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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메시야와 재림예수

  • 이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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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메시야와 재림예수


이사야 11:1-5                                                                 

14. 12. 14, 오전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한 가지의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악과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외의 모든 열매는 임의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단 한가지의 법은 하나님만 신뢰한다면 지키기가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단 한가지의 순종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형상인 뱀의 말을 더 신뢰하였고 선악과 열매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인간은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심판은 사단에게 내려졌습니다. 사단에게 내려진 심판이 인간에게는 최초의 복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먼저 메시야를 약속하신 후에 징계를 내렸습니다. 그것이 여인에게는 해산의 수고였고 아담에게는 이마에 땀을 흘리는 수고였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기 위해서 메시야는 여인의 후손으로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극한 형벌은 주님이 받으시고 정작 인간에게는 가벼운 징계만 주어진 것입니다.


제가 가볍다고 말하니까 "해산의 고통을 어떻게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아기를 안 낳아 보셔서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장 가볍다는 말씀을 취소해 주십시오"하고 여성 성도들이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아이를 나보지 않아서 해산의 수고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들어서, 혹은 제 아내와 딸이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 고통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볍다고 한 것은 지옥의 고통보다는 훨씬 가볍다는 말씀입니다. 영원토록 지옥의 불 속에서 죽지도 않고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깐 배 아픈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의 어머니만 해도 8남매를 나셨고, 어떤 분은 12자녀를 낳으신 것을 보면 지옥보다는 훨씬 가볍습니다. 우리 남자들에게 땀흘리고 수고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도 가벼운 징계입니다.


아무튼 내대신 죽으시러 오시는 메시야를 약속하셨는데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예언한 말씀입니다.


1. 메시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돋아난 싹으로 오십니다.(1절)


이미 인간의 타락과 함께 약속된 메시야는 아담의 많은 후손들 가운데서 한 족속을 택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독자이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삭의 아들은 둘이 태어났기 때문에 둘 중 한 사람을 정하셔야만 했고, 그래서 둘째 야곱을 택하셨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12아들을 낳았습니다. 더욱 복잡한 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2 아들 가운에 유다를 택하셨습니다. 유다는 지파의 한 족장이 되었고 그의 후손 또한 많이 번성했습니다. 수 만 명의 유다 지파 가운데서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셨는데 그 아비가 바로 본문에 기록된 이새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이라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왕을 삼으셨고 다윗 왕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을 때 정식으로 메시야에 대한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사무엘하 7장에 나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집은 성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 자신은 백향목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은 성막에 계신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은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금과 은과 철과 구리들을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마음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하7:11-17)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리라고 하셨는데 다윗 성리라 불리는 예루살렘은 주전 588년 제3차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멸망을 하게 되었고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 다윗의 왕위는 20대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약속한 영원한 왕위는 메시야가 세우는 왕국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멀리 영원한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기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도 여리고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인 수로보니게아 여인까지도 "다윗의 자손이여 내 딸을 고쳐주옵소서!"라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오신 다윗의 자손으로 시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났건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다윗의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2. 메시야는 이새의 뿌리이십니다.(1절)


메시야가 가문으로는 이새의 줄기에서 오셨지만 그의 근본은 이새의 뿌리이십니다. 뿌리는 가지나 줄기를 존재케 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인생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와 줄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존재 위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내가 당신의 명령에 따라 애굽으로 가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명히 나에게 '네가 보낸 분이 누구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대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정체를 알려주십시오.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I am that I am, 즉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은 피조물이지 창조주가 되실 수 없습니다.


창조주는 신비스런 분이십니다. 그분이 만드신 만물에 대한 연구가 거듭되면 거듭 될수록 그 신비의 폭은 더 넓어지고 그 깊이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미생물 하나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가 담겨있고 그 정보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을 생각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놀랄 뿐입니다.


