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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아름다운 부부, 성도 (롬 16:3-5, 행 18: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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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부부, 성도 (롬 16:3-5, 행 18:18-26)  

바울은 고린도에서 한 부부를 만났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다. 이들은 국제 결혼을 한 사람들인데, 아굴라는 본래 유대인이고 브리스길라는 로마 여인이다. 이 두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추방령에 의해 로마에서 고린도로 옮겨오게 된다. 

여기서 전도자 바울이 이 유대인 부부를 찾아가므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어떻게, 무슨 경로로 바울이 이 부부를 찾아가 방문했는지 그 연유는 모르지만 바울 나름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것이라 추측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 부부를 만나 홀로 걷는 사역의 길에 동역자를 만나는 복을 받았다. 롬16:3에서 “나의 동역자”라고 불리워지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에게 어떤 사람이었나?
  

1. 선교 기지를 제공하였다. (행18:3)

행18: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라고 하였다. 천막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바울은 이 부부의 생업을 도우며 살았다. 함께 살았다는 말은 함께 먹고 마시며, 또 잠을 자며 기숙했다는 말이다. 행18:11을 보면 바울은 1년 6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수많은 사람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났는데 18개월 기간 동안 바울은 브리스길라 부부의 집을 선교 기지로 생각하며 지냈다. 이 집은 고린도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함께 살게 된 바울의 삶은 이 부부에게 거울처럼 공개되었다. 전도의 열정, 세계 선교의 비전, 영혼을 향한 사랑, 무엇보다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확신 등 바울의 삶의 이유가 이 부부에게 18개월간 전해졌다. 한지붕 아래 살면서 나누는 교제의 깊이는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하는 깊은 영성을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주의 종을 위해 그의 목회를 위해 선교 기지를 제공한 이 부부는 삶의 이유를 더 분명하게 깨닫는 복을 받았다. 그것이 동역자로 가는 축복이었다.
  

2. 선교 사역을 위해 동행자가 되었다. (행18:18~19)

행18:18을 보면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고 하였다. 바울의 사역은 움직이는 사역이었다. 정주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전도자로서의 선교 사역이었다. 고린도에서는 18개월이나 머물렀으나 다른 곳에서는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이동하는 사역자를 좇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함께 하였다는 것이었다.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고린도에 정착하고 다시 고린도에서 자신의 사업을 정리하고 바울과 동행하게 되는 이 부부는 삶의 목적이 달랐다. 안정된 삶보다 선교의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행18:19을 보면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행18:21~22을 보면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안디옥을 내려가서”라고 하였으니 이 부부는 에베소 지역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들은 에베소에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이들의 거처지는 또 에베소 지역의 크리스챤들이 모이는 교회로 사용하게 되었다. 

고전16:19을 보라.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이들의 거처지가 곧 에베소교회였다. 복음에 눈을 뜨고 복음을 위한 삶을 위해 짐을 싸서 이사를 할 수 있는 사람, 복음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위임하는 선교 지역에서 능히 그 사역을 감당할 영성을 가진 사람, 그들의 집이 또 교회가 되었다. 이 어찌 하나님이 바울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영적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행18:24~26을 보면 아볼로를 가르친 수준이다. 아볼로는 유대인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아볼로의 가르침을 듣게 된 이 부부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한 자이지만 요한의 세례만 가르쳤다.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는 선생이였으나 성령 세례를 알지 못했다. 아마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 모자라는 부분을 풀어 가르친 것이 아닐까? 얼마나 높은 영성을 지니고 있는 부부인가? 바울이 고린도에서 18개월간 이 부부를 양육하였다면 오늘 에베소에서 이 부부는 아볼로를 양육한 것이다. 

우리가 18개월 동안에 성경에 능통한 자의 모자람이 무엇인지를 보고 그 모자람의 문제를 채워줄 수 있는 영적 성장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복음에 깨어있는 사람이기에 가능하다. 18개월이 아니라 18년을 가르쳐도 선교 사역에 동행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만 달음질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목회 현장에서 나타나길 원하는 동역자의 모델이다. 
  

3. 꾸준한 일관성으로 세계선교 비전을 공유하였다. (롬16:5)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삶은 일관성이 있었다. 황제의 칙령으로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왔을 때 자신의 거처지가 바울의 선교 거점이 되었다면 로마로 돌아가서도 자신의 집을 교회로 드렸다. 이 부부가 로마로 돌아간 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하기 전이다. 롬16: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은 로마에 정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롬16:5에 가서 보면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고 하였으니 이들 부부는 거처지마다 교회로 쓰여지게 구별한 것이다.

