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래 참으라 (약 5:7-12)

첨부 1


오래 참으라 (약 5:7-12) 
 
 
오늘은 성도의 길이 참음과 관련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야고보는 5장을 부자들에 대한 경고로 시작했었는데, 이제는 압제를 당하는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이 구절부터 11절까지 참는 일과 관련된 단어가 일곱 번 언급됩니다. 고난당하는 형제들에 대한 권면의 핵심이 ‘오래 참음’임을 알 수 있지요. 야고보는 억울하게 압제 당하는 형제들에게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고, 참고, 또 참고, 이래도 참고, 저래도 참고,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그래도 참고, “길이 참으라”(7a)고 말합니다.

언제까지 참아야합니까? “주의 강림하시기까지”(7a)입니다. 참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만 참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있는 형편이 되어도 참으라는 뜻이지요. 고난당할 때 성도가 행할 일은 혁명도 아니고, 실력 행사도 아니고, 보복도 아닙니다. 오직 참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 불이익을 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영악한 세상에서 바보처럼 살라는 것 같아서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라도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행동 원칙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언제나 개혁의 때에는 급진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동기나 목적이 다 나쁘진 않았지만 결국은 잘못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오래 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장 무슨 결과를 보기 원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았으면 당장 옳은 대로 행해야 직성이 풀렸지요. 사도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했습니다. 연약한 형제의 속도에 맞춘 것이지요. 반면 급진파들은 연약한 지체들을 배려하지 않고 젖먹이 같은 자들에게조차 강행군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옳은 것 같이 착각했지만 성경의 원칙에서 벗어났습니다.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태도일까요?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7b). 팔레스타인에서 가을에 내리는 이른 비와 봄에 내리는 늦은 비는 싹이 트고 열매가 맺히기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화 속의 농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열매 맺을 소망을 가지고 비를 기다립니다. 귀한 열매를 바라기에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으며 성실히 일하며 적극적으로 기다렸겠지요. 참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소망 중의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참기 힘듭니다. 소망이 없다면 열심히 살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1:12)을 소망 중에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의의 열매”(3:18)를 거둘 것을 바랍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조바심도 생기고 초조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고난 중에도 참아야 합니다. 농부면 농부로서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주부면 주부로서 성실히 살면서 소망해야 합니다.

성도는 단지 소망하기만 하지 않고 소망대로 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8a)는 말씀은 참는 일이 믿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은 고정시켜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인데, 요동하는 “두 마음”이나 세상과 벗되어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살지게”한 마음과 대조되지요(1:8; 5:5). 오래참고 기다림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외적인 고난이 문제일까요? 실제로는 마음의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성도는 막연히 좋은 날을 기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역사는 실수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를 것을 분명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평생 동안 참고 사는 고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오늘 저녁에 오신다면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언제나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b)는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주의 강림에 대한 믿음이 굳건할 때 마음이 풀어지지 않고 준비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풀어진 증상은 입에서부터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9a). 원망한다(스테나제테)는 단어는 ‘탄식하고 슬퍼한다’는 뜻인데 문맥상 원망 섞인 탄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고 하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은 믿음과 소망을 가진 성도의 태도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지 못합니다. 서로 탄식하고 슬퍼하기만 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지 않겠지요. 오히려 형제의 소망과 믿음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성도는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이유를 찾고 서로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늘 체험하면서도 고난이 닥치면 원망하곤 했습니다. 주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당신님께 대한 원망으로 여기셨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원인이 되었습니다(민 14:29-3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0-11). 형제에 대한 원망은 곧 그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심판자가 문 밖에”(9b)서 계신 것을 생각한다면 감히 서로 원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의 첫 특징을 “오래 참고”(고전 13:4)라고 했습니다. 믿으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도 오래 참게 합니다. 이처럼 사랑도 오래 참음의 특징이 있습니다. 성도는 고난 중에서 오래 참음으로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 됨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망하면 이 모든 것을 허물게 됩니다. 설령 나를 힘들게 하는 성도일지라도 원망하기보다 오래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고난 받을 때는 나만 고난 받는 것 같아 외롭습니다. 내 허물 때문에 고난 받는 것 같으면 더 풀이 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10)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 뜻대로 살았던 선지자들조차 고난을 받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했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고 했습니다. 고난 받는 것은 허물이 있든 없든 하나님 백성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닙니다. 고난 없는 삶을 기대하지 말고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지 생각해야 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11). 야고보는 욥의 결말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언급합니다. 욥도 고난 속에서 완전무결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인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의 결과로 욥의 삶은 회복되었습니다(욥 42:5-7).

욥은 자신이 왜 고난 받았는지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욥의 고난을 통해 당신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역시 욥처럼 당면한 고난의 이유들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힘겨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반드시 당신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언젠가는 시편 기자처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라고 고백하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대는 거짓말을 하기 쉽고 그 거짓을 믿게 하려고 맹세하기 쉽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하고 예수님을 맹세하며 저주했었지요(마 26:74).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고 말합니다(12). 법정 선서나 결혼 서약 같은 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맹세 없이도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의 때일수록 입술을 잘 지켜야 합니다.

성경의 원칙 앞에서면 늘 실패하고 마는 가벼운 제 모습이 초라해집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불평조로 말하기도 했던 욥이 제게는 더 위로가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조차 오래 참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 역시 오래 참지 못하고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베드로의 실패가 힘이 되네요. 그것은 그들의 실패의 삶 속에서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손길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등지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회개하고 전진했지요. 원칙을 알아도 우리는 실패를 경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가 많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고 다시 성경의 원칙대로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