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청년주일] 청년들이 살았습니까? (시 119:8-9, 행 20:9-12)

첨부 1


청년들이 살았습니까? (시 119:8-9, 행 20:9-12)


피라미드의 기원을 아십니까? 피라미드는 임호테프라는 기량이 빼어난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기원전 3천년 경 이집트를 통일하여 파라오 자리에 앉은 제셀왕은 임호테프에게 명령하여 영원한 집을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왕의 무덤은 ‘마스타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스타바’란 ‘벤치’의 의미를 가진 아라비아말입니다. 무덤의 모양이 아라비아 풍의 벤치와 비슷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이 무덤은 돌을 새겨서 만든 장방형 널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셀왕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 무덤을 만들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임호테프는 커다란 ‘마스타바’ 위에 또 하나의 ‘마스타바’를 포개어 놓았습니다. 두 개를 포개어 보니 더 많이 포개어 보고 싶어져서 3개가 4개가 되고, 5개로 불어나 마침내 기묘한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피라미드입니다. 옛 임금들은 자기가 죽어서 묻힐 무덤을 크고 호화롭게 하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살 생각을 해야지 죽을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까? 살기 위해 거창한 일을 해야지 죽음을 위해 거창한 일을 해서 되겠습니까? 죽음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면 이런 무모한 일을 합니다. 죽은 다음에 아무리 호화롭고 거창하다고 하더라도 죽은 다음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은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청년들이 살 궁리를 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 생각을 하고 살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 9:4에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무서운 짐승이라도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그의 단편소설에서 “죽은 사람보다 더 가난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죽으면 아무 것도 없으니 가장 가난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으니 가장 가난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살아 있습니까? 청년이 살아있어야 교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청년이 살아있어야 사회가 기쁨이 있습니다. 청년이 살아있어야 국가가 기대를 가집니다. 청년이 죽어 있으면 가정도 교회도 절망입니다. 사회도 국가도 슬픔입니다.  

‘동안열풍’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다. 동안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 우리사회의 모습입니다. 동안열풍은 ‘연령주의 사회’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나이 많으면 사회에서 물러나야 하는 연령주의가 동안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늙어 보이면 안 된다고 늙어보이지 않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열풍은 ‘안티 에이징’이 동반 인기라고 합니다. 어려보이는 것이 우리나라만큼 경쟁력 있는 자원인 나라가 없습니다. 거기에 ‘동안미녀’라는 드라마까지 있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젊게 보이려고 애씁니다. 보톡스니 지방흡입이니 해서 젊게 보이려는 노력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젊게 보이려고 애쓸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젊은이는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가지는 가장 큰 특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젊은 것입니다. 젊었기 때문에 때로는 실수도 양해됩니다. 그런데 청년이 패기가 없고, 정신이 살아있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어떤 분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면 당신을 청년이다”라는 말대로 많은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에 보면 (계 3:1-6)-“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외형은 완벽하고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내부는 비어있고 썩어있는 문자 그대로 ‘외화내빈’의 모습이었습니다. 겉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알맹이가 없는 명목상(名目上)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내면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청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인 청년이 죽었습니다. 슬픔 가운데 울면서 아들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어머니를 보시고 예수님은 마음 아파하시면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살아 있어야 할 청년이 죽어 있어서 어머니에게 아픔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살아서 어머니에게 새 희망이 되었습니다. 청년이 살아야 하는 것은 자기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에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살아서 우리교회의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말씀을 게을리 하고 졸면 떨어집니다. 

사도행전 20:9에는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고 합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왜 삼층에서 바닥으로 떨어졌습니까? 창에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졸았습니다. 말씀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청년이 떨어진 것입니다. 
  
학자들은 유두고가 졸았다는 것, 창에 걸터앉아 보기도 안 좋았던 것, 밖에서 방 안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막았던 것, 이 모든 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두고가 죽은 이유를 너무 악의로 해석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유두고가 피곤하여 졸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날 유두고만 피곤하였을까요? 힘 드는 일을 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날 힘들게 일한 사람이 유두고 한 사람밖에 없었을까요? 조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 큽니다. 피곤한대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것은 참 장합니다. 저는 예배시간에 조는 분들을 보면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게 졸리는 데도 교회까지 온 것만도 감사하지요. 
  
바울의 강론이 그날따라 유난히 길었습니다. 종일 일하고 와서 밤에 말씀을 듣는 것이 피곤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말씀을 게을리 하고 졸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조는 분들, 혹시 떨어질지 모르니 조심하세요. 
  
