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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아버지의 잔치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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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잔치 (눅 15:11-32)

세상을 사는 사람 중에 믿음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독교나 불교 혹은 유교를 선택해서 믿는 사람들 말고도, 자기가 무종교라고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내면에 종교심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고 오직 나 자신만 믿는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럴 경우에도 자기 자신의 전지전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무엇에다 근거를 두고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지나온 삶의 경험일 수도 있다. 

또 평소에는 전혀 신앙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살다가도 도무지 자기 힘으로 감당이 안 되는 어렵고 불가능한 일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부르는 일은 흔한 경험이기도 하다. 

모두가 어떤 종류이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믿음의 근거가 바르고 진실 된 것이어야 그 믿음이 정상이며, 그 삶이 바른 길을 찾아 나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자명한 사실이다. 

아마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한두 번쯤 속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품질이 뛰어나고, 유용하기 그지없다는 선전을 믿고 물건을 샀는데 사용하니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나고, 애프터서비스도 제대로 되지 않아 돈만 허비하고 애를 먹고 나면 그 물건을 판 사람도 원망스럽지만 그를 철석같이 믿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 후회막급이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 정도라면 물건 하나 버리고, 돈 없었던 양 취급하면서 얼른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일에서 잘못된 기준이나 선택을 따라 간다면 그것은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평생을 믿고 의지했던 것이 말년에 이르러 전혀 가치가 없고, 무용한 것으로 판명이 난다면 그 인생을 어디 가서 보상 받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진실 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믿을 만하며, 무엇은 믿으면 안 되는 지를 아주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거기다가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정확하게 내어다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바른 믿음의 근거를 제공하려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분명한 내용을 알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턱대고 “믿습니다.”하는 것은 결코 바른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할 내용과 근거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본 성경말씀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와 믿음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추측하는가 하면, 엄격한 계율을 지켜 나아가며, 높은 도덕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을 그런 오해를 불식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우리가 본 성경 말씀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한다. 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아버지를 잘 섬기는 큰 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조금 다르다.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틈만 나면 아버지를 떠날 궁리만 하며 산다. 드디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유산상속을 미리 요구했고, 아버지는 그렇게 해주면 정신을 차리고 제 재산을 잘 관리할까 기대하고서 분배해 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는 그 재산을 다 팔아 먼 나라(아버지 손길이 미치지 못할)로 떠났다. 거기 가서 마음껏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돈이 많으니 친구도 많았고, 돈이 많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떠난 것이 그렇게 잘 한 일일 수 없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 칠 수 있었다. 얼마동안은 그렇게 잘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지고 간 돈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누리는 자유가 점점 방탕에 빠져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그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근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개의치 않고 마음껏 살았다. 그에게는 곧 그가 장담하던 대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염려하던 대로 현실이 다가왔다. 돈은 바닥이 났고, 친구들은 다 떠났으며,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채 빈털터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당장 숙식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거기다가 그가 사는 땅에 흉년이 들었다. 환경도 그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다. 굶주림에 지친 그가 돼지를 치며 그 먹이로 배울 채우려고 했다. 더 낮아질 수 없는 가장 비천한 자리로 추락한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없는 일이 자기에게서 벌어진 것이다. 

돈을 뿌려대며 쾌락에 빠져 있을 때에는 까맣게 잊고서 떠오르지도 않던 생각이 돼지 구정물 통을 뒤지면서 일깨워지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한 일군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왜 여기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가?”(17) 그 때서야 자기에게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아!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지은 죄가 너무 크구나!”(18) “이제는 도저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가 없구나.”(19) “이제라도 돌아가 아버지께 사죄하고 아버지 집에서 품꾼이라도 되어야 하겠구나.”(19) 그가 처음으로 자기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자기의 위치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도 삶이 최저수준으로 추락하기 전에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너무 늦기 전에 깨닫는 것이 지혜다.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 줄 모르고, 자기의 장래에 무엇이 다가오는 줄 모르고 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돈만 많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착가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진실은 돈으로 해결 안 되는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느니라.” 이 말씀이 진실이다. 

알거지가 되고서야 정신이 든 아들이 터벅터벅 아버지 집을 찾아 돌아오고 있다. 그로서는 낯익은 거리, 낯익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지만 “웬 떠돌이 거지인가?”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그 거지를 향하여 버선발로 달려오는 발걸음이 있었다. 아버지이셨다. 먼발치에서도 거지가 된 아들을 알아보고 그렇게 달려와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다. 마치 금의환향하는 아들을 맞듯 그렇게 거지를 맞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얼마나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재촉하신다. 아버지는 싫다고 떠난 아들을 맞기 위해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준비해 두셨던 것이다. 누가 볼까봐 아들을 새로 단장시킨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류를 동원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으며, 내가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다.”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여러분! 어떤 아버지도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로 돌아온 아들을 그렇게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이니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뒷방에서 몇 달은 지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는 전혀 다르다. 한 마디도 책망하는 말이 없다. 아들이 용서를 빌려하자 그 입을 막아버렸다. “품꾼으로나 받아주실지...” 염치가 없는 아들을 즉시로 지위를 회복시키며 동네방네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아무리 사랑하는 아버지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로 하나님 그 분께서 당신의 마음을 표현해 놓으신 것이 본문 성경의 말씀인 것이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살아계시며 그치지 않는 사랑을 부으시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성경은 믿음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알지 못하는 신을 추측해서 두려움으로 섬기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 나름대로 정한 기준으로 선을 행하고 공덕을 쌓아가는 일이 아니다. 사실 그대로의 영적 진실을 확인하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나에게 누구신가를 알아 정상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믿음이다. 

