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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어머니 마음의 믿음 (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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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마음의 믿음 (막 7:24-30)

 
내 용 오늘은 잘하면 자녀들한테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먹는 어버이날입니다. 그런데 주의하십시오. 욕먹을지 모릅니다. 전에 제가 가르쳐드렸는데 자녀들이 어버이날 아이스크림 2개 사다 주고 돌아서서 말한답니다. “어린이날 빚 갚았다. 더러워서!” 어버이날에는 보통 아버지 마음보다 어머니 마음이 찬양을 받는 거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관계 가운데 자식을 향한 어머니 마음이 가장 진실하고 아름답다는 평가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친구의 우정도 경우에 따라 배신감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도 이기적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향한 부모, 그중에서도 어머니 마음은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로서 가장 하나님 사랑에 가까워서 이렇게 교회에서 어버이 주일이 생긴 것입니다. 모든 여인들은 거의 틀림없이 첫 번째 아기 출산 후에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발견합니다. 함세웅 신부께서 쓰신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신부님이 꽤 귀여워해주었던 여학생이 한명 있었는데 이제 결혼할 때가 되어서 결혼해서 첫 아기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신부님이 몇 분의 수녀님들과 함께 아기 심방을 가셨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기 엄마가 첫 아기를 낳아놓고 신부님, 수녀님들을 보고 하는 말이 “저는 평소에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생활하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깨끗하고 훌륭하게, 어떤 면에서는 거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늘 수녀님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나서 지금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신비스럽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리고 내 존재감에 대해서 너무나도 내 자신이 귀하게 보이는 마음이 내게 있습니다. ‘아! 여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녀를 출산할 때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알게 되는구나.’ 이게 아주 분명하게 와서 ‘내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제야 나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수녀님들도 빨리 결혼해서 아기를 낳으십시오. 이게 내 진심입니다. 그렇게 수녀생활 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에 어쩌다가 어린이 학대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가져다 버렸다든지 하는 사악한 부모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99퍼센트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자녀에 대해서만은 최고의 좋은 마음의 방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좋은가? 어머니가 된 사람은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이 목사는 어쩔 수 없이 다양한 교인들의 상황에 대처해야 되는데 장례식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린 아이 장례식도 많습니다. 3살 된 아이가 세상을 떠나서 장례식 치르러 갔는데 그 아이의 엄마는 그 아이가 첫 아기인데도 야무지고 침착한 마음으로 참고 교인들이 오셔서 감사하다고 우리 아기는 주님 품으로 갔으니 내가 기르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괜찮다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겁니다. “굉장히 야무지다. 아주 많이 슬픈 텐데 어떻게 눈물도 안 흘리고 저렇게 잘 참느냐?” 

그래서 예배드리려고 하는데 외할머니가 너무 우시는 겁니다. 외할머니가 그칠 줄 모르고 정신없이 우시는 겁니다. 예배를 못 드릴 만큼 우셔서 제가 외할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 아기 엄마도 저렇게 잘 참지 않습니까? 할머니가 이렇게 너무 우시면 아기 엄마는 어떡합니까? 아기 엄마는 더 슬프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그 권사님이 아주 진리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목사님! 나는 지금 아기 엄마 때문에 못 참는 겁니다. 저의 딸이 이제 저렇게 되었지 않습니까? 저 애도 아기인데 아기가 아기를 잃어버린 슬픔을 저렇게 마음을 감추고 참고 있는 저 자체가 나는 못 견디겠습니다. 얼마나 지금 마음을 누르며 참고 있을까? 저 애의 슬픔 때문에 나는 지금 견디지 못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오늘 이 성경에 등장하는 여인은 지금 자기 문제가 아닌 자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온 것입니다. 우선 이 여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살고 있는 여인입니다. 이 지역은 유대 나라 북쪽에 갈릴리 지방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북방에 위치한 작은 부족국가입니다. 유대 나라 역사 가운데 이 나라와 관계가 제일 나빴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지독스럽고 표독스러운 왕비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아합왕이 자기 나라 여자들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도 거기 가서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데려오는 바람에 유대 나라는 영적으로 위기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민족의 신앙을 다 말살해 버리고 왕비라고 하는 물리적 힘을 이용해서 자기 나라 종교인 바알을 수입 해다가 전국에 바알 신당을 만들어놓고 막 죽이고 핍박하면서 하나님을 못 믿게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엘리야가 “하나님! 다 없어지고 나만 혼자 남았습니다.” 이럴 정도로 핍박을 심하게 한 과거의 그 역사 때문에 이 나라와는 유대 나라가 아주 관계가 나쁩니다. 