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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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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15-24)

구원받은 사람들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잔치에 비유했습니다. 이 잔치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종들을 보내어 손님을 청했는데 한명도 오지 아니했습니다. 집 주인이 노하여 종들에게 말하기를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Ⅰ. 이 집은 큰 잔치 집입니다. 

본문 14장 16절에 『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1) 이 잔치는 임금님(어떤 사람)이 배설한 잔치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 『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했습니다. 

2) 이 잔치는 임금님이 친히 왕자를 위하여 배설한 잔치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 『 …자기 아들을 위하여 … 』라고 했습니다. 

3) 이 잔치는 혼인잔치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 『 …혼인 잔치를 베푼… 』라고 했습니다. 

잔치는 우리가 아는 대로 여러 종류의 잔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혼인 잔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잔치하는 집으로 비유했습니다. 

이사야 62장 4-5절에 『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혼인집의 신랑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5절에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예수 자신이 혼인집의 진정한 신랑이라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잔치 집의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신랑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요 2:1-11). 

세례 요한은 이러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9절에 『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기독신자의 최후 승리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4) 모든 것이 준비가 된 잔치입니다. 
본문 14장 17절에 『 …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에 『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더 나은 관계를 말합니다. 완전한 회복을 말합니다. 다 용서했다는 말입니다. 


Ⅱ. 하나님은 이 큰 잔치 집으로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본문 14장 17절에 『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에 『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1) 초청 받은 사람들이 다같이 초청을 사양했습니다. 

(1) 밭을 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장 18절에 『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2) 소를 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장 19절에 『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3) 장가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장 20절에 『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단지 신혼의 재미를 깨뜨릴 수 없다는 하찮은 이유로 정중한 초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할 복음 사명을 일신상의 하찮은 일을 핑계로 외면하는 인간들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여기 『 가지 못하겠노라 』고 하는 것을 볼 때 초청 받은 사람들의 태도가 점점 더 무례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비록 납득할 수 없는 사유를 제시하기는 하지만 "불가불…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는 예의를 갖춘 형식으로 정중히 사양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도 약간 퉁명스럽게 자신의 불참 사유를 단순히 통보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은 전혀 사과의 뜻도 표시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불참을 통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로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점점 완악해져 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인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6절에 『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라고 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초청입니다. 

(1) 초청의 대상이 장소와 지역을 초월합니다. 
본문 14장 21절에 『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 』라고 했습니다. 

(2) 초청의 대상이 신분과 형편을 초월합니다. 
본문 14장 21절에 『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3) 초청의 방법입니다. 

(1) 종을 보내야 합니다. 
본문 14장 17절에 『 …종을 보내어 … 』라고 했습니다. 

(2) 시간을 다투어야 합니다. 
본문 14장 21절에 『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 』라고 했습니다. 

(3) 강권하라고 합니다. 
본문 14장 23절에 『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고 했습니다. 


Ⅲ. 성도는 임금님이 배설한 큰 잔치 집의 종들입니다. 

1) 왕자를 위해 배설한 혼인집의 종들입니다. 
본문 14장 17절에 『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3절에 『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라고 했습니다. 

왕자를 위한 잔치 집에 손님을 모시는 사명 받은 종들입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를 만천하에 알리는 종들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왕의 초청장을 들고 가는 종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속의 소식, 부활 승천의 소식, 영생과 축복의 소식을 알리는 사명의 종들입니다. 

2) 많은 사람에게 가야하는 종들입니다. 
본문 14장 16절에 『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든 사람에게도 가야 합니다. 동산과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도 가야 합니다. 쾌락주의, 가족주의에 취해 있는 자들에게도 가야 합니다. 

3) 강권하여 잔치 집에 사람을 채워야 하는 종들입니다. 
본문 14장 22-23절에 『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고 했습니다. 

오히려 자리가 있다는 종의 말을 감안하면 이 잔치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할 곳이 많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라고 했습니다. 

본문 21절의 "거리와 골목"이 성내의 영역을 뜻한다면 23절의 "길과 산울"은 성밖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초청 잔치에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백성이 초대됨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경우 앞에서 언급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은 유대인 가운데 소외되고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정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강권하여 』라는 헬라어 "아낭카손"( )은 "필요하다"의 뜻을 가진 "아낭케"( )에서 온 말로 물리적인 강제력(compulsion)을 사용하여 데려오라는 의미가 아니라 끝까지 설득하여 데려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포교 방법과 다른 것입니다. 
이 말에는 초청을 받은 사람이 절대 사양한다하더라도 친절한 자세로 끈질기게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사랑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유대인들이 장차 될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 문자적으로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민으로서의 모든 특권이 무효화됨을 뜻합니다. 유대 민족이 A.D. 70년에 예루살렘 파멸이라는 징계를 받은 것도 이 사실에 대한 하나의 징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5-26절에 『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와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합한 전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 즉 구원 받은 십사만 사천의 상징적인 숫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 7절에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창세기 26장 24절에 『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 지라 』고 했습니다. 

창세기 28장 13-14절에 『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최근 『 이슬람 채권(수쿠크)법 』에 대한 각종 의혹과 논란이 야기되는 뉴스 및 신문기사들을 탐독하는 가운데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 이슬람 머니 』가 국내에 유입된 실제 데이터가 지난 2007년 10-12월에는 1289억원, 2008년에는 3조 239억원, 2009년에는 3조 1903억원, 현재는 오일달러 30조 이상의 엄청난 금액이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12월 7일 그동안 면세해주던 다른 외국자금에 대해 세금을 부과시키기로 한 안건이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이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에는 7가지 종류의 세금을 모두 면제해 주자는 안건이 상정되었습니다.

지난 2월 임시국회 법안 71개 중 수쿠크 법안만 상정되지 않고 70개 법안이 통과된 상태이지만 언제 이 법안이 다시 상정되어 수면 위에 떠오를지는 미지수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자금은 그동안 안 받던 세금까지 받기로 합의하고, 이슬람의 수쿠크 자금만은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자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특혜와 비리와 불평등과 헌법정신 위배 등 각종 해악의 결정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국내 유입은 대단히 심각합니다. 저들은 2020년까지 한국에 포교 전략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슬람 세력은 타문화권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은 저들의 속셈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들의 초청은 원한을 품은 초청입니다. 그래서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을 들고 포교합니다. 저들은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 약속의 아들 사라의 몸에서 난 이삭에게 빼앗긴 장자권에 대한 원한에 사무친 도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청은 잔치 집의 초청입니다. 초청을 거부한다고 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초청입니다(요 13:1). 만세전부터 하나님 나라에 초청을 받은 자들을 찾아서 강권하여 데려오는 것이 교회적 사명입니다. 이 일이 잘 되는 것을 가리켜 교회 부흥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데는 오직 말씀의 흥왕 뿐입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4절에 『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0절에 『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강권하는 기능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빛의 자녀들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는 『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 했습니다. 
이 잔치 집의 초청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초청의 가치는 영생입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의 일이며 그의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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