이들은 바울의 소원과 꺼지지 않는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어떡하든지 로마로 가려는 선교 열정이었다. 그 로마 방문 계획이 롬15:22~28에 자세히 나타나는데, 그것은 세계선교였다. 롬1:10을 보면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하였는데 바울은 로마가 선교 완성의 비전에 속했다. 그러므로 로마행을 포기할 수 없다. 이 비전을 알고 있는 이 부부는 로마의 정치적 변화가 주어졌을 때 로마로 돌아가 교회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이 부부는 어디에 머물러 있든지 항상 변함없는, 일관성 있는 헌신을 하고 있다. 사람이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것은 외적 지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비전이 무엇인가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 비전을 위해 땀 흘리며 변함없는 헌신에 의해서이다. 비전이 없기에 오늘 사역자로 일하다 내일 모든 것을 외면해 버리는 변덕스러움이 얼마나 많은가? 냄비처럼 뜨겁다가도 이해 관계 때문에 식어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간과 재물, 재능이 모두 다 주님의 것인 양 비전을 위해 투자하고 거처지 로마에 교회를 세우는 일관성 있는 이 부부의 모습은 너무도 복된 모습이다. 바울의 비전을 알기에 로마로 돌아가서 바울의 로마행을 준비하고 로마에서 바울을 기다리는 이 부부의 비전 공유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4. 선교를 위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성도였다. (롬16:4)

롬16: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울타리였다. 유대인들이 고린도에서 바울을 훼방하고 대적할 때도 바울을 모시고 함께 지내는 일을 하였다. 에베소에서도 우상을 만드는 이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케도냐 사람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체포하였다. 사람들의 소송이 2시간 동안 계속되고 서기장은 에베소 도시를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라고 하며 무리를 진정시켰다. 

이 격렬한 시위의 원인은 사람들이 만든 우상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전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하는 자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자신의 목을 내놓을 각오로 바울을 돕고 지키고 어려움의 상황을 막아주는 일을 한 것이다. 이들 부부가 이렇게 목을 내어놓는 것은 바울이 남보다 공부를 많이 해서 인가? 아니다. 바울이 남보다 멋진 외모를 가져서일까?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키가 작았다. 

학자들에 의하면 대머리에다가 못생긴 얼굴, 그리고 말도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 안짱다리 형태로 걷는 걸음을 걸었고 눈에는 안질이 있었다. 사람의 외모가 위대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 바울이란 사람의 중심에 있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확신이 존경스러웠다.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지닌 사도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의 신앙이 위대하고 자랑스러웠다.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명자의 삶이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바울을 지켜야 한다. 

이 부부는 진정으로 가져야 할 선교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처럼 복음의 전사로 나아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해 대신 목이라도 내어놓아야 된다는 결단을 한 것이다. 내 목이라도 내어놓아 바울을 살리고 내 목이라도 걸고 바울을 섬기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는대로 실천에 옮겼다. 

함석한 씨는 이런 시를 지었다.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중략)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어리석은 성도가 아니다. 이들 부부는 내가 죽고 너만은 살아도 될 사람을 가진 부부인 것이다. 바울의 목숨을 위해 목을 내놓을 수 있는 이 부부는 가장 행복한 부부이다. 가장 분명하게 죽고 사는 이유를 아는 부부이다.   

이들 부부는 내가 만나려는 성도의 그림이다. 결혼에도 열려 있어 국제 결혼을 하고, 섬김에도 열려 있어 집을 내어놓고, 복음에도 열려 있어 높은 수준의 영성가가 되고, 선교에도 열려 있어 생업을 포기하고 단기 선교를 떠나고 비전에 열려 있어 바울의 동역자가 되고 가치에 열려 있어, 부부가 서로에게 열려 있어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주의 일을 한다. 그 열린 성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 여기 교회 성도라고 믿고 나는 식당 이름을 지었다. 1층에 있는 식당 하나는 브리스길라홀, 또 하나는 아굴라홀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제 ‘이런 부부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열린 생각으로 복음에 쓰임 받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구하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이런 부부를 한 가정, 두 가정 만나는 기쁨을 구한다. 

성도들이 목을 내어놓기 전에 나는 내가 먼저 목을 내어놓는 목회자인가? 

성도들이 나의 동역자가 되기 이전 내가 복음 사역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보여주는가? 

성도들이 변함없는 충성을 기다리기 전에 교회를 위해 내가 일관된 섬김으로 살아보여야 함을 생각한다. 바울 같지 못하고 베드로 같지 못하고 성서의 사도 같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부부 성도를 만나기를 꿈꾼다. 

가정의 달에 아름답고 멋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들이 교회 안에 세워져 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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