인성 교육에다 신앙 교육을 추가해야 합니다. 사도는 부모 된 자들에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면한 다음에, 곧 이어서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는 고별 설교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당부했습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신 6:)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신이시며,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자녀들이 인생길에서 길 잃고 방황하는 일이 생기지 않고, 일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치열합니다. 어른들 뿐 아니라 청년 대학생들,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경쟁의 대열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유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그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알고 보면, 먹고 사는 것, 그 이상이 아닙니다. 직장인은 직장생활을 함으로써 먹고 살고, 기업가는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먹고 삽니다. 학자는 학문을 통해서, 예술가는 예술 활동을 통해서 먹고 사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직장도 의미가 없고, 기업 경영이나 학문이나 예술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차원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당연히 먹고 사는 그 이상의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이르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사람은 사람의 본분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본분을 알고 그 본분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지만, 본분을 망각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은 인생을 헛되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어서 우리 사회에서 성공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본분을 망각한 사람이 되므로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어찌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뛰어난 재능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녀라면 사람의 본분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므로 결국 성공한 인생이라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녀들을 사랑하신다면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십시오. 한두 번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자녀들의 마음 판에 뚜렷하게 새겨지도록 부지런히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빠, 엄마는 네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더 좋다”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섬기는 것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공부부터 하라”는 말이 부모 된 우리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녀들의 일생을 그르치게 만드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시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어 이 땅에서도 형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이 그처럼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면서 범사에 형통케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닫으시면 열 자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나아갈 길을 열어주시면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사랑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경이 생각과 행위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유익이 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길을 가노라면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등불을 비추면서 가면 밤에도 환히 주위를 비추어서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과 같아서 우리가 그 말씀이 명하는 대로 순종할 때 우리의 나아가는 길을 밝혀 주셔서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지런히 일하라고 가르칩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정직하라고 가르칩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이웃을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13)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면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신용을 얻게 되므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우리에게 더불어 살아갈 것을 가르칩니다. 이사야 5장 8절에 보니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동산 투기를 해서 많은 집과 넓은 밭과 땅을 소유한 자들에게 재앙을 선고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불의한 짓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차지한 여러 채의 집과 많은 전답은 실은 가난한 이웃들의 것을 빼앗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난한 이웃을 배려살 것을 명합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9)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굶어 죽는다면, 그건 하나님이 보살펴 주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에게 빵 한 조각과 옷 한 벌을 주지 않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랑의 도구가 되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사람을 보고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구제의 손길을 내밉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에 이르기를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냉정한 그리스도인,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나누고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동정할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육은 매우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경쟁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터득하도록 돕는 것인데,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학교는 친구가 없고 경쟁자만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학창 시절에 많은 친구를 사귀면서 서로 협력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을 배려하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 가르치는 현 교육제도 아래서는 남을 배려하는 정신을 배울 수가 없고,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삭막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교육 방식에 호응하면 안 됩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육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녀들을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자녀들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녀들에게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준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처럼 하라고 말해 주십시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있으므로 틈틈이 성경을 읽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사회에서 큰 성공을 했더라도 만약에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워내지 못했다면 결코 그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지극히 평범하게 살더라도 만약에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존경하고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 삶에서 자녀 양육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하려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추종하는 교육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현재 교육 방법은 쓸 데 없는 경쟁만을 부추기고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보람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시류에 영합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에 입각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학교 공부를 강요하기보다는 먼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자녀들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가치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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