여러분 가정을 해 보자. 집을 나간 아들이 먼 나라에서 망하지 않고 성공을 했다면 어떨까? 허랑 방탕에 빠지지 않고 성실 근면하게 재산을 잘 관리해서 더 크게 불려 부자가 되고, 예쁘고 착한 부인을 얻어 유복한 가정을 이루고, 건강하고 명석한 자녀들을 갖데 되었다면 어떨까? 진실로 성공한 삶이겠는가? 그 때도 아버지가 없는 사람처럼 아버지 집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이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스스로를 고아로 만들고 있는 그 한 가지가 나머지 모든 행복의 발목을 비틀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물질을 많이 얻고, 권세를 높였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망해서 거지가 된 것이 아버지 집으로 회복을 부추기는 일이었다면 오리려 망한 것이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망한 것이 자기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망함으로써 무엇이 잘못의 근원인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요. 거지되고 굶주렸기 때문에 아버지께 지은 죄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바란 대로의 성공을 이루었다면 그는 마지막까지 관계의 회복을 이루지 못했을지 모른다. 

사람이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다. 한계 상황에 서 보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기 때문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영원불멸할 것처럼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다. 물질에 의지해서 미래를 장담하는 사람이다. 누가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 

신앙이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큰 아들에게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돌아온 아들을 위한 잔치가 시작되었을 때 큰 아들은 밭에 있었다. 그날도 변함없이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착한 아들이었다.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흥겨운 풍류 소리를 들었다. 가까이 와보니 놀랍게도 그 풍악은 자기 집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였다. 진상을 알아보니 도망갔던 동생이 돌아왔고, 그를 반긴 아비지가 잔치를 벌였다는 것이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아버지는 벨도 없으신가? 아버지 재산을 다 말아먹고 온 재를 위해서 어떻게 잔치를 벌이신단 말인가?” 큰 아들의 분노는 동생에게보다도 아버지를 향한 것이 컸다. 

“나는 평생 아버지를 섬겨 뼈 빠지게 일했지만 염소 새끼 하나라도 잡아 친구들과 즐기도록 해주신 일이 없더니 어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집구석에 들어가지 않겠다.” 그렇게 대문 밖에서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또 문밖으로 나오셨다. 큰 아들은 아마 처음으로 아버지의 정면에다 높은 언성으로 퍼부어댔다.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큰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깨어짐을 회복시키기 위해 분노하는 아들을 달래러 아버지가 나오신 것이다. 

분하고 억울함을 내뱉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타이르신다. “애야!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동생을 위해서는 송아지 한 마리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모든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내 집이 네 집이 아니냐.”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 계신다. 그렇게 해서 아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깨어질 뻔한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계신 것이다. 

관계의 회복,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루기를 원하시는 은혜이고 축복이다. 인류 불행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에서 기인했다.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타락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 버린 사실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기로 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신이다. 불신은 바로 진실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안 게신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불신이다. 

잘 생각해 보라. 아버지에게 가장 나쁜 태도는 어떤 것인가? 부지런히 일하지 않은 것인가? 아버지의 말씀에 다 순종하지 못한 것인가? 아버지가 즐거우시도록 효도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바로 아버지를 거역하고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이다. “나에는 아버지가 필요 없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끊을 수 없는 천륜인 부자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흉악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겠는가? 곰곰이 여러 사람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고 살아왔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온 것이다. 성경이 무엇을 가장 큰 죄로 지적하는지 아는가? 살인, 강도, 사기, 절도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죄가 가장 심각한 죄인 것이다. 

다행히도 작은 아들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 집으로 돌아 왔다. 아버지는 그의 신분을 즉각 회복시키시고 성대한 잔치로 맞아주셨다. 한 사람이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신에서 돌아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면 오늘도 천국에서는 큰 잔치가 열린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돌아옴을 가장 크게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벌써 오래전부터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셨다. 여러분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시고 걸음을 이끌어주셨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축복을 계획해 두셨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모셔들이면 즉시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가 부여 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 특권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 집의 모든 것을 소유하며 누리는 신분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이 기도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기도는 마음을 다스리는 염불이 아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들으신다. 우리는 “그렇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식의 막연한 바램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약속과 보장 속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기도다. 

천국잔치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신 나머지 그 아들을 자랑하며 기쁨을 나누는 잔치다. 우리는 이 잔치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든 허물을 용납하시고, 모든 책임을 당신에게로 돌리시고. 

어쩌면 아버지가 싫다고 집을 뛰쳐나간 순간부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사랑을 끝낼 수가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시하고, 거부해도 끝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부으신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듯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문 밖에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들을 찾아 나오시고 “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내 집이 바로 네 집이다.” 우리를 타이르시며 아버지 집 안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단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잔치를 벌여 기쁨으로 채우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모두가 아버지 잔치의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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