졸았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마귀의 유혹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유혹하기 가장 쉬운 시간이 조는 시간입니다. 마태복음 13:25에는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합니다. 39절에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라고 합니다. 청년들이 세상에서 마귀의 유혹, 정욕, 악행이 없게 졸지 말아야 합니다. 
  
잠은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어나지 못하는 잠은 저주입니다. 잠은 깨어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깨어나지 않는 잠을 죽음이라 합니다. 아무리 졸려도 아무 때나 졸아서도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깨어 있을 때와 잘 때가 분명해야 합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설교시간에 성도가 조는 것은 설교자인 목사님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하는데 어떤 분이 계속 졸고 있습니다. 설교에 방해가 되어 목사님은 조는 분의 옆에 있는 분에게 좀 깨우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목사님이 재워놓고 나보고 깨우래”라고 하더랍니다. 사람이 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목사도 때로는 졸릴 때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배 시간에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장로님의 기도시간에 졸다가 이미 기도가 끝났는데도 깨지 못했습니다. 옆에서 다른 장로님이 목사님을 깨웠습니다. 얼결에 깬 목사님은 얼른 사회석에 나와서 “3장 찬송 부르시고 마치겠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왜 졸았을까요?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여자가 졸다가 어깨에 기대면 남자는 보통 어떤 생각이 드나요? 어떤 사람은 답하기를 “얼굴 따라 다르겠죠”라고 합디다. “예쁘면 허리 펴고 좀 더 기대게 해주고, 안 예쁘면 귀빵 한 대 때립니다”라고 썼습니다. 예쁜 사람이 조는 것은 죄가 되지 않나 봅니다. 하나님께 예쁜 사람은 졸아도 괜찮은데, 예쁘지 않는 사람이 졸면 야단 맞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예쁜 처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는 예쁘지 않는 처녀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했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항해 도중에 풍랑이 일어나 배가 크게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이런 큰 풍랑이 났는지를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제비에 뽑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요나는 배 제일 밑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잠들어 있는 요나에게 말합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하나님의 선지자가 세상 사람에게 이런 질책을 당하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풍랑 때문에 아우성인데 잠이 오는 것도 비정상입니다. 깨어 있어야 할 때 잠들어 있으면 웃음거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를 보세요. 신랑이 더디 오자 열 처녀가 다 졸았습니다. 성경은 “다 졸며 잘 새”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도 졸고 잤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들이 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피곤하여 졸리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졸았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졸며 잤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기름도 준비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옵니까? 이것이 이미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잠은 복이지만 잠들지 않아야 할 때에 자는 것은 화입니다. 기름 준비도 없이 잠을 자는 것이 화라는 말입니다. 
  
어떤 신하가 인생에 성공하는 비결을 임금에게 물었습니다. 임금은 모든 일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면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임금은 그 신하에게 기름이 꼭대기까지 찬 그릇을 주었습니다. 찰랑찰랑하는 기름 그릇을 들고 성을 한 바퀴 돌되 기름을 한 방울도 떨어트리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을 다 돈 다음 임금은 물어보았습니다. “서쪽 성벽을 돌 때에 말을 탄 병사를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북쪽 모퉁이를 돌 때 흰 담장을 한 집을 보았느냐?” “못 보았습니다”. “왜 못 보았느냐?” “기름이 쏟아지지 않게 하려고 기름 그릇만 쳐다보고 오느라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일에 죽을힘을 다해 집중해서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어떤 일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면 졸 시간이 없습니다. 
  
‘졸면 죽는다’.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군에서 많이 하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최전방 벙커에서 병사가 졸 때 북한에서 몰래 내려와 목을 배어 간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졸면 죽습니다. 졸면 우리 영혼도 죽습니다. 에베소서 5:14에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졸지 않고 항상 영혼이 깨어있는 우리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삽니다. 
  
사도행전 20:10에는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라고 합니다. 죽은 것 같이 보여도 생명이 있으면 삽니다.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해도 생명이 있으면 산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죽은 것 같아도 반드시 다시 살 수 있습니다. 
  