유전인자의 신비가 밝혀지면 생명의 정체도 밝혀지고 인간의 모든 질병의 원인을 알게 되므로 인간은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전인자의 암호가 해독된다면 그때는 더욱 더 알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가까이 지내면 지낼수록 신비스럽던 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더욱 더 신비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100을 안다는 것은 곧 100만큼을 모른다는 것이며 1000을 알면 1000만큼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갖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지 간에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심입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빌립아 네가 나와 함께 오랫동안 있으면서 아버지를 보지 못했느냐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여든 누구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네가 나를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겠거든 하는 일을 보고 내가 하나님인 것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처럼 사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물론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인 것을 증거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격을 받을 만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것은 율법과 성전입니다. 그리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자신보다 못한 것으로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다"고 하셨고 "너희가 율법에는 이렇게 말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라"라고 하셨으며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유대인에게는 사형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밖에는 하실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그분의 속성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사건이 성탄절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오시는 메시야는 여호와의 신이지만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겸손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으로 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3. 메시야는 심판의 주로 오십니다.(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당장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자신들을 억압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기로 말한다면 주님 앞에 설 사람이 어디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은 개처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힐문했습니다.

"이 여인이 간음했습니다. 간음한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도 여기 두 사람이나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돌로 내리 칠까요? 아니면 당신 말씀대로 용서하고 돌려보낼 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지 그녀를 용서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율법대로 처단하려고 그녀를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걸고넘어질 방안을 생각해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 여인을 용서해 주고 돌려보내라"라고 말한다면 당장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 범법자로 몰아붙일 판입니다. "이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쳐라"라고 말하면 당신의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은 거짓이라고 쏘아댈 판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혜와 총명의 신'으로 오셨습니다. 잠깐 그들로 생각할 틈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땅바닥에 글을 쓰셨습니다. 주님이 글을 썼다는 곳이 성경에 이 한 군데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땅바닥에 쓰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무수히 많은 대필자들이 그 분에 관해서 또는 그분의 뜻을 담은 책들을 도서관에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남겼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어떤 글을 쓰셨겠느냐?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 바로 옆에서 씩씩거리는 주동자의 죄악을 기록했고 그것을 본 주동자가 돌을 던지고 도망을 쳤다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에게 돌로 쳐라" 여지없이 무너지는 예수님의 꼴을 보려고 기대했던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하시자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앞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여인이 가련하게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이제 돌을 들어 심판하실 분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는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듣기만 하고도 재판관 노릇을 곧잘 합니다. 남의 말을 듣고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한쪽 말만 듣고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과 같습니다.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재판관입니까?


재판의 자격이 있어도 듣기만 하고서는 판단할 수 없는데 하물며 자격도 없는 사람이 듣는 대로 판단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웃으시겠습니까?


(마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판결의 자격이 없습니다.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이시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길을 지나가는데 술 마신 사람이 난데없이 주먹을 휘둘러 내 이빨을 한대 부러뜨렸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법정에서 판사의 판결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응 네가 내 이빨을 한대 부러뜨렸지 너도 맛 좀 봐라"하고 상대방의 이빨을 부러뜨린다면 똑같이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억울하지만 내가 판결을 내리고 법을 집행할 수 없습니다.


메시야는 공의로 판단하시고 재판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공의는 정평이 나있습니다. 오죽 공의로우시면 그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집행하셨겠습니까? 재판관은 인정이나 감정에 치우쳐서도 안됩니다. 오직 공의로워야 합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그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법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해 놓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죄가 아니라 유죄를 선고하신 후에 독생자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메시야로 오신 주님은 죄인을 구하시려 십자가 지려고 오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죄인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결론입니다. 메시야는 약속대로 이새의 줄기에서 오셨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이새의 뿌리이십니다. 이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존재케 하시는 생명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여호와의 신이십니다. 지혜와 총명의 신이십니다. 그분은 재판관이십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시지 않으셨고 들리는 대로 판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공의로 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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