그러니까 유대 나라 사람들은 그 나라는 저주 받아서 죽으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예수님이 거기로 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못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막 원망하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사실 다른 성경에 보면 여자가 뒤에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저 여자를 빨리 보내소서. 이 지역에 도대체 뭐 하러 우리를 데려오셨으며 저런 여자는 왜 보내지 않고 따라오게 내버려 두시고 말대꾸를 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이 지역에 온 것 자체가 너무 자존심 상하고 “뭐 하러 예수님이 우리를 끌고 여기까지 왔는가?”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이 여인의 혈통적 배경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까? 헬라의 혈통과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일부러 밝힌 것입니다. 왜 이것을 밝혔습니까? 지금 12명 제자들은 수로보니게 족속은 다 개 같다고 취급을 합니다. “짐승들이지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지금 전도하러 오신다는 말입니다. 로마의 시리아 영에 속한 지방 사람으로서 여호수아 때부터 원수가 되어 온 가난한 원주민 중에 한 부족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주 자존심이 상해서 “예수님! 그러면 예수님이 이 지역에서 전도해서 이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여기 오신 것입니까? 역사도 모르십니까? 이 사람들은 일찌감치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어야 될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십니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지역 선교가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왜 전도를 아무도 모르게 합니까? 잘못했다가는 민족 감정 때문에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관계이기 때문에 아무도 몰래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구원해야 되니까 예수님은 그런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오셨고 제자들은 이해를 못하겠다고 예수님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그러면 내가 이 여자에게 한번 해볼 테니 이 여자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너희들이 한번 잘 보라.”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람들을 옛날 여호수아 때부터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취급을 해왔는데 “그러면 그대로 내가 말을 하겠다.” 여자에게 예수께서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처음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유대 민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말을 해왔습니다. 그게 수로보니게 족속인데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해석을 하면 “내가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 민족이지 이렇게 짐승 취급을 받는 수로보니게 족속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자녀들에게 주라고 떡을 주셨는데 그 떡을 자녀들에게서 빼앗아서 개들에게 먹으라고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12제자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예수님이 여자에게 표현했습니다. 사실 이 성경 구절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에게도 내셔널리즘, 유대주의 사상이 있었지 않았느냐 하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 지금 벌어진 상황으로만 판단을 한다면 이 여인은 자존심이 상해서 웬만하면 예수님을 향해서 한바탕 욕설이나 퍼붓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 상황을 보면 이 여인은 지금 길바닥에서 이 많은 사람들 앞에 창피를 무릅쓰고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마치 임금님에게 소청이 있어서 엎드린 신하와 같은 모습으로 구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취급의 말을 들었을 때 여자의 자존심은 못 견딜 것입니다. 그래서 욕을 퍼붓고 돌아설 줄 알았는데 반대로 나옵니다. “주여! 옳소이다.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고 사나이다. 먹다 남은 부스러기라도 나는 만족합니다. 주님께서 유대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나 같은 수로보니게 족속, 즉 유대 사람들이 생각할 때 개 같은 사람들이라고 취급하는 나에게 먹던 부스러기라도 던져주시면 내가 그 은혜를 입겠나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봐라. 너희들보다 나은 거 같은데? 이런 믿음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랬더니 자기 딸의 귀신이 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는 뭔가? 지금 구하고자 하는 소원이 자기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딸의 문제입니다.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엄마는 이 딸의 구원에 필요하다면 어떤 자존심도 다 굽힐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 마음의 믿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조명해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어버이주일을 맞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본다면 네 믿음이 크도다. 그리고 뭐든지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 성경이 헬라 혈통의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는 핏줄을 일부러 밝힌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여인,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우리 사회에 무슨 자존심이 필요하겠습니까? 