‘3층에서 떨어져서 죽었을까?’라고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의사인 누가의 기록입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네크로스’라는 헬라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죽은 것같이 보이는 가사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잠시 졸아도, 떨어져 죽어도 그 속에 생명의 불씨만 남아 있으면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우리 청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이 있으면 다시 삽니다. 작은 불씨가 다시 큰 불을 일으킵니다. 산에 불이 났을 때 작은 불씨가 다시 살아서 큰 불로 번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끄진 불도 다시 보자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력의 신비입니다. 고목에 새 순이 돋고, 청계천에 물고기가 거니는 것을 보면 하나님 창조에 생명의 신비가 가득 찬 세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안에 생명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것을 보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마태 안에 생명이 있을 때에 예수님을 부르시는 것을 듣고 세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삭개오 안에 생명이 있을 때에 예수님을 만나자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의 한 강도 안에 생명이 있을 때에 예수님을 의지하며 간구하였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보장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지만 우리 안에 있는 생명 때문에 다시 삯이 돋고, 순이 나고, 줄기가 피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여러 해 전에 큰 산불이 나서 많은 것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시 원래 있던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새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강원도 양양에서 여러 해 전에 큰 불이 났습니다. 천년 고찰이라고 하는 낙산사도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곳에도 풀과 나무가 피어나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산불이 나고 몇 년후가 지나면 다시 동물들이 돌아오고, 풀과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끈질긴 생명의 힘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겨울에 가로수 가지치기할 보면 무자비하게 가지를 마구 잘라냅니다. 큰 줄기만 남고 가지들을 다 잘라 버립니다. 저렇게 잘라서 될까 싶지만 다음 여름에 다시 가지가 자라고 푸른 잎이 열립니다. 그 나무에 생명이 있으면 다 잘라낸 것 같지만 다시 자라기 마련입니다. 
  
2001년 9월 어느 날 건설노동자 프랭크 실레키아는 911사태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어 자원봉사자로 나섰습니다. 참사 속에서 20피트 높이의 십자가를 발견하였습니다. 곳곳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철 빔들이 십자가 모양으로 잘라져 흩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참사 바로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소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다시 소망이 피어납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폐허, 즐비한 시체들, 죽음이 판치는 곳이라도 십자가만 있으면 다시 생명의 싹이 돋습니다. 에스겔 37장,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죽어 말라 있는 시체였지만 흩어진 하나님의 기운인 생기가 들어가니 생명이 넘치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이가 죽었다고 합니다. 젊은이의 기백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군대에 안 가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살아 있습니다. 이 전보다 해병대에 많이 가려고 하고, 전방부대에 가려고 지원한다고 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다시 삽니다. 절대로 젊은이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젊은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려합니다. 백성을 인도할 노련한 모세가 젊은 후계자를 세울 때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젊음보다 노련함, 백성을 이끌 카리스마가 필요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왜 여호수아를 세우라고 하십니까? 영이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7:18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를 세운 것은 그가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의 사람에게 백성들은 복종합니다. 
  
미국 오클라호마의 작은 마을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의욕을 가지고 심방하고 훈련하였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는 주일에 설교 들으러 오라고 요청하고 기다렸지만 몇 사람 오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다음날 지방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교회가 죽었습니다. 장례식을 다음 주일 교회에서 합니다”. 주일이 되자 강단에 관을 올려놓았습니다. “떠나시는 분에게 조의를 표 하세요”. 교인들은 열린 관을 들여다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관 속에는 거울이 있었고, 거울에는 자신의 얼굴이 바친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죽었다고요? 내가 죽었습니다. 내가 영을 잃었습니다. 
  
유두고가 왜 떨어졌고, 왜 죽었습니까? 창가에 앉아 있다가 떨어졌다고요? 졸다가 떨어졌다고요? 만일에 창가에서 조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누군가 자리를 바꿔줘야 했습니다. 깨워줘야 했습니다. 청년이 죽은 것은 교회가 죽은 것입니다. 교회가 죽었다고 모두 남의 탓만 합니다. 그 사람 탓만 합니다. 청년의 죽음은 교회 죽음이며 교회가 죽은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책임이 큽니다. 교회는 생명이 있는 곳이며, 살리는 곳인데 교회에 와서 죽었다면 말이 안 됩니다. 나아가서 살려야 할 교회가 오히려 죽인다면 더구나 문제가 큽니다. 그건 바로 내 탓입니다. 누가 살려야 합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살려야 합니다. 

  
결론 

죽은 것이 다시 사는 것,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제자들을 힘 있게 만들고, 겁이 없게 만든 요인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함께 바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남으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다고 합니다. 청년이 살아나면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됩니다. 부활신앙을 목격하고 부활의 감격을 맛본 드로아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워렌 버핏은 투자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1원칙은 ‘절대 돈을 잃지 말라’(Never lose money)는 것입니다. 제2원칙은 ‘절대로 제1원칙을 잊지 말라’(Never forget rule number 1)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의 제1원칙이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만은 절대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 우리교회와 나라에 희망과 기쁨을 주는 우리 청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