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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직선출] 충성스런 일꾼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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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스런 일꾼 (고전 4:1-5)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선거와 관련된 추억이 있으십니까? 저는 선거와 관련된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농구부에 들어가 2년 동안 농구를 했습니다. 위치는 가드였습니다. 6학년이 되어 주장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을 추천 받아 농구부원들이 거수로 다득표를 하는 사람이 주장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 결정은 감독겸 코치를 받으신 선생님이 결정하셨습니다. 

제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감독겸, 코치 선생님의 친한 친구 분이 여자 팀을 코치하셨습니다. 그 분은 소아마비로 목발을 집고 다니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의 막내 동생인 ‘김광협’이라는 친구가 추천이 되었습니다. 감독 선생님은 우리 두 사람을 뒤로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후보자의 이름을 부르면 부원들은 손을 들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떨어지고 광협이라는 친구가 주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부주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아쉬움은 감독 선생님의 절친한 친구인 여자 코치 선생님이 옆에 앉아 있는 가운데 선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이 거기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결과는 제가 주장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거를 마치고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교회 일꾼을 선출하게 됩니다. 교회의 일꾼을 뽑을 때마다 안타까움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분들을 보면 많은 일꾼을 뽑았으면 좋겠는데 교회의 구성과 질서를 위해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움을 갖게 됩니다. 어느 교회서는 다른 교회에서 와서 일 년인가, 이년 동안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면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직분을 주어서 총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되고 싶어서 그 교회로 가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민망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없지 않아 그런 마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존직은 그런 의미로 받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아무튼 많은 일꾼들을 뽑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일꾼을 뽑는 선거를 앞두고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긴장감도 갖게 됩니다. 만약에 일꾼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공정성이 무너진다면 교회에 큰 혼란이 옵니다. 그리고 선출된 직분자들에게 직분에 대한 영적인 권위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선거에 공정성을 기하고, 질서를 이루기 위해 성도님들에게 몇 가지의 요구를 하기도 합니다. 선거 운동 불허는 물론이고 선거 기간에는 구역 예배도 모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선거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모든 성도님들이 교회의 이런 방침에 잘 따라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마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 ‘비밀을 맡은 자’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에게 청지기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에서 ‘일꾼’이라는 단어를 ‘휴페레테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휴퍼’라는 단어와 ‘페레테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휴퍼’는 ‘밑, 아래’라는 뜻이고, ‘페레테스’는 ‘노를 젓는다’ 라는 뜻입니다. 즉 직역하면 ‘밑에서 노를 젓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배가 지금처럼 엔진을 돌려서 가는 것이 아니고 노를 저어서 움직였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 때는 돛을 이용해 움직이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노는 저어야 했습니다. 배의 크기에 따라 노의 수가 다릅니다만 수십 개의 노가 있습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두 줄로 앉아서 구령에 맞추어 노를 젓습니다. 지도자가 앞으로 저으라고 하면 앞으로 젓고 뒤로 저으라면 뒤로 젓습니다. 빨리 저으라면 빨리 젓고 천천히 저으라면 천천히 젓습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에 대한 질문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순종만이 있습니다. 

노를 저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협동해야 합니다. 젓는 속도와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노를 젓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저어야 합니다. 노를 젓는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협동하지 않으면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됩니다. 자신이 편하려고 요령을 피우면 다른 사람이 더 힘듭니다. 함께 노를 젓는 사람들이 힘들어 노를 젓기를 멈추면 배는 갈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은 배의 선장이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구원의 방주의 노를 젓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감,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없고 ‘일꾼’이라는 직책만 남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리스도’가 없은 일꾼은 좋은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자신이 주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일꾼은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자신이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일꾼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원하시면 그 일을 합니다. 선장의 명령에 순종하며 노를 젓는 종들처럼 예수님의 종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믿음의 노를 저어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뜻을 깨닫는 순간 내 생각을 접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은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사무엘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더 기뻐하시겠느냐? 보라 순종하는 것이 희생 제물 보다 낫고 말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2절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헬라어로 충성은 ‘피스토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피스티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인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충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자에서도 비슷한 뜻이 있습니다. 충(忠)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가운데 중(中)에 마음 심(心)자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헤아려 제 자리에서 주인이 없을 때도 마음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주인이 없을 때 성실하지 못합니다. 신뢰하고 맡겨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처음이나 나중이나, 잘 될 때나 잘못될 때나 한결같은 것입니다. 충성은 전심으로 주인의 말씀을 이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실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충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할 수가 없고, 성숙하게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사랑하는 일꾼들의 충성스런 헌신을 통해 세워지고 성장합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위해 충성스럽게 헌신할 일꾼들을 선출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번 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동차가 세 번에 한 번 꼴로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 자동차를 믿고 고속도로를 주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신문 배달부가 비가 오고, 눈이 온다고 여러분의 집에 신문을 배달하지 않는다면 그 신문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경영하는 회사에 어떤 직원이 아무 말도 없이 한 달에 한 두 번씩 결근한다면 그 직원을 믿고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직원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업무를 맡기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불평하면서 업무를 소홀히 한다면 그 직원을 능력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일 임대업을 한다면 집세 내는 것을 일정하게 하지 않고 간혹 집세 내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매사에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에서 충성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행동과 삶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항존직분자를 선출하면서 ‘내가 하나님과 교회 앞에 순종하며 충성스런 삶을 살았는가?’를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꾼을 선택할 때 지난주에 제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집사를 뽑을 때 하나님께서 기준으로 말씀하신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지혜가 충만한 사람’ ‘성도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중심으로 교회를 위해 충성스럽게 섬긴 일꾼들을 돌아보며 교회를 위해 가장 적합한 일꾼들이 선출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이 신실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임하면 하나님께서 이 선거 과정을 통해서 우리 교회위에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은혜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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