길바닥에 엎드려 구걸하는 듯 한 모습도 아무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할 때 세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헬라 말인데 ‘에로스’와 ‘필리아’와 ‘아가페’라는 말을 씁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있을 때만 하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여기에 속합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다고 무릎을 꿇고 고백하는 그 정성도 나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생명을 다할 만큼 사랑한다는 그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순간적으로 악마가 되어서 둘 다 죽여 버리고 싶은 복수심에 불탑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그렇습니다. 이기적입니다. 수준이 가장 낮은 사랑에 속합니다. 주일마다 제 설교를 수화통역하시는 김인경 전도사님이 지난 고난주간에 있었던 일을 우리 교역자들 앞에서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 사랑부 학생들에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조명하는 설교를 하시는데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을 설교하시면서 예화를 들었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지금 여기서 설교하는 김 전도사님을 위해서 죽을 사람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아무도 없어야 그 다음 설교가 연결이 되는데 사랑부 학생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나요! 나요! 나요!” 전부 다 죽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까 김 전도사님이 그 다음 설교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어휴! 모두 예수님 같이 되어 버렸네? 이거,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 나왔네?’ 이렇게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할 말을 잃고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다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그러면 오늘 예배 후 아주 맛있는 특별간식이 나오는데 그 간식 안 먹고 김인경 전도사님에게 줄 사람!” 그렇게 질문했더니 한명도 손을 안 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부 학생들이 왜 그랬을까요? 벌써 판단이 김인경 전도사님을 위해서 죽을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식은 정말 뺏길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를 보십시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거기서 말하는 사랑이 에로스는 아닙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고귀한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질투심은 얼마나 사람을 죽일 듯이 되는지 모릅니다. 

필리아는 나 아닌 것을 사랑할 수 있는데 이때는 차원이 높아져서 나와 관계된 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녀들도 나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와 관계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모성애 사랑입니다. 나라도 나 자신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와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애국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필리아는 나만의 유익이 아닌 피차의 유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는 뭐냐? 사랑 자체만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위해서는 나 자신을 버릴 수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이게 아가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이 사랑을 배워가는 것은 에로스나 필리아를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아가페로 갈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내가 이 사랑의 길을 갈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는 것인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에로스나 필리아는 다 합니다. 

성령 안 받아도 연애 얼마든지 하고 모성애, 애국심 예수 믿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얼마든지 다 합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단어도 모릅니다. 이것은 가장 거룩한 “하나님은 사랑이라.”라고 한 그 사랑에 내가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도 아가페는 아닙니다. 다만 아가페에 가장 가깝습니다. 보십시오. 어머니, 아버지도 남의 자식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가페에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아가페를 가기 위해서 이런 어버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장 가까운 것이 어버이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혁명 시대 때 레닌이 인간을 분석했습니다. “인간은 물리적 만족만 있으면 행복하다. 먹고 자고 입고 성생활을 시켜주고 그리고 즐거운 오락이 있으면 충족하다. 이것만 만족시키는 정치를 하자.” 그래서 가족주의 철폐론, 그래서 공산당 사회가 되었지 않습니까? 성경은 어떻습니까? 반대로 봅니다. “물리적인 만족을 아무리 시켜주고 먹고 자고 모든지 다해도 인간의 본성이 원초적인 사랑의 애정 속에서만 참된 만족이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인간이 참된 만족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아무리 충족시켜주어도 안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럴 일이 없지만 제가 어렸을 때 기억이 납니다. 6·25 전쟁 후에 우리나라에 미군들이 고아원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미팔군에서 특별히 전국의 고아원에 도움을 많이 주어서 우리 아들딸들을 잘 돌봐주었습니다. 그런데 미팔군에서 가끔가다가 자동차가 와서 선물 박스를 고아원 아이들에게 나눠주는데 그 박스를 열어보면 얼마나 맛있는 것이 있는지 그 시절에 구경도 못하는 초콜릿이니 고깃덩어리, 과자, 잼……. 맛있는 것이 많아서 아이들이 그것만 보면 천국이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나와서 동네에서 막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아원에 있지 아니한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그것을 볼 거 아닙니까? “와! 