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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등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약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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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약 4:1-12)  

아빠가 집에 옵니다. 하루 종일 일하다가 돌아오니 일로 인한 스트레스로 피곤합니다. 시장하니 빨리 밥을 먹자고 아내를 재촉합니다. 밥을 먹고 나서 아빠는 신문을 뒤척이다가 TV 앞에 앉아 열심히 시청합니다. 아이들은 아빠가 왔다고 곁에 달려옵니다. 어떤 아이는 숙제를 도와 달라고 합니다. 어떤 아이는 같이 놀자고 합니다. 아빠는 피곤하시다  애들아 나중에 와라. 아이들은 툴툴거리고 자기 방으로 갑니다. 아내가 남편 곁에 앉습니다. 아내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기에 남편과 대화를 나누려는데 남편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여보 우리같이 이야기 좀 나눕시다. 에이. 늘 하는 이야기. TV 좀 보자. 툭하면 잔소리만 하고. 집안 식구 모두 기분이 나빠집니다.  

20세기 초기의 Bill Gates라 할 수 있는 록펠러에게 "고용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라고 물으니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라 대답하였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다툼과 싸움이 있을 때 무엇을 느끼십니까? 잘 한다 싸워야 큰다 하십니까? 더 크게 싸워라 그래야 문제점이 확실히 드러나지 합니까?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날까 안타까움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자기 행동이 잘못한 것을 알면서 계속 나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자기는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무리수를 둡니다. 회심하기 전에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런 착각 속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였습니다. 

교회내의 논쟁이나 갈등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논쟁이나 갈등을 통하여 교회가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좋습니다. 다만 그릇된 동기로 갈등이 생기면 아름답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에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박해와 고난이 있었지만 서로 사랑함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식어지면서 교인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약화시켰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과 다툼은 근본적으로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야고보는 '싸우는 정욕' 영어로는 'conflicting desires', 즉 갈등을 일으키는 욕망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욕망이라는 이름이 붙은 차를 타고 계속 달려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기까지 그 욕망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는데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 계속하여 싸우고 갈등하면서 지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사모하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거룩한 열망을 주셨는데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이 열망은 자기가 중심에 서서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다투며 심지어 살인까지 합니다. 

여기서 "살인"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문자 그대로 죽이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영성을 짓밟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실수를 파헤쳐서 매장하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사람들에게 있는 이 잘못된 욕구를 책망합니다. 이런 싸움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가진 욕망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욕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control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1. 소유하려는 욕망 (the desire to have)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2절)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주신 물질을 이용하라고 주셨는데 물질을 사랑하고 사람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유욕이 물질주의로 빠집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삭개오는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재산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불의로 취한 돈을 네 배로 환산해서 돌려주겠다고 하고, 또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의 행복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주님과의 바른 관계,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삭개오가 욕망을 버렸을 때 전에 누려보지 못한 참된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소유주요 우리는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야고보는 욕망과 기도를 왜 같이 언급합니까?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진 것을 즐기기 원하십니다. 


2. 감정대로 하려는 욕망 (the desire to feel)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3절)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네 감정에 충실하라'(‘If it feels good, do it’)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살면서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원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욕심을 갖는 것은 다릅니다. 필요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그러나 싸움의 영성을 가지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시기와 다툼이 기도를 막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회개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이 진정한 필요에서인지 개인의 지나친 욕심에서인지 조심스럽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단지 내 기분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요즈음 나의 삶 속에서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과 삶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진단하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3. 무엇인가 되어보려는 욕망 (the desire to be)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2-3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 각자가 너무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중심에 주님이 아닌 우리가 들어서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My Way" 를 외치며 자기 길을 가려고 합니다.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자기는 무슨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려 하니 교만이 되고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3-5)  
 
갈등을 피하기 위한 성도의 자세는 겸손입니다.(4:6, 10) 

세상이 주는 쾌락과 행복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을 야고보는 하나님께 대한 간음이라 합니다. 간음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본 남편인 하나님을 떠나 다른 남편인 세상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간음한 여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입니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벗이 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슬퍼하시며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만족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섬겨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겸손의 표본이 되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복종할 뿐 아니라 마귀에게 대적하라고 합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단지 '마귀야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요, 그렇게 하면 마귀는 자연히 물러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우리를 가까이 하시겠다는 말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요약해보면 채우려는 욕망이 있는데 채워지지 않으니 싸움이 일어나고 다툼이 생깁니다. 그 근원은 갈등을 일으키는 욕심입니다. 그런 욕심을 가진 자를 야고보는 간음한 여인들, 세상과 벗, 하나님과 원수, 성령을 시기하게 하는 자, 교만한 자,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사람 뒤에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어 죄를 짓게 합니다. 

교만은 마귀의 영성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성은 겸손입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시며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성도란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하나님의 전사로서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자신의 행동과 마음 자세, 기분이나 감정까지도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휩쓸려버리고 영이 흐려지게 됩니다.   