너희들 어떻게 그것을 먹니?” “가끔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는 거야.” 그러니까 이게 먹고 싶어서 집에 가서 아이들이 막 졸라댑니다. “나 고아원에 보내줘.” 물리적 만족을 사람들은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년이나 끌다가 겨우 사형 집행을 한 미국 한 젊은이가 미국 사회를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청년이 절벽이 있는 강가의 드라이브 코스의 경치 좋은 곳을 운전하고 가다가 보니까 어떤 여자가 자기 자동차가 고장 나서 아주 곤란스럽게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국에 가면 여자들이 길가에서 자동차 때문에 곤란스럽게 서있는 것을 보면 미국 남자들이 섭니다. “뭘 도와줄까요?” 그래서 성의껏 도와줍니다. 그런 광경을 아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지만 웬만한 사람은 서서 그것을 도와줍니다. 자기 일에 별 지장이 없으면 거의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많이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강가에서 그러고 있으니까 이 청년이 서서 “왜 그러시나요?” “내가 자동차가 고장 나서 그러는데 큰일 났습니다.” “내가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그 여자는 남편 없이 어린 아기 셋을 차에 태우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다짜고짜 덤벼들더니 어린 아기 셋을 낭떠러지 강으로 다 집어던져버렸습니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로에서 그 여자를 실신시켜놓고 옷을 벌거벗겨놓고 성폭행하고 그 여자도 집어던져서 네 명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 사건이 벌어진 후 그 청년이 잡혔습니다. “너 왜 그랬느냐?” 이 남자가 죽을 것을 다 각오하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사건 말고도 숨어있는 다른 사건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죽이십시오. 나는 살려두면 또 그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나는 여자만 보면 그런 발작이 나서 못 견딥니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을 조사해보니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왠지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던 느낌이 있어서 엄마를 붙잡고 막 가지 말라고 우는데 엄마가 아주 야멸치게 나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이후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엄마를 못 보았습니다. 나는 그 감정으로 자라나서 ‘여자들은 다 우리 엄마 같구나!’ 생각이 들어서 ‘여자만 보면 복수해야지.’ 그래서 내가 그렇게 큰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런데 마지막 말이 참 뉘앙스가 있습니다. “아! 천국 가면 좀 편안히 살겠지.” 그리고 사형 당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회가 바라보는 마지막 등불입니다. 그것마저 꺼져버리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저 높은 산 보다 더 높고 저 푸른 바다보다 더 넓은 거 같아.” 이 노래가 살아있는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고구려 시대 우리나라에 아주 흉악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주 나쁜 문화입니다. 순장과 고려장이라는 장례법입니다. 순장은 뭐냐? 임금님이 죽었을 때 외로우시다고 살아있는 처녀를 둘씩 양쪽에 갖다가 묻는 것입니다. 고려장은 늙었는데 안 죽으니까 미리 갖다가 죽이는 것입니다. 산에 갖다가 버리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있었잖아요? 언제부터 없어졌느냐? 두 가지 전설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게 전설입니다. 아들이 노모를 갖다 버리려고 지게로 져서 깊은 산속에 버렸는데 지게까지 버리니까 그 아들의 아들이 지게를 걸머지고 오는 것입니다. “야! 너 왜 그것을 가지고 오냐? 버리고 와야 돼!” “아버지 늙으면 이 지게로 갖다가 버릴 건데?” 이 전설 때문이고 또 하나는 등에 업혀가는 노모가 험한 산으로 들어가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흰 댕기를 길에다 뿌립니다. “어머니, 그거 뭡니까?” “날이 어두워져. 이 깊은 산속에서 네가 길을 잃으면 이 흰 댕기를 보고 가면 너의 집이야.” 그 후로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손해 안보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잘해서 손해 보셨습니까? 부모를 공경해서 무슨 손해를 보셨습니까? 우리를 인도하는 선생님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에게 잘해서 무슨 손해가 나셨습니까? 손해 안 납니다. 성경이 그렇다면 그런 줄 믿으십시오. 여인들만이 지니고 있는 보호본능의 뜨거운 사랑이 영원하여야 우리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되지요?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면서 살아가는데 내가 낳지 아니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더 훌륭합니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에 사생아가 있을 수 있는데 비록 사생아를 낳았을 지라도 그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존재는 우리 사회에 훌륭한 존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슨 일이냐?” “내 딸이 귀신 들렸나이다. 나는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을지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내 딸에게서 귀신 나가기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그 어머니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아가페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어버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어버이들에게 이런 아가페적 하나님의 사랑이 생겨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끝까지 지켜 주님의 은혜를 얻어낸 수로보니게 여인을 조명하면서 그와 같은 믿음의 자세로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배워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마다 이러한 사랑의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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