* 어떻게 하면 갈등을 예방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7절상)  

살다보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재정적인 파산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신뢰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아내를 겁탈하려는 누명을 받았습니다. 감옥에서 몇 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기근에서 살리는 하나님의 agent의 역할 감당하며 아브라함에 한 약속을 이루었습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욕망이 솟아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2) 사단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7절하)

사단은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창 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욥기에 보면 사탄의 특징이 나옵니다. 천상회의에 나타난 사탄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사탄은 "땅을 돌아 여기저기 다녔나이다"(욥 2:2)라고 대답합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습니다. 마음이 허전한 자, 시험에 든 자, 섭섭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찾아 이용하려고 합니다. 사탄의 영향을 받아 중심적이 되려는 유혹, 쾌락을 사랑하려는 유혹, 남을 해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3)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8절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경건한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만큼 갈등을 일으킬 기회는 적어집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바른 관계에서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많은 일을 하기보다 아버지와 바른 관계에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왜 기도하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데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계속 나가려고 하느냐?”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스스로 정욕에 끌려서 기도도 하지 않고 일을 하려는 것이나 이미 자기 뜻을 정해 놓고 욕심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4)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4:9).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그러나 감추려 하고 조종하려 할 때 상처는 깊어지고 관계는 더 악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계속 쓰시려고 때로 우리를 낮추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용되는 사람은 자기가 유능한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겸손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압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0-12)


비방/판단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가 부정과 부패에 빠지지 않으려면 건전한 비판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언론과 야당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여당 편에서 볼 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이들이 온전해야만 정권이 그나마 덜 부패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본질적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패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부패하지 않도록 막는 것은 외적인 비판세력이 아니라, 신앙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세울 때 그 법을 마음에 새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을 죄악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바로 마음에 새겨진 율법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뜻에 일치한 삶을 살기까지 성령은 우리 안에서 계속 갈등과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킵니다. 다윗이 죄를 범하였을 때에 그를 비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책망하였을 때 그는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는 잠을 잘 수 없었고 침상이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 문제가 다윗이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식 압살롬에게 후궁 모두를 겁탈당하는 수치를 통하여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길에서 쫓길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돌을 던지며 저주하면서 따라왔습니다. 다른 사람은 시므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몰랐으나 다윗은 시므이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기 위하여 보낸 사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번 범죄하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할 때 얼마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한번 죄를 범하였다고 버리시거나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고통을 충분히 겪게 하십니다. 때로 시므이 같은 비열한 사자를 보내어 아주 심한 고통을 겪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듯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했듯이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어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방은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공격하는 것이고, 판단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단정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동기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행위는 자기 나름대로 법을 만들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행위와 같다고 합니다. 입법자와 재판장은 구원하기도 하시고 멸망시키기도 하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에게는 단지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는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은 월권행위입니다. 이 말은 믿음의 형제나 자매들이 잘못 행하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형제나 자매들을 날마다 일깨워 주어야 하고 권면해주어야 합니다.   


* 어떻게 하면 판단하는 습성을 버릴 수 있습니까? 

1)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대로 우리가 판단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형제를 비난합니까? 그 사람의 수준을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내 수준을 요구합니다. 상대방에게 자기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 수준은 사실 자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가 많은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그 비판으로 자기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7:1-2). 

다른 사람을 헤아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비판을 받고 헤아림을 받습니까? 바로 주님으로부터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의 모습을 사랑할 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고 존경해줄 때 참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2)  우리를 회계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언급하는 율법은 구약에 있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요 성령의 법입니다. 각자의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특징은 사람들마다 요구하는 수준이 모두 다릅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수준을 요구하고, 신앙이 성숙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큰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처음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과 믿은 지 오래 되고 교회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다릅니다. 믿을 만한 조건이 다 갖추어진 상태에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자와 도저히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평가가 다릅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롬 14:12-13).  

하나님께서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판단하십니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자비를 베푸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마 18:32-33,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단정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의 의외성입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변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교회는 병원이라고 지적을 합니다.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 생각에 도저히 불가능한 사람이라도 어느 한 순간에 찾아가셔서 그 사람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의외성을 기대하며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4-40) 대답하셨습니다. 

위대한 계명으로 알려진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관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언급하십니다. 관계에서 실패하면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하였을지라도 실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관계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관계를 주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격으로 모든 관계에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5장과 6장에서 “피차 복종하라”는 원리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모든 관계 속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관계가 제대로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성령 충만을 받을 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입니다. 귀한 부모를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신 부모님들께 감사를 드립시다. 귀한 자녀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자녀들은 주께 하듯 부모를 공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준 사랑에 감격하며 자녀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자손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와 함께 영적 가족으로 허락하신 교우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피를 나눈 형제지만 독립된 가정을 이룬 후에는 일 년에 몇 차례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만납니다. 비록 성격, 직업, 출신, 지역, 학력, 정치적 이념이 다르더라도 교회는 혈연 가족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명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성령 안에서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웃을 잘 섬기려는 자세로 교우들이 속한 가정마다 화평과 희락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운 믿음의 공동체인 팔로마한인교회 모든 교우들이 날카로운 비판과 판단으로 충만하지 않고 사랑과 진리로 충만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한 마음으로 기쁨으로 자원하면서 세워가면서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믿음의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운 공로로